< 5. 개 같은 상황 >
“저 독한 놈, 결국 끝까지 하네....”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즈음에 모래 주머니를 양팔과 다리에 두 개씩 찬 채 삼재검법을 무리 없이 펼치는 북리준을 보고 경삼이 혀를 찼다.
“저 놈, 뭔가 일 내겠다.”
자신이 해도 모래 주머니를 두 개씩 찬 채 저리 완벽하게 삼재검을 펼칠 수 없음에 고패가 혀를 내둘렀다.
“옆에 있는 놈도 괴물이야.”
북리준의 옆에 얼굴이 시뻘개진 채 모래 주머니를 양팔과 발목에 한 개씩 찬 하승진이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두 놈 다 독한 놈인 것이 측간을 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모래 주머니를 몸에서 떼 놓는 경우가 없어.”
북리준과 하승진의 벗은 상체에 불끈 솟아 오르는 근육들이 목검이 휘둘러 질 때 마다 물결을 일으켰다.
“오늘이 마지막 인가?”
“본대에서 신병들을 내 놓으라고 하루가 멀다 하고 대주를 찾아 온대.”
“많이 못 돌아온 모양이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왜구놈들이 작심을 하고 들이 받는 다고 하더라. 저 놈들 중 과연 몇 놈이나 살아 남을지....”
본대 배속을 앞둔 마지막 밤!
북리준과 하승진이 각자의 모래주머니를 찬 채 목검을 들고 섰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
북리준의 말에 하승진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자, 해 보자!”
각자 삼재검을 극한 까지 휘둘러 몸에 익힌 둘이 서로의 등을 맞댄 채 전면을 주시했다.
“왜구 놈들과 맞닥뜨렸을 때 개별로 행동 하다가는 바로 놈들의 밥이 될 뿐이다. 고작 삼재검으로 그 지옥에서 홀로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희박해.”
승진이 맞닿은 등에서 느껴지는 후끈거리는 열기를 음미하며 귀를 기울였다.
“이제부터 매일 밤 너는 나와 합격술을 연마해야 한다. 적에게 포위 되었을 때와 전방에 적들이 달려 들 때 넌 나와 한 몸이 되어 놈들을 베어 넘겨야 한다.”
교교한 달빛이 가득한 연무장에 북리준과 하승진이 때로는 등을 맞대고 때로는 같이 전면을 향해 치닫기도 하고 때로는 동시에 뒤로 물러나는 등 마주치는 눈빛만으로 한 몸 같이 움직이기 위한 훈련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
해남검단의 예비대주인 강구가 약 백 여명의 신병들을 모아 놓고 우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오늘 오후, 너희들은 본대로 배속 받게 될 것이다. 본대로 배속 되면 아마도 바로 왜구놈들과 맞닥뜨릴 것이다.
왜놈들의 도는 너희들의 목을 노리고 떨어질 것이고 또는 팔다리를 내 놓으라 소리를 지를 것이다.
그 전에 먼저 놈들의 목과 팔다리를 베어라. 그것만이 내일 뜨는 해를 다시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열변을 토하는 강구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 한 채 승진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예비대주는 우리 같은 생존자가 아니라 남해검문의 무사라고 하더라. 내공을 운용할 줄 아는 진짜 검수래.”
북리준이 묵묵히 승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본대에서 육개월 동안 살아남는다면 남해검문의 검법을 가르쳐 준대. 이런 시시한 삼재검이 아닌 진짜 검을 말이야.”
강구대주의 일장 연설이 끝나고 각 조의 교관들이 자신들에게 소속 되었던 신병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 부터 점심 때 까지 휴식을 취해라. 미시 초에 연무장으로 집합 한다.
부디 오래 살아 남거라!”
신병들이 각 자의 천막으로 흩어지는 중에 북리준과 하승진은 예의 모래주머니를 찬 채 목검을 들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북리준, 하승진! 잠깐 나 좀 보자.”
고패 교관이 둘을 부르자 서로 눈을 마주친 준과 승진이 신형을 돌렸다.
“너희 두 놈! 본대에 넘어가도 지금 같은 마음 변치 말고 열심히 수련 하거라. 한 마디 충고를 해 주마. 첫 전투에서 왜구놈들과 조우 했을 때 분노를 가라 앉히고 차가운 마음으로 살아 남을 방법을 찾아라.”
고패의 손짓에 북리준과 하승진이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말 같이 그게 쉽나....”
경삼이 고패의 뒤에서 불쑥 튀어 나왔다.
“저 두 놈은 여지껏 봐 왔던 놈들과 다르잖아. 부디 오래 살아 남았으면 해서....”
“에고, 아직도 정이 남아 있는 네 놈이 부럽다. 내일부터 다시 신병을 받아 훈련 시킬 생각을 하니 가슴이 갑갑하다.”
****
“그 새끼, 오늘 넘어 온다는 거지?”
한 달 전 북리준이 던진 돌에 인중을 맞아 앞니 서너개가 날아간 왕일이 이를 부득 갈았다.
“그렇겠지. 본대 인원의 삼할이 못 돌아 왔으니까.”
갓 들어온 신병에게 개망신을 당한 청룡대 소속 왕일이 북리준을 어떻게 죽일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서라. 그 놈 강구 대주가 눈여겨 보고 있는 모양이더라.”
“눈 여겨 봐 봤자지. 왜구놈의 칼에 뒤진건지 아군 칼에 뒤진 건지 누가 알아? 그냥 뒤지면 끝이야.”
****
해남검단의 본대가 위치한 성 중앙의 전각!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과 같은 예기를 뿜고 있는 삼십대 중후반의 사내가 상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계속해!”
해남검단주인 생사검 이벽의 말에 부단주인 섬전검 공철이 전면에 걸린 광서, 광동, 해남의 지도 앞에서 말을 이어갔다.
“왜국 본토에서 축출된 사무라이 출신인 마사히로가 사분오열 되어 있는 왜구들을 흡수 통합을 시작 한 지 반년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십에서 이십인 단위로 즉홍적으로 움직이던 왜구들이 근래 삼십인 이상의 단을 꾸리고 목표를 세워 체계적으로 살육 및 약탈을 자행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공철의 말에 자리에 배석해 있던 오개대의 대주들이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해남검단의 본대는 총 다섯 개의 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린, 청룡, 백호, 현무, 주작대로 분류 되어 각 대의 정해진 어촌 마을을 순시 하다 왜구의 습격을 감지 하면 각 대주들이 가지고 있는 신호탄을 쏘아 올려 합심하여 왜구를 섬멸 하는 전투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각 대의 인원 손실 현황 보고해 봐!”
남해검문의 무공 교두 출신으로 문주의 주화입마 후 자식들의 더러운 암투가 싫어 해남검단주를 자청해서 내려온 검단주의 말에 호리호리한 키에 팔다리가 길쭉 길쭉한 검수가 먼저 보고를 했다.
“기린대 총 백 명 중 삼십이 죽고 열 둘이 상했습니다.”
검단주인 이벽을 따라 해남검단에 내려온 기린대주 목대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앉아 있던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사내가 말을 이었다.
“청룡대 스물 하나가 죽고 열 다섯이 상했소이다.”
청룡대주 뇌호의 보고가 끝나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 인지 여자 인지 모호한 분위기의 무사가 말을 받았다.
“주작대 열 하나가 죽고 다섯이 상했습니다.”
왜구의 습격에 가족 친지들을 잃은 여자들이 적진에 침투 하여 정보를 수집 하거나 왜구를 끌어들이는 미끼의 역할을 마다 하지 않는 첩보 조직인 주작대의 대주 막가령이 보고를 했다.
얼굴을 좌에서 우로 가로 지른 검상이 섬뜩한 무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백호대 열셋이 죽고 열다섯이 상했소."
부단주인 섬전검 공철의 친우로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해남검단에 쫓아온 백호대주 강이환이 공철과 눈을 마주쳤다.
"현무대 서른 하나 뒈졌고 부상자는 없소."
스산한 표정의 현무대주 가겸의 말에 다른 대주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현무대의 경우 부상자를 절대 돌보지 않는 다는 대주의 명에 부상을 당하면 죽을 확률이 대부분임을 아는 다른 대주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심각한 상황이군."
검단주의 말에 부단주인 공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놈들이 더욱더 체계적으로 움직이면 희생이 더 커질 것이라는 점이지요."
"신병들은?"
"오늘 백명이 본대로 배속될 예정입니다."
"백명? 왜 자꾸 신병의 숫자가 줄지?"
"놈들이 마사히로가 세운 군율에 따라 마을을 습격 하는 방식이 바뀌어 생존자가 급격히 감소 했습니다. 한 마디로 싹 쓸어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신병의 숫자 뿐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린대주가 공철의 말을 끊으며 끼어 들었다.
"계속 해 봐!"
검단주의 말에 기린대주가 좌중의 인물들에게 시선을 던진 후 말을 이어갔다.
"보급이 엉망입니다. 검이나 도 등의 병기 뿐 아니라 각 대를 구분 짓는 전투복의 보급이 끊어 진 지가 삼개월이 넘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식량입니다. 작년 까지만 해도 병사들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고기를 공급해 주었는데 지금은 매일 허여멀건한 죽 만이 주어 지고 있습니다."
"주작대의 경우 왜구놈들에 대한 첩보를 수집 할 때 들어가는 비용 지급이 중단 되어 맨 몸으로 부딪쳐 정보를 얻어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작대주가 이를 꽉 깨물고는 말을 받았다.
"조정에서 해남검단에 지급되는 군자금이 월 은자 오백냥 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변화가 생긴건가?"
검단주의 물음에 부단주 공철이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검단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남해 검문에서 저희에게 내려 주는 군자금이 월 삼백오십냥 이었는데 그마나 약 삼개월 전부터 월 백냥 정도로 줄었습니다."
"월 백냥? 나머지는?"
생사검의 물음에 공철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어갔다.
"본래 오백냥 중 백오십냥은 남해검문에서 저희 해남검단을 유지 하기 위한 제반 비용이라고 떼어 가고 삼백오십냥으로 근근히 유지 했었는데 이마저도 남해검문의 내부 사정으로 백냥으로 줄어 내려 오고 있습니다."
"이런 개새끼들... 아주 제대로 썩었구만."
검단주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혀를 내둘렀다.
"본대의 경우 훈련은 고사하고 굶어 죽지 않으려고 들로 산으로 바다로 각자 먹을 것을 찾기 위해 헤매고 다니고 있습니다."
"단주님! 더 큰 문제는 해남검단의 무인들이 각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보호비 명목으로 금전과 가축을 수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룡대주 뇌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를 했다.
"부단주!"
"넵, 말씀 하십시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남해검문의 첩자는 없으니까 톡 까놓고 이야기 하자. 누구야?"
부단주 공철이 앉아 있는 각 대주와 단주를 일별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 명 다 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병신새끼들..."
현재 남해검문의 문주인 목천중이 육개월 전 주화입마에 빠져 가사 상태에 빠진 후 철군, 철상, 철우 세 아들이 문주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개판이 되어 버린 검문의 사정을 떠올리며 이벽이 한탄을 했다.
"일이삼 공자들이 외부 인사를 영입 하기 위해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눈에 불을 켜고 달려 드는 중에 저희 해남검단에 배정 되는 군자금이 눈에 띈 것이지요.
세 명이 저희에게 떨어져야 할 군자금 이백오십냥을 나누어 가져 가고 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회의장을 내리 누르는 가운데 단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철이는 나랑 검문으로 지금 출발 한다. 이런 개새끼들 한테 시원하게 쌍욕이나 해 주고 오자. 해남검단의 인원이 총 육백에서 칠백 사이인데 월 은자 백냥으로 왜구하고 싸우라고?"
검단주와 부단주가 회의장을 벗어 나자 현무대주가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가 봐야 별무소득 일텐데 뭘! 그냥 왜구를 막는 시늉만 하자구. 나라에서도 검문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하는 중에 뭔 왜구를 막아? 병신들. 빨리 신병들이나 나누자."
현무대주 가겸이 비웃음을 남긴 채 밖으로 나가자 네 개 대주들이 서로를 바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 새끼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 나가서 신병들 인수해서 물고기나 잡아 내다팔자고...."
백호대주가 ‘끄응’ 새된신음을 내며 신형을 일으키자 나머지 대주들도 한숨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 5. 개 같은 상황 > 끝
ⓒ 편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