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선택 >
땅바닥에 주저 앉아 왜구 대장에게 날린 남해삼검에 실린 기운에 왕일이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운이 좋았소....“
”지랄, 운이 좋아서 검에 내공을 싣냐?“
”그래 봐야 십년 정도의 내공이오.“
”하아, 미친 놈! 해천단공을 수련 한 지 한 달 만에 십년의 내공을?“
”더 이상은 늘지 않소.“
”더 늘면 사기지. 네 놈이 무슨 천무지체도 아니고.... 덕분에 목숨 빚 하나 더 늘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 주시오.“
”알았다. 술이나 한잔 사라.“
왜구놈 대장의 귀를 취해 건네주는 북리준을 승진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 보았다.
”네 놈이 잡았잖아?“
”네가 놈의 오른 어깨를 꿰뚫지 못했으면 기회가 없었다.“
규정이 바뀌어 왜구 대장의 귀는 은자 한냥으로 인정해 주는 지라 승진의 입이 좌우로 길게 찢어졌다.
”내가 술 살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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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귀!
왜구들 사이에서 회자 되는 두려움을 대표 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근래 오년 동안 검귀와 맞붙은 왜구들은 칠할 이상이 돌아 오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무공이 강하다거나 검술이 뛰어난 것이 아닌데 온 몸에서 뿜어내는 살기와 귀신같은 돌팔매에 이은 거침없는 칼질에 수 많은 왜구들이 그 칼에 스러져갔다.
”수고했다!“
이년 전 청룡대주였던 뇌호가 전사 한 후 청룡대 무인들의 적극적인 추대에 청룡대주가 된 북리준이 고개를 숙였다.
검단주 생사검 이벽이 뿌듯한 표정으로 장 내를 둘러 보았다.
”청룡대 덕분에 우리 해남검단이 근래 주위 어민들에게 자발적인 도움과 칭송을 받고 있다. 물론 다른 대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같이 최선을 다하도록!“
검단주가 해산을 명하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룡대주는 잠깐 남았으면 한다.“
다시 자리에 앉은 북리준을 일별한 다른 대주들이 천막을 벗어 나자 생사검 이벽이 웃음을 지었다.
”한잔 할테야?“
북리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벽이 옆에 놓인 술병과 잔, 육포를 들고 옆에 자리를 잡았다.
”대주가 되었으면 너무 앞에 나서지 말아라. 정말 고수를 만나면 너도 못 돌아 올 수 있다.“
”알겠습니다.“
”녀석...“
절대로 부하들을 앞세우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리 대답하는 우직한 모습에 이벽이 다시 웃음을 지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북리준이 새삼스럽게 자신에게 술을 부어 주는 검단주를 보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작금의 남해검문 사정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느냐?“
”그다지 관심이....“
자신의 잔을 입안에 털어넣고는 이벽이 다시 잔을 채웠다.
”남해검문주의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한 암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삼공자인 목철우는 세불리를 느끼고 대공자인 철군에게 붙었고 둘째인 철상은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대공자를 죽이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북리준이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잔을 비우자 이벽이 그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네 놈도 알다시피 난 그 어린 새끼들이 문주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온갖 추잡한 짓을 하는 꼴이 보기 싫어 이 곳으로 내 발로 걸어 들어 왔다.“
”알고 있습니다.“
육포를 질겅거리며 이벽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두 파로 갈라진 놈들이 아마도 네게 손짓을 할지도 모른다. 내 뒤를 이어 해남검단주가 될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너를 지목하고 있으니까....“
왜구들에 대한 증오심은 해남검단 내에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이고 항상 전투 시에 맨 앞에서 적들을 베어 넘기며 동료들의 목숨을 제일 먼저 챙기는 모습에 청룡대 뿐 아니라 모든 검단 무인들이 북리준과 함께 싸우기를 원하고 있었다.
”관심 없습니다. 전 왜구들의 씨를 말릴 때 까지 어디든 갈 생각이 없습니다.“
”안다 알아! 문제는 나만 알고 있다는 것이지.“
다시 술잔을 들어 서로 부딪치고는 잔을 비웠다.
”대공자인 목철군은 탐욕스럽고 이공자인 목철상은 냉혈한이다. 이 두 놈... 둘 다 위험한 놈이라는 거지.“
자신이 남해검문의 수석무공교두로 있으며 세 명의 검문주의 자제들을 가르쳐 본 이벽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해남검단이라는 곳이 말이다... 한 마디로 계륵 같은 존재다. 남 주기는 아깝고 가져 가기에는 그리 영양가가 없는 그런 곳이지.
문제는 두 놈 다 확실히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검단이 자신들의 손을 들어 주기 원하고 있다는 거야.“
북리준이 질겅거리던 육포를 꿀꺽 삼켰다.
”왜 제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지요?“
북리준의 물음에 이벽이 쓴웃음을 지었다.
”난 그 두 놈이 좌지우지 하기에는 껄끄러운 존재지. 물론 두 놈 중에 마음에 드는 놈이 없으니까 난 누구 편도 안들거거든.“
술병을 들다 병이 빈 것을 느낀 이벽이 옆에서 새 술병을 가지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기린대주 목대관과 주작대주 막가령은 대공자 편에 섰다. 백호대주 강이환과 현무대주 가겸은 이공자의 편이고....“
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북리준의 모습을 눈에 담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주화입마에 든 검문주가 오늘내일 하는 모양이다. 조만간 둘 중 한 놈은 문주가 되고 다른 한 놈은 죽어 나가겠지.“
병을 들어 이벽의 빈 잔을 채운 북리준이 자신의 잔을 이벽의 잔에 부딪쳤다.
”단주님 말씀은 조만간 그 두 공자가 제게 제안을 해 올 거라는 말씀 이십니까?“
”그래,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너를 회유 할 거다. 지금 현재 자신들의 편을 들고 있는 다른 대주들을 합한 것 보다 네 영향력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조언을.....“
”휴우, 현재 상황으로는 삼공자와 힘을 합친 대공자가 유리하다고 생각된다. 만일 선택을 하라면 대공자 쪽이라고 판단된다.“
”둘 다 선택 하지 않으면요?“
북리준의 물음에 이벽이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겠다. 둘 다 네게 관심을 꺼버리면 최상인데 만일 네 선택을 고깝게 생각 하는 놈이 생기면 네 놈이 많이 괴로울거다.“
북리준이 이벽의 대답을 들으며 묵묵히 술잔을 비워갔다.
검단주의 천막을 나서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길목에 기린대주와 주작대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할 말이 있다. 잠시 시간을 내 주어라.“
기린대주 목대관이 무거운 어조로 앞길을 막았다.
”말씀 하시오.“
”자리를.....“
주작대주 막가령의 말을 북리준이 가로막았다.
”여기에서 하시지요. 할 일이....“
”후후,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나?“
모래주머니 세 개씩을 양 팔과 발목에 찬 채 연무장에 검을 휘두르는 청룡대주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다.
”어떻게 말리겠어? 여기에서 말하지.“
막가령의 말에 목대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공자가 보자고 하신다.“
다짜고짜 말을 꺼내는 목대관을 북리준이 눈을 들어 쳐다 보았다.
”조만간 남해검문의 문주가 되실 분이다. 네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목대주의 말이 맞아. 지금 줄을 잘 서면 네 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질 거야.“
막대주가 싱긋 웃으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부추겼다.
”관심없소. 난 이 곳에서 왜구놈들을 지우는 일만 할 것이오.“
”알아! 하지만 말이야. 이왕이면 남해검문으로 옮기는 것이 자네한테도 훨씬 좋은 일일 것이네.“
목대주의 말에 막대주가 맞장구를 쳤다.
”대공자 편에 서서 우리 같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어. 같이 하자!“
”마음만 받겠소. 그럼 이만....“
북리준이 성큼 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의 처소로 향하자 주작대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의 천막 바로 앞에 서성이고 있던 백호대주 강이환과 현무대주 가겸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왔는가?“
강대주가 웃는 낯으로 북리준을 맞이했다.
”내가 이야기 하지.“
스산한 표정의 가대주가 북리준의 앞에 섰다.
”이공자님이 네 놈에게 관심이 있으시단다. 황송한 마음으로 준비 하거라.“
평소에 검단주의 총애를 받는 북리준이 고까웠던 가겸이 삐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관심없소! 피곤 하니 이만....“
”이런 개새끼가...“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자신의 천막 안으로 들어서는 북리준의 뒷덜미를 잡아 채려는 가겸의 손을 막아선 강대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 저 놈 이길 수 있어?“
자신의 천막 안으로 사라져 버린 청룡대주를 가리켰다.
”큼, 크흠! 사람이 말을 하는데 저 따위로....“
”놔두자고. 우리는 이공자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그 뿐이야.“
천막 안에 들어서 왕일과 하승진이 씨익 웃음을 지으며 북리준을 맞이했다.
”아주 난리가 났네.“
”우리 대주가 워낙 잘났어야지....“
청룡대의 두 부대주가 농을 던지며 서로 술잔을 부딪쳤다.
”나가야지.“
천막 구석에 걸린 모래 주머니를 주섬 주섬 양팔과 다리에 두르는 북리준을 보며 왕일이 혀를 찼다.
”하루 좀 쉬면 안되나?“
”형님! 들을 놈에게 이야기 하쇼. 자, 우리도 준비 하자구요.“
승진이 잔을 비우고는 자신의 모래 주머니를 챙기기 시작했다.
”에휴, 하루라도 이렇게 술잔을 더 기울이려면 나도 훈련 해야지.“
왕일도 잔을 비우고는 자신의 모래 주머니를 차기 시작했다.
”헉헉헉! 저, 정말 네 놈은 줄 안 설꺼냐?“
연무장을 돌며 숨이 턱에 차 오른 왕일이 앞에서 묵묵히 뜀을 뛰는 북리준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 쳤다.
”내 관심 밖의 일이오.“
”훅훅, 형님! 저 놈의 머리통엔 오직 왜구 뿐이잖소, 후욱 훅....“
”으이구, 언제까지 왜구놈 새끼들하고 각다귀 싸움질을 할려구? 줄만 잘 서면 남해검문에 들어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잖아?“
대답 없이 연무장을 스무 바퀴 돈 북리준이 온 몸에 기를 일주천 한 후 검을 빼 들었다.
”소 귀에 경을 읽으시우. 자, 우리도 검을 휘두룹시다.“
검을 뽑아든 북리준의 전신에 해천단공을 이용한 기가 힘차게 돌기 시작했다.
삼재검법으로 시작해서 남해검법인 남해일파, 남해파랑, 남해회류가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느리지만 정확하게 북리준의 검에서 피어 올랐다.
저 만치 옆에선 하승진과 왕일도 각자의 검으로 북리준과 같이 검을 놀리기 시작했다.
‘삼십년 정도 인가?’
매일 같이 오 년간 운기한 해천단공으로 전신 세맥에 녹아있는 기운을 녹여 단전에 쌓은 양을 얼추 가늠해 보았다.
북리준의 나이 스물에 삼십년 공력이면 어릴 때부터 벌모세수를 받고 영양을 복용한 대문파의 촉망받는 후기지수의 그것을 상회하는 양이었다.
어느새 공력을 피워올린 북리준의 검에 한 겨울에 서리가 내리듯 검기가 내려 앉았다.
”저거 검기죠?“
”맞는 것 같다. 검단주님의 검에서 비슷한 것을 본 것 같다.“
”저 놈은 도대체 뭘 처 먹었길래 저런 괴물같은 검기를 피워내죠?“
승진이 폭포수 같은 땀을 쏟으며 검을 내렸다.
”너랑 나랑 똑같이 처 먹었잖아.
왕일이 부러운 눈으로 검기가 아롱거리는 북리준의 검을 쳐다 보았다.
“형님! 우린 조금 쉬었다 합시다.”
“그려, 저 놈 쫓아 가다 우리는 과로사 한다.”
검을 바닥에 꽂아 놓은 채 검무를 추는 북리준에 시선을 던진 채 승진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형님! 우리도 줄을 서야 되는 거 아니유?”
“내 말이.... 대주가 나서야지 우리가 나선다고 저 쪽에서 ‘어서 옵셔’ 하겠냐?”
“하긴요....”
< 9. 선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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