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해천단공 >
”오늘 왜구 놈들과 한바탕하고 살아 온 놈들은 지금부터 내일 저녁 때까지 하루 정비할 시간을 준다.“
왕일 부대주와 함께 생환한 청룡대원들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뇌호 대주를 바라 보았다.
”사고 치지 말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말도록.“
뇌호 대주가 말을 마치고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자 북리준과 하승진에게 누군가 다가 왔다.
”네 놈 둘은..... 따라와!“
하승진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 보자 왕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해꼬지 하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따라와! 술 한잔 사 줄테니까.“
하승진이 북리준을 바라 보고 답을 구하자 북리준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전신에 두른 붕대에 피가 배어 나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세 사내가 해남검단을 나섰다.
해남검단에서 삼삼오오 짝을 짓고 어딘가로 향하는 행렬에 세 사람이 묻어 들어 갔다.
”어디로 가는 거요?“
하승진이 피 냄새를 펄펄 풍기며 희희낙락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는 무인들을 보고 왕일을 쳐다 보았다.
”따라 오면 알아. 다음 부터는 네 놈들도 수시로 들락 날락할 곳이니까.“
약 반시진 정도 걸었을까? 저 멀리 불야성을 이룬 마을 하나가 보였다.
”어섭쇼! 해남검단의 무인분들, 환영 합니다요.“
나이 어린 점소이가 호객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허름한 삼층 짜리 전각에 환하게 들어온 불빛이 눈에 가득 들어 왔다.
승진이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니 앞에 있는 객잔 같은 곳 서 너곳과 청등, 홍등이 걸린 건물 두 세채가 보였다.
”오늘은 내가 한잔 살테니 따라 오너라.“
왕일이 절뚝 거리는 걸음으로 객잔 안으로 들어가자 북리준이 그 뒤를 따랐다.
”여기 화주하고 오리구이!“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한 왕일이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앉아라.“
왕일의 앞에 자리를 잡은 북리준이 차분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 보았다.
여기 저기 피가 배인 붕대를 감은 해남검단 무인들과 일반인, 낭인으로 보이는 무인들이 각자 자리를 잡은 채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여기는 싼 가격에 마음 놓고 술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천락촌이라고 한다.
우리 같은 검단 무인이나 낭인들, 근처에 사는 일반인들이 주로 찾는 곳이지.“
얼콰하게 취한 얼굴로 마치 싸움을 하듯 서로 소리를 지르며 대화 하는 낭인들의 얼굴을 보며 승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누가 보면 싸우는 줄 알겠소.“
”싸구려 화주 한잔과 마음 나눌 수 있는 친우가 있으면 저렇게 행복 할 수 있는 법이다.“
점소이가 탁자에 먹음직 스러운 오리구이 한 마리와 화주 두 병을 내려 놓자 왕일이 병을 잡아 갔다.
”설마 술은 처음?“
”한 두잔 정도 아버지와 함께....“
”난 말술이오.“
북리준의 말에 하승진이 헤벌죽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피내음을 잊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술, 여자, 아편.... 난 술이 제일 이더군.
이 곳에서는 내가 말한 세 가지를 다 할 수 있다. 물론 돈이 있어야 하지....“
가득 채운 화주잔을 든 북리준과 하승진에게 왕일이 자신의 잔을 들어 부딪쳤다.
”이렇게 다시 화주잔을 들게 해 준 네 놈들에게 감사한다. 쭉 들어라.“
세 사람이 화끈하게 잔을 비우지 왕일이 오리 다리를 하나 찢어 북리준에게 내밀었다.
”내 목숨값이 이렇게 싸지는 않지만 지금은 줄 것이 이것밖에 없구나.“
”부담 갖지 마시오. 내가 원해서 한 일이니....“
”큭, 알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쏘는 걸로 퉁 치자.“
서로 잔을 주거니 받거니 술이 서너순배 돌자 승진이 왕일에게 질문을 했다.
”그 쪽은 나이가 어떻게 되우? 우리는 열 다섯 이오.“
”알아! 난 스물 일곱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 남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다.“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우?“
”나야 고맙지.“
승진의 말에 왕일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싸우면서 보니까 형님의 검법은 삼재 검법이 아니던데 남해검문의 검이오?“
왕일이 화주잔을 쭉 비우고 잔을 내밀자 승진이 잔을 채웠다.
”네 놈들도 육개월 동안 살아 남으면 남해검문의 기본검법인 남해검법을 배울 수 있다.“
”형님은 언제 해남검단에 들어 왔수?“
”음, 난 너희들 보다 많이 늦게 들어 왔지. 햇수로 오년이 다 되었다.“
그 때 묵묵히 잔을 비우던 북리준이 왕일에게 질문을 던졌다.
”남해검법에 대해 말해 주시오.“
”남해검법... 그냥 기본검법이다. 물론 삼재검법 보다는 윗길의 검이기는 하지만 남해검문에 들어오는 신입 문도들에게 가르치는 기본검이다.“
구운 오리를 한입 베어 문 왕일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인데.... 삼재검이나 남해검이나 우리한테는 다 거기서 거기야.
상승 검법은 그 검에 맞는 심법이 있어야 하고 그 심법을 운용할 내공이 있어야 하는데 그 형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는 거지....
우리같은 놈들한테는 딴 세상 이야기지, 참 엿 같은 상황이지.“
”우리한테 그 검.... 가르쳐 주시오.“
북리준의 말에 승진이 놀란 얼굴로 왕일을 바라 보았다.
”육개월을 살아 남아야 배울 수 있다잖아. 괜히 형님이 곤란해 지는 거 아니우?“
”개뿔! 내일부터 가르쳐 줄게. 그런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라. 그냥 형일 뿐이야.
남해검을 배워서 지금 까지 내가 살아 남은 것이 아니라 운이 따른 거다. 운.....!“
”괜찮겠소? 그래도 규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승진의 걱정스런 물음에 왕일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미친놈아! 내가 낮에 대 놓고 가르치겠냐? 네 놈들 밤마다 모래 주머니 차고 지랄 할 때 가르쳐 줄테니 알아서 해라.“
”고맙소!“
북리준의 무뚝뚝한 인사에 왕일이 퍽퍽한 웃음을 지었다.
”무뚝뚝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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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검법에는 그에 맞는 심법이 있다. 이걸 무조건 외워라.“
왕일이 다음 날 밤 연무장을 뛰고 있는 북리준과 하승진에게 개발 새발 쓰여진 필사본 두 권을 던져 주었다.
”남해삼검, 해천단공....“
북리준이 책자의 겉표지에 쓰인 글을 읽자 승진이 신기한 얼굴로 눈을 빛냈다.
”글도 알아? 신기한 놈....“
”글을 아니 다행이다. 해남검단에서 육개월 넘게 생존한 놈들 중에 까막눈인 놈들이 태반이라 남해검법의 형만 따라 하는 놈이 대부분이다.
준이 네 놈이 승진이놈에게 설명해 주고.... 혈도에 대해 아느냐?“
”혈도? 그런 것도 알아야 되우?“
승진의 말에 왕일이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네 놈은 준이 놈에게 많이 배워라. 너는?“
”아버지께 삼재심법을 배울 때 들었소.“
왕일은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 글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여서 촌장의 심부름으로 마을을 떠나 있어 횡액을 면했다고 했다.
”지난 번에 이야기 했듯이 이 검법과 심법은 남해검문에 입문하면 배우는 기본공이다.
솔직히 승진이 네 놈은 심법을 전혀 배우지 않아 해천단공을 연공하기에는 무리다. 남해삼검의 형이라도 열심히 연마해라. 삼재검보다는 조금 나을 것이다.“
왕일이 해천단공에 대해 북리준에게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고는 자러 들어가고 교교히 떨어지는 달빛에 해천단공을 펼쳐 들었다.
”내가 며칠 보고 나서 네게 설명을 해 주마. 넌 일단 뛰고 있어라.“
북리준의 말에 승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래주머니를 찬 채 연무장을 뛰기 시작 했다.
‘삼재심법 보다는 오묘한 구석이 있는 심법이다. 먼저 살펴본 남해삼검과 함께 운용하면 삼재검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효용을 볼 수 있겠어.’
며칠 동안 밤마다 잠을 줄여가며 남해검법서와 해천단공을 참오한 결과 어느 정도 검법과 심법의 연관관계를 이해한 북리준이 모두들 깊은 잠에 빠진 천막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다행히 삼재심법으로 혈도의 운용을 해 본적이 있으니 해천단공에 따라 일주천을 해 보자.’
모두들 깊은 잠에 빠진 천막 안에서 가부좌를 튼 채 해천단공의 운용을 시작한 북리준이 자신의 몸 안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렇게 내공이 쉽게 모이는 건가?’
어릴 때부터 운용해 온 삼재심법의 영향으로 단전의 틀이 잡혀 있었던 북리준의 단전에 확실히 느낌이 올 정도로 내공이 모이는 것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예전에 만년금구가 가져다 줘서 복용한 백령해왕삼의 기운이 전신 세맥에 잠들어 있다 제대로 된 심법의 운용으로 조금씩 녹은 기운이 단전으로 모여 드는 이유를 알 까닭이 없는 북리준은 이주천, 삼주천 해천단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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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악, 모르겠어. 너무 어려워!“
북리준이 열 번도 넘게 땅바닥에 사람의 신체를 그리고 혈도에 대해 설명을 하자 하승진이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것을 이해 못하면 해천단공을 못 배워. 그러면 남해삼검도 수박 겉핥기만 하고 마는 거야.“
북리준이 다시 한번 막대기를 들어 설명을 시작하자 승진이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 이제부터 내가 하는 검을 따라해. 천천히 할테니까.“
북리준이 검을 들어 남해삼검의 남해일파, 남해파랑, 남해회류를 천천히 시전했다.
”이건 쉽네. 진작 이것부터 하지.“
”승진아, 지금 내가 보이는 검은 형식만 보여 주는 거야. 여기에 해천단공의 내공이 실리면 놀라운 검법이 되는 거야.“
”어느 세월에 내공을 쌓아 검에 실어? 일단 살고 봐야지.“
”맞아. 계속 모래 주머니를 찬 채로 삼재검과 남해삼검을 계속 연습하고 밤에는 해천단공을 운기해야 돼.“
”알겠어! 일단 형부터 익히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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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일에게서 남해삼검과 해천단공을 받아 수련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즈음에 매일 도는 마을 순찰을 위해 다시 검단을 나서고 있었다.
”잘 되고 있냐?“
”덕분에 진전이 있습니다.“
”너 같은 놈은 보다 보다 처음 본다. 잠은 자냐?“
”틈틈이....“
”여하간 넌 내 옆에 딱 붙어 다녀. 목숨 빚을 갚아야 하니까.“
척후로 나섰던 청룡대의 무인이 다급하게 왕일에게로 뛰어 온다.
”부대주! 왜구 놈들이오.“
”전원 전투 준비. 혼자 떨어 지면 죽는다. 세 명이상 꼭 붙어 다녀.“
왕일의 말에 오십여명의 청룡대 무인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돌격!“
왕일의 말에 전면 마을에서 약탈을 일삼고 소리를 지르고 있던 왜구들을 향해 청룡대가 들이닥쳤다.
”劍團 奴ら だ。全員 戦闘準備!“
(검단 놈들이다. 전원 전투 준비!)
마을 곳곳에 퍼져 약탈과 살인을 일삼던 왜구들이 대장으로 보이는 왜구의 외침에 일사불란하게 마을 입구로 모여 들었다.
”저 앞에 놈! 준이하고 승진이는 나하고 맡는다.“
약 삼십여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왜구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짓쳐 들어오는 청룡대의 검을 맞아 나갔다.
”카앙 캉, 크아아아악. 이 개새끼들아...!“
검과 피가 난무하는 곳 중앙에 왕일이 신형을 날려 대장으로 보이는 왜구 놈을 양단하기 위해 검을 내리쳤다.
”까앙 깡 깡“
왕일이 연신 쏟아 내는 남해삼검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막아내는 왜구의 가슴을 향해 검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훌쩍 신형이 미끌어지듯 뒤로 빠지며 승진의 검을 피해낸 왜구의 검이 승진의 머리를 쪼개기 위해 내리쳐 졌다.
”카앙“
어느새 들이 밀어진 북리준의 검에 막힌 왜구의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달려드는 왕일의 가슴을 베어갔다.
‘크으윽‘ 가슴에서 피를 뿜어내며 급히 뒤로 물러난 왕일의 목을 취하기 위해 다시 비행을 시작하는 왜구의 왜도가 갑자기 멈칫 하더니 급히 신형을 뒤로 빼내었다.
자신의 향해 검들이 거대한 파도와 같이 밀려 들어오는 기세에 이를 악다문 왜구의 왜도가 밀려드는 파도를 맞아 나갔다.
”카가가캉 카카캉 카가캉“
겨우 밀려드는 검의 파도를 막아내고 안도하고 있는 왜구 대장의 사각을 파고드는 승진의 검이 오른 어깨를 관통하고 그 뒤를 이은 거센 바람에 의해 피어난 파랑 같은 북리준의 검이 목을 스쳐 지나갔다.
”푸화아아아악“
왜구 대장의 목이 피분수와 함께 공중으로 떠오르자 급격하게 위세가 꺾인 왜구들 중 십여명 만이 목숨을 부지 한 채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괜찮소?“
가슴에서 흘린 피로 옷이 피범벅이 된 왕일에게 다가간 북리준이 품에서 붕대와 금창약을 꺼냈다.
”다행이 얕아. 피륙만 갈라 진 거니까 괜찮아. 그런데 네 놈의 그 검.... 내공을 실었나?“
< 8. 해천단공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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