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함정 >
“거절?”
“죄송합니다. 그 골통이 왜구 죽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남해검문 내 대공자의 거처에 기린대주 목대관이 고개를 숙였다.
나이는 삼십대 중후반 정도 되었음직한 날카로운 예기가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목철군 대공자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목대주의 말대로 그 놈의 관심은 오직 왜구를 지우는 것 뿐입니다.”
주작대주 막가령이 목대관을 거들었다.
“후후, 아무리 왜구가 철천지 원수라 해도 남해검문 차기 문주의 청을 거절한다?”
낮게 깔리는 음성에 기분이 상한 것을 느낀 목대관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 놈에게 접근한 이공자의 청도 거절 당했다고 합니다.”
“죽고 싶나, 목대관?”
조용한 목소리로 찻잔을 살포시 탁자에 내려 놓은 대공자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죄, 죄송 합니다.”
“감히 네 놈이 쓰레기 같은 놈과 날 동일 선상에 올려 놓아?”
그 때 막가령이 책망하는 눈빛을 던지고는 붉디 붉은 입술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목대주가 실수 했네요. 노여움을 푸시지요.”
“이번만 봐주지. 썩 꺼져라.”
“감사합니다!”
목대관이 황급히 방을 나서며 문을 닫자 막가령이 사뿐한 걸음으로 대공자에게 다가갔다.
“너무 예민하신 것 같군요. 제가 긴장을 조금 풀어 드려도 될는지.....”
천천히 윗옷을 벗어 던지는 주작대주의 모습에 무심한 눈빛을 던지던 대공자가 중얼거렸다.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남도 줄 수 없지.....”
백호대주와 현무대주가 시립해 있는 앞에 신경질적으로 생긴 하관에 희디흰 피부가 인상적인 사내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배짱이 두둑한 거야, 눈치가 없는 거야?”
“후자가 아니겠습니까? 어린 놈의 새끼가 눈치가 없는 거지요.”
현무대주 가겸이 예의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손 봐야 할까요?”
이공자의 잔인한 성정을 아는 백호대주가 넌지시 물어왔다.
“놔둬라. 그 욕심 많은 인간이 거절 당하고 가만히 있을 인물이 아니다. 그 놈, 조만간 세상에서 없어질 놈이니 신경 꺼라!”
자신의 형이며 남해검문의 문주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암투를 벌이는 목철군을 떠올리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죽을 새끼는 신경 끄고 네 놈 둘은 최대한 많이 우리 편으로 검단의 사람들을 끌어 오너라. 마지막에는 결국 세 싸움이 될테니까.”
“존명!”
****
생사검 이벽이 오개대의 대주들과 부대주들을 모은 자리에서 말을 이어갔다.
“왜구들이 사흘 후 대대적인 습격을 할 예정이라는 첩보를 입수 했다. 내일 부터는 대를 나누지 말고 일개 대 전체가 움직인다.”
검단주의 굳은 표정을 보며 승진이 왕일에게 속삭였다.
“몸 조심 해야 되겠네요.”
“맞아. 이럴 때 일수록 몸을 사려야지...”
부단주인 섬전검 공철이 각 대주들에게 말린 두루마리 하나씩을 나눠 주었다.
“각 대의 새로운 순찰 경로를 적어 놓았다.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중요 길목에서는 한 번씩 조우 할 수 있는 동선이다.
도저히 감당 못할 상황이 되면 그 지도를 숙지하여 표시된 지점까지 후퇴해라.”
북리준이 자신의 청룡대가 이동하며 순찰 해야 할 동선을 확인 한 후 왕일에게 넘겼다.
“어, 왜 우리만 이렇게 동떨어졌담?”
지도를 확인한 왕일이 다른 네 개대의 조우 지점 보다 훨씬 동떨어져 있는 청룡대의 이동 경로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여지껏 우리가 돌던 곳들하고 너무 다르네.”
승진이 고개를 쭉 빼고 왕일이 들여다 보던 지도에 얼굴을 박았다.
“질문있나?”
검단주의 말에 북리준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청룡대주, 말하라!”
북리준이 왕일이 건네준 지도를 넘겨 받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까지 저희가 오년간 순찰해 온 지역과 완전히 다른 지역을 배정 받았습니다.
대대적인 왜구의 습격이 예상 된다면 서로가 익숙한 지형을 배정 받아야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북리준의 말에 왕일과 승진이 고개를 주억 거렸다.
“청룡대주의 말이 맞다. 하지만 남해검문에서 한 지역만 오래 맡아 순찰 지역과 너무 밀착 되는 것과 왜구 출몰 빈도가 다른 데 어느 대에만 이득을 주는 것을 우려한 모양이다.
이 후로는 지금 배부한 지도의 동선이 각 대의 순찰 지역이 된다.”
검단주의 말에 다른 대주들과 부대주들이 이해가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질문 없으면 내일부터 각 대의 관할 지역을 순찰하라.”
검단주의 축객령에 천막을 나선 북리준과 왕일, 승진을 향해 누군가가 다가왔다.
“청룡대주! 네가 맡은 지역은 왜구가 출몰 하는 횟수가 적고 속해 있는 마을들이 빈촌이 아니어서 짭짤할 것이다.”
평소 기린대에서 맡은 관할 지역의 대부분을 청룡대에서 할당 받은 것에 대해 생색을 내었다.
“원하는 바가 아니오.”
북리준의 무표정한 얼굴에 목대관이 비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어련하실까? 하나라도 더 왜구 놈들의 목을 따야 되는데 네 놈에게는 불만스럽겠지....”
“평소에 청룡대가 제일 많이 왜구들과 전투를 벌였으니까 검문에서 배려를 해 주었나 보군.”
현무대주 가겸의 비아냥거림에 승진이 입술을 툭 내밀었다.
“그렇게 억울 하시면 바꿔 달라고 하시던가...”
“그럴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다. 혹시 아느냐? 그 쪽이 네 놈들 덕분에 지옥으로 변할지...클클클.”
가겸의 말에 왕일이 톡 하니 쏘아 붙였다.
“말씀이 지나치네. 악담을 해도 유분수지.... 현무대주도 몸 조심 하슈. 그 쪽 지역도 만만해 보이지 않더이다.”
“아무렴 너희만 하겠느냐?”
북리준의 천막에 돌아온 왕일이 잔에 술을 채우고는 벌컥 거렸다.
“개새끼들, 우리가 제일 많이 왜구들과 부딪쳐서 벌은 생떼 같은 돈이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지. 아주 저주를 해라!”
“형님 말대로 아주 대놓고 죽으라고 하더군요. 나쁜 새끼들....”
북리준이 탁자에 받아온 지도를 펴놓고 생각에 잠겨 있자 승진이 잔에 술을 채우고는 탁자에 다가갔다.
“한잔해. 악담을 귀구멍에서 씻어 내는데는 술 만한 것이 없지.”
“여기!”
북리준이 지도 한 켠을 가리키자 왕일과 승진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청룡대의 관할 지역 중 가장 서쪽에 치우친 해룡촌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어, 저기 사람 안 사는데?”
왕일의 말에 승진이 놀라서 반문을 했다.
“사람이 안 살아요? 그런데 왜 우리 지역에 넣어 놓았대?”
“이년 전 왜구놈들이 개박살을 내 놓은 후 어민들이 다 떠나서 폐촌이 된 곳 인데.... 검문에서 제대로 조사해서 만든 것이 아니네.”
북리준이 지도를 들고 왕일과 승진에게 눈길을 주었다.
“가서 확인해 보고 오겠다. 쉬고 있어.”
부단주인 섬전검 공철에게 해룡촌에 대해 문의를 하니 자신도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대로 나도 거기 사람이 안 사는 곳으로 알고 있어서 검문에 문의를 해 보니 최근에 다섯 호 정도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다고 하더라.
검문에서 확실하다고 하니 나도 그런 줄 알고 지도를 건넨 거고....”
****
팔 십 여명의 청룡대 대원들과 함께 관할 지역을 순찰 하던 왕일이 북리준의 옆에 섰다.
“대주, 해룡촌은 건너 뛰지? 너무 멀고 왜구놈들도 먹을 것도 없는 그 곳을 덮치겠어?”
“형님 말이 맞아. 그만 돌아가자!”
승진도 왕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은근한 어조로 거들었다.
“우리 관할 구역이야. 가야지!”
“으이구, 정말 벽창호가 따로 없다니까.... 오늘은 왠지 빨리 돌아 가고 싶은데.”
“우리 대주를 어떻게 이겨? 저 성격을 아니까 저런 곳을 우리한테 붙인거지.”
왕일과 승진의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앞서 나가는 북리준의 뒤를 청룡대 무인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해룡촌 초입에 들어선 왕일이 큰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촌장! 우리 왔수.”
왕일이 익숙한 걸음으로 마을 안으로 들어서 자 그 뒤를 청룡대 무인들이 어슬렁 거리는 걸음으로 따라 들어 왔다.
“촌장, 나 왔다니까?”
왕일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해룡촌을 울리는 가운데 북리준이 조용히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왜?”
승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덩달아 검을 뽑아 들었다.
“혈향....”
북리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일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썅.... 다 죽었어!”
“전원 전투 준비!”
북리준의 나직한 말에 청룡대원들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왕일이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 보고 있는 마을 가운데 공터에 도착하니 다섯 호 서른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난도질 된 채 쌓여 있었다.
“왜 죽이고 불을 안 질렀지? 약탈도 안 한 거 같은데....?”
승진이 마을을 쓱 훑어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때 마을 곳곳에서 왜구들이 왜도를 뽑아 들고 꾸역 꾸역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함정이다.”
족히 이백명은 됨직한 왜구들이 청룡대를 에워싸는 중에 불안한 눈으로 청룡대원들이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때 두 명의 왜인이 태사의를 하나 들고 마을 주민들이 떼몰살하여 쌓여 있는 공터 앞에 내려 놓았다.
이어 정통 왜국 사무라이 복장과 투구를 쓴 한 사내가 커다란 장도와 단도를 허리에 비껴 찬 채 태사의에 앉았다.
“이거 엿 된 거 같은데?”
왕일이 북리준의 뒤에서 자신들을 에워 싼 왜구들에게 눈길을 던졌다.
“네 놈이 검귀인가?”
유창한 중원어로 장검을 땅에 꽂아 놓고 검병에 양 손을 얹은 채 게슴츠레한 눈으로 묻는 사내를 향해 북리준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청룡대주 북리준이라 한다. 넌 누구냐?”
“하아, 드디어 네 놈을 만났구나. 네 놈의 손에 이승을 떠난 동료들의 원혼을 오늘 달랠 수 있겠구나.”
온 몸에서 살을 에일듯한 예기를 발산하는 사내를 보고 승진이 왕일을 바라 보았다.
“저 놈, 왜구들의 수장인 마사히로 같은데요?”
“좇됐다....”
“우리가 오늘 이 곳에 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북리준의 물음에 마사히로가 웃음을 지었다.
“죽기 전에 궁금한 게 많으면 눈을 못 감을 거야. 네 놈을 넘겨 주는 조건으로 한 달 간 약탈을 중단 하기로 했다.”
“누가 사주 했나?”
마사히로의 옆에 선 사내가 맑은 청주를 잔에 그득히 따라 건네자 단숨에 들이킨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남해검문의 대공자인가 하는 작자가 네 놈을 없애 달라고 여러 정보를 주더군. 크크크, 참 더러운 놈들이지 않나?”
그 때 왕일이 품에서 신호탄을 꺼내어 쏘아 올리자 ‘ 피이이유융’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터져 붉은 안개를 뿜어 내었다.
“조금만 있으면 해남검단의 무인들이 득달같이 들이 닥칠 테니 목을 씻고 기다려라.”
왕일이 득의만만한 웃음 지으며 허리에 손을 올리자 마사히로가 실소를 터뜨렸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남해검문에서 저 놈 목을 쳐 주는 조건으로 병력을 물려 주기로 했지.....”
“내 한 목숨을 취하기 위해 왜구들과 결탁하고 청룡대 전체를 버린 건가?”
북리준이 우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만큼 네 놈이 우리나 대공자 라는 개새끼 목에 가시 같았나 보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마사히로의 전신에서 살기가 무럭 무럭 피어 올랐다.
“쐐기진의 형태로 뚫고 나간다. 내가 앞장 서겠다. 낙오되면 죽는다.”
< 10. 함정 > 끝
ⓒ 편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