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출도 >
쌍괴동을 나와 바닷물 속에 신형을 밀어 넣고 잠수를 시작했다.
금아가 옆에서 아쉬운 표정으로 연신 힐끔거리는 모습에 북리준이 금아의 등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광폭한 광룡소의 회오리가 요동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절대 남들이 이 곳에 들어 올 수가 없겠구나. 나도 금아가 아니었으면 여기 올 일이 없었겠지.'
흉폭한 광룡소의 회오리가 치는 지역을 벗어나 인적이 없는 해변으로 올라서는 북리준의 뒤를 금아가 슬픈 표정으로 뒤따랐다.
"이만 돌아가. 최대한 빨리 올게."
금아가 슬픈 표정으로 북리준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약속할게. 할 일을 다 마치면 너와 함께 할 거야."
"꾸오오오오"
자신도 그러하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금아가 멀어져 가는 북리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 보았다.
"그나저나 옷을 구해야 할텐데...."
수어피로 하체만 가린 채 두 팔에 수갑을 차고검과 허리에 보퉁이를 맨 기괴한 모습에 스스로 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전낭이 무사해서 다행이네...."
왕일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줘 고맙다며 선물한 전낭을 보자 죽었을지 모를 왕일과 승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다려! 곧 마사히로와 대공자라는 개새끼들을 보내 줄게."
자신이 오년간 수련을 해온 쌍괴동을 품은 절벽을 일별한 후 한참을 걸어 자그마한 어촌 마을에 닿았다.
"옷을 구할 수 있을까요? 돈은 드리겠습니다."
어촌 마을에서 헐렁한 삼베 옷을 동전 오십문에 구한 북리준이 자신이 나온 해변이 광동성 동쪽에 위치했다는 것을 알았다.
"일단 성 내로 들어가 오년 동안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파악을 해 봐야 겠구나."
지괴 냉가려의 유진 중 익힌 일월비천신보가 북리준의 다리에서 펼쳐졌다.
일직선으로 빛살 같은 속도로 멀어져 가는 북리준의 신형을 막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달님만이 바라 보고 있었다.
****
"어서옵셔! 저희 광동제일객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요."
열 두어살 되어 보이는 점소이가 객잔으로 들어서는 북리준을 맞이했다.
"식사만 하실겁니까? 주무시고 가실 겁니까?"
"삼일 정도 묵을 예정 이다. 얼마냐?"
"은자 한냥이면 숙식이 다 해결 됩니다요."
북리준이 전낭에서 하나 남은 은자 한냥을 꺼내 건네 주었다.
"지금 바로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그래, 오리구이 한 마리와 화주 한병 부탁 하마."
오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리웠던 북리준이 점소이가 내준 찻잔을 잡으며 주위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난리 난거네. 또 전쟁이 터진 거야?"
"그렇다니까! 청나라에 삼번인가 뭐시기인가 세 왕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거야."
농사를 짓는 듯 흙냄새가 자욱한 수더분하게 생긴 장한 셋이 화주잔을 기울이며 목청을 높였다.
"아이고, 명나라가 망하고 이제 겨우 살만 한가 싶었는데 또 전쟁이야?"
그 때 점소이가 오리구이 한 마리와 화주병을 탁자에 내려 놓았다.
"말 좀 묻자!"
"말씀 하시지요."
"이 근처에서 제일 큰 전장이 어디 있느냐?"
북리준의 말에 점소이가 숨도 안 쉬고 바로 대답을 했다.
"중원 무림 삼대 전장 중 하나인 금구전장의 광동성 지부가 여기서 아주 가깝습니다요."
"금구전장이라...."
문득 금아가 생각나 웃음을 짓는 북리준의 얼굴을 보고 점소이가 손사래를 쳤다.
"손님! 어디 가서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아가씨들 잠 못 자요."
선이 굵은 남자답게 생긴 북리준의 얼굴을 반쯤 가린 긴 머리 사이로 보이는 미소를 보며 점소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녀석...."
전낭에 있는 동전을 꺼내 너스레를 떠는 점소이에게 건네고는 금구전장의 위치를 물었다.
****
날이 밝아 객잔을 나선 북리준이 점소이가 알려준 금구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다가 오는 허름한 삼베 옷에 검을 등에 맨 모습이 영락없는 낭인의 그것이어서 금구전장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이 앉은 채로 북리준을 맞이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귀금속을 좀 맡기려고 합니다."
"어떤....?"
"야명주입니다."
'어디서 이상한 돌 하나 주웠나 보군. 야명주가 얼마나 비싼 건데....'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쫓아내려던 점원의 머리에 지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 하지 마라. 항상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우리 금구전장이 중원 삼대 전장 중 가장 친절한 전장이라는 소문에 먹칠 하는 놈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급히 고개를 흔든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귀금속 쪽은 저를 따라 오십시오. 감정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초라한 행색에도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는 직원의 뒤를 따라 한 전각 안에 들어섰다.
전각 안 좌우에 무공깨나 쓸 것 같은 무인 두 명이 서 있고 정면 고급스런 탁자에 염소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북리준을 맞이했다.
"금구전장에 오심을 환영 합니다. 무엇을 감정해 드릴까요?"
"야명주입니다."
풍기는 분위기에 비해 허름한 옷차림의 사내의 입에서 나온 야명주란 말에 얼핏 실망감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일단 저를 따라 오시지요!"
염소수염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매서운 인상의 무인 두 명이 서 있는 사방 일장이 조금 넘는 자그마한 방으로 안내를 했다.
"저는 이 곳에서 보석 감정을 하고 있는 감정사입니다. 손님들이 하대야라고 부르니 그리 불러 주시면 될 듯 합니다."
방 중앙 탁자에 자리를 잡은 하대야가 자신의 반대편에 자리한 북리준을 바라보았다.
"감정 해야 할 귀금속을 여기 올려 주시지요!"
하대야가 최고급 융단을 깔아 놓은 고급스런 나무로 만든 바구니를 내밀자 북리준이 품 속에 하나 넣어온 야명주를 올려 놓았다.
"허억"
보석 감정 사십년 동안 한번도 보지 못한 상품의 야명주를 본 순간 하대야가 숨을 멈췄다.
"오오! 시간이 좀 걸릴 듯 합니다."
하대야가 북리준이 내놓은 야명주를 고급스런 융단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돋보기를 대고 세심하게 이리 저리 뒤집어 보았다.
"혹시 이런 물건이 더 있으신지....?"
"총 열 개가 있소이다."
“헉, 열 개...... 잠시만!”
하대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달린 줄을 잡아 당기자 하대야와 같은 옷차림의 인물 네 명이 문 밖에 나타났다.
“천자급 손님이시다. 방을 옮기자꾸나.”
밖에 무공이 꽤나 높아 보이는 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화려하고 넓디 넓은 방으로 들어섰다.
“귀빈이 보시는 앞에서 감정을 할 예정입니다. 술이나 음식을 원하시면 무한 공급해 드릴 것입니다. 감정이 끝날 때 까지 즐기시기 바랍니다.”
방 한가운데 커다란 탁자에 하대야를 포함한 감정사 다섯이 독고준이 건넨 야명주 열알을 분배 하여 감정에 들어 가고 탁자가 훤히 보이는 왼편 탁자에 미주가효가 금새 차려 졌다.
“편하게 드시면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평생 한번도 보지 못한 음식과 마셔 보지 못한 고급술을 보며 북리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돈이 많다는 것은 좋은 것이구나....‘
자신이 누려본 호사 중에 제일이 왕일과 승진과 함께한 오리구이와 화주였음을 상기한 북리준이 두 사람을 추모하며 잔을 채웠다.
약 한 시진 정도 시간이 흘러 다섯 감정사가 모여 수군 거리더니 하대야가 술잔을 든 독고준에게 다가왔다.
“다 끝났습니다. 아주 상등급의 야명주들로 판명이 났습니다. 금자 십만냥으로 환산 됩니다.”
“전표하고 은자, 금자를 섞어서 환전해 주시오”
“전부 다 말입니까?”
하대야의 물음에 북리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무 큰 금액이라 들고 다니시기 어려우시다면 일부 예치해 놓으시는 것이 어떨지요? 저희 금구전장의 분점이 각 성에 다섯 개 이상 있사오니 언제든지 찾으실 수 있습니다.”
“만냥은 환전해 주고 나머지는 예치 하겠소.”
“감사합니다! 바로 준비 하겠습니다.”
일을 마치고 금구전장을 나서는 북리준을 예의 주시하는 눈길이 있었다.
“금구전장에 심어 놓은 감정사 놈이 재신이 떴다고 전해 왔습니다.”
광동성 내 흑도 방파 중 수위를 달리는 흑천각의 각주인 냉혈추혼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보고 하는 수하를 바라 보았다.
“재신? 얼마나 되는데?”
“금자로 십만냥 이라고 합니다.”
“호오, 금자로 십만냥.... 몇 명인데?”
“남자 하나 라고 합니다.”
하나 라는 말에 냉혈추혼이 냉큼 태사의에서 신형을 일으켰다.
“흑천대주 하고 둘이 갔다오마. 오랜만에 몸이나 풀러 가야겠다.”
북리준이 하대야의 극진한 대접을 뒤로 하고 전장을 나서 포목점에 들러 자신의 마음에 드는 흑색무복과 여러 가지 잡화를 구입했다.
“어디서 정보를 구할 수 있을까?”
북리준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며 걷는 중에 호젓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어이, 거기 잠시만 보고 가자구.”
흑색 무복에 빙글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매달고 있는 한 사내와 그 옆에 묵묵히 서 있는 무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날 아시오?”
북리준이 혹시 남해검문에서 자신을 알아 보는 자가 있는지 긴장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알지, 나를 기쁘게 해 줄 재신!”
묵묵히 서 있던 흑천대주가 자신의 도를 뽑아 들고 온 몸에서 살기를 뿜어 내었다.
“네 놈이 가지고 있는 전표, 현금은 당장 필요하고 잠시 후에 금구전장에 들러 나머지 구만냥도 찾아와야지.”
예의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냉혈추혼이 긴장한 채 서 있는 북리준을 바라 보았다.
“너무 겁먹지 마라. 다 내 놓으면 목숨은 살려줄게.”
“내 돈을 노리고 온 놈이구나....”
해남검단이나 남해검문의 사람이 아닌 것에 안도한 북리준이 긴장을 풀었다.
“어디에서 왔느냐?”
“궁금해? 그거 알면 널 죽여야 되는데....?
광동성 제일흑도방파인 흑천각에서 왔고 난 거기 각주고 별호는 냉혈추혼님 이시니라.”
“그렇군.”
등 뒤에 검을 찬 채 양팔을 늘어뜨리고 웃고 있는 북리준을 보며 냉혈추혼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팔 하나만 잘라라!”
각주의 명에 추혼대주가 자신의 도를 들고 땅을 박찼다.
“꼭 말로 하면 안 듣고 매를 벌어요...”
추혼대주의 도에 사내의 팔이 떨어져 내리고 후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있는 돈을 다 내어 놓는 상상을 하던 냉혈추혼의 귀에 기이한 소성이 들려왔다.
“씨이이이이잉 쌔애애애애앵,”
자신의 앞에 선 젊은 놈이 양 손을 투둑 털어 내자 괴이한 소성과 함께 희고 검은 선 두 개가 허공을 가르기 시작 했다.
“까앙 캉 까앙 캉”
사내 놈의 팔을 잘라 내기 위해 뻗어낸 도에 두 번 무엇인가가 부딪치더니 어느새 손잡이만 남은 도를 들고 흑천대주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
북리준의 양 팔이 다시 기이한 곡선을 그리자 손잡이만 남은 도를 들고 있던 흑천대주의 목이 둥실 공중으로 떠올랐다.
“뭐, 뭐야...?"
도대체 뭐가 흑천대주의 도를 도파만 남겼는지 뭐가 목을 잘라내었는지 보지 못한 냉혈추혼이 급히 땅을 박차 신형을 뽑아 올렸다.
'재, 재신이 아니고 사신이었어....'
자신과 검을 맞대어 백초 이상을 견디는 흑천대주가 한 수에 목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줄행랑을 치려는 찰나 두 다리에 힘이 쑤욱 빠졌다.
"크으으윽"
무엇인가 예리한 것이 두 발목을 베인 냉혈추혼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 앉았다.
"진지 하게 이야기 좀 해 보자고."
사내가 희디흰 이를 드러내며 자신의 앞으로 다가왔다.
< 15. 출도 > 끝
ⓒ 편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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