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천풍루 >
"뭐든지 할테니 목숨만....."
두 발목의 힘줄이 잘려 설 수가 없게 된 냉혈추혼이 비굴한 목소리로 엎드렸다.
"내가 힘이 없었으면 입장이 바뀌었겠지? 그래, 마침 내가 필요한 것이 있으니 네 놈이 도움이 된다면 살려주마."
"대협, 마, 말씀하시지요."
흑천대주의 잘린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와 자신의 발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만나 내를 이루는 모습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를 사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지?"
"정보라 하심은....?"
"말 그대로 정보, 내가 알고 싶은 것!"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냉혈추혼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처, 천풍루에 가시면 됩니다."
"천풍루?"
냉혈추혼이 양 발목에서 빠져 나가는 피에 정신이 혼미해 지는 것을 느끼며 다급히 말을 이어갔다.
"무림, 황실, 일반인 통틀어 모든 정보를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천풍루입니다. 금액만 맞으면 어떤 정보도 다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대협이 아까 나오셨던 금구전장 지부에서 가깝습니다."
냉혈추혼의 필사적인 설명을 들은 북리준이 무심히 신형을 일으켰다.
"도움이 되었으니 목숨은 거두지 않으마."
신형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는 북리준을 향해 냉혈추혼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협, 사람을 불러 주시던가 의원에게 데려가 주십시오..."
"내 손으로 네 놈의 목숨을 거두지 않겠다고 했으니 더 이상 내게 어떤 요구도 하지 마라."
양 발목의 인대가 끊겨 자력으로 일어설 수 없는 냉혈추혼이 이를 악물고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다음에 내 눈에 띈다면 오늘의 요행을 바라지 말거라."
****
북리준이 다시 금구전장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고 자신이 의뢰해야 할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냉혈추혼이 가르쳐 준 곳으로 가 보니 고즈넉한 분위기의 장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정문 앞에 꾸벅 거리며 졸던 위사 하나가 북리준이 다가 가자 한쪽 눈을 떴다.
"무슨 일로 왔소?"
"정보를 사러 왔네."
검은색 무복에 범상치 않은 기를 전신에서 흘려 내는 북리준을 힐끗 보고는 억지로 신형을 일으켰다.
"따라오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잘 꾸며진 정원 사이 소로를 따라 장원 앞까지 안내를 한 위사가 되돌아 갔다.
"어서 오시지요."
깨끗한 시비 차림의 미인 한 명이 북리준을 맞이했다.
"따르시지요."
시비의 안내에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서 구불 구불한 미로와 같은 길을 거쳐 한 켠에 정갈한 건물 앞에 당도했다.
"드시지요!"
북리준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니 좌우 벽면에 아름다운 벽화와 당, 명대의 도자기 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정면에 대나무로 만든 발이 쳐져 있었고 그 안에 사람의 형태가 눈에 들어 왔다.
"좌정하시지요!"
대나무 발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놓인 의자에 북리준이 자리를 잡자 청아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저는 이 곳 천풍루 광동지부를 맡고 있답니다. 귀인을 뵈어 반갑습니다."
북리준이 주위를 쓱 한번 일별 하고는 발 안에 있는 여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처음 오는 사람도 지부장이 맞이 하는 것이 이 곳 규칙인가 보군."
"호호호,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내 앞에 당신이 있는 거지?"
발 안의 호리호리한 체형의 인물이 예의 맑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세 시진 전에 금구전장에서 극상품의 야명주 열알을 금자 십만냥에 환전을 하시고 두 시진 전 흑도방파인 흑천각주와 대주가 따라 붙었는데 이리 멀쩡 하신 분이니 제 관심을 조금 끌었다고 할까요?
아, 혹시 궁금하실까봐 말씀 드리는데 냉혈추혼은 기어서 의원으로 가다 평소 원한을 맺은 자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천풍루의 정보 수집 능력이 명불허전이라고 하더니 소문이 사실이군."
"일단 차 한잔 올리겠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시비가 차 주전자와 찻잔을 북리준의 앞에 놓고는 물러났다.
"어떤 정보를 원하시는지요?"
천천히 내준 차를 들어 마시던 북리준이 잔을 내려놓았다.
"첫번째, 남해검문의 현 상황과 문주에 대한 정보. 두 번째, 마사히로라는 사무라이 출신의 왜인에 대한 정보. 이 놈은 남해 쪽에서 왜구들의 수장질을 하고 있을 것이오."
"또 있나요?"
발 안에 예의 영롱한 목소리가 재차 질문을 했다.
"마지막으로 현재 나라의 상황에 대해 알고싶소. 들리는 소문에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정보를 주시오."
북리준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다 이야기 한 후 다시 찻잔을 잡아갔다.
"총 금자 다섯 냥입니다. 내일 같은 시간에 이 곳으로 와 주시면 원하시는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선불이오?"
"호호호, 후불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북리준이 발 안의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선풍루는 지부장을 미모 순으로 뽑는가 보군. 내일 봅시다."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전각을 벗어난 북리준의 뒷모습을 발 안에서 응시하던 여인의 입이 열렸다.
"저 자에 대해 샅샅이 조사해서 보고해요."
"존명!"
다음 날 북리준이 다시 천풍루 광동지부를 방문했다.
"이것이오?"
자신이 앉은 의자 앞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책자 세 권을 본 북리준이 발 안의 지부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읽어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의뢰대금을 탁자 위에 놓아 두시면 됩니다."
"마음에 안 든다면?"
"어떤 점이 부족한지 말씀해 주시면 보충해서 다시 전해드리지요. 단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요...."
북리준이 겉에 아무것도 씌여있지 않은 맨 왼쪽 책자를 집어 들었다.
책을 여니 맨 첫 장에 ’남해검문‘ 이라는 글이 일필휘지의 웅혼한 글씨체로 씌여 있었다.
약 한 식경 정도에 걸쳐 이십여장으로 구성된 첫 번째 책자를 다 읽은 북리준이 책을 덮었다.
"간략하게 설명 드리자면 현 남해검문은 남해검문 개파 이래 최강의 힘을 지녔다고 볼 수 있어요. 사년 전 자신의 동생인 목철상의 목을 베고 현 문주인 목철군이 문주가 되었어요.
목철군은 검문의 개파 조사 이래 대성하지 못했던 남해칠십이파검을 대성 직전 까지 연성 했고 약 이백년전 남해검문에서 갈라져 나갔던 금사도와 벽라도를 흡수 통일 하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어요."
지부장의 말을 고요히 경청하던 북리준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문주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흑건질풍대와 백건폭풍대의 무력이 천무맹과 사황련의 웬만한 문파에 버금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만일 목철군 문주가 금사도와 벽라도를 집어 삼킨 다면 하북 지방에서 남해검문의 위상에 도전할 문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북리준이 말없이 두 번째 책을 집어 들어 시선을 고정하자 지부장이 조용히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약 일다경 정도 정독을 하고 책을 내려 놓은 북리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다 인가?"
약 다섯장의 얄팍한 책자의 내용을 다 읽자 지부장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이마가와 마사히로! 이마가와 다이묘(대영주)의 장자로 현 왜국의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반기를 든 정통 무사예요.
오년 전 본토를 떠나 광동, 광서, 남해를 주무대로 움직이는 왜구들을 규합하기 시작 하여 현재 중원 남부 해안을 중심으로 세를 불리고 있어요."
지부장이 다시 한 모금의 차를 삼킨 후 말을 이어갔다.
"이년 전 왜구들을 통합. 스스로 다이묘라 칭한 후 해안가의 어촌들을 약탈하는 것은 기본이고 상선이고 민선이고 자신들의 영역 안에 든 배는 모두 빼앗아 죽이고 바다에 던지는 말 그대로 해적이 되었지요."
"남해라면 남해검문의 영역과 겹치는데 둘이 부딪치고 있나?"
"아니요. 목철군이 문주가 된 이후 남해검문과 마사히로의 왜군과 큰 마찰이 없어요.
청조에서 지원하는 해남검단만이 마사히로의 왜적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목철군과 마사히로의 밀월관계를 아는 북리준의 입장에서 현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해남검단이 왜구와 싸우니까 남해검문은 한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형국이랄까요?
하지만 저희 루에서는 현 남해검문의 문주과 마사히로간의 모종의 협약이 있지 않나 의심하고 있어요."
지부장의 말에 북리준이 고개를 들었다.
"이유는?"
"마사히로의 왜적이 해남검단과는 죽기 살기로 싸우면서 바다 위에서는 남해검문의 배만 안 건드리는 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마지막 두툼한 책자와 이미 읽은 두 권의 책자를 손에 든 북리준이 금자 다섯냥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나머지는 가서 읽겠소."
"잠깐! 첫 거래니까 한 가지 물음에 답을 주시면 반값에 해 드릴께요."
북리준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발 안의 지부장을 바라 보았다.
"당신은 누구죠?"
"이미 파악 하지 않았나? 도천학이라고..."
북리준이 금구전장에 돈을 맡길 때 천괴의 이름을 자신의 가명으로 삼기로 하고 기입했었다.
"도천학이라는 이름으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까요....
언제 어디서 출생했는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가문은 어디인지....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네요."
자신이 죽은 것으로 아는 마사히로와 목철군에게 자신의 생존을 숨기는 것으로 마음을 굳힌 북리준이 웃음을 지었다.
"도천학이라는 이름도 진짜가 아닌 거 같고.... 당신의 본명을 알고 싶군요."
"도천학! 첫 거래 할인은 마음만 받아 두겠소."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전각을 벗어나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지부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풍영! 도천학과 남해검문, 마사히로의 연관점을 찾아. 저 놈의 진정한 정체를 알아야 겠어."
자신의 수신호위 이며 군사인 풍영이 소리 없이 밖으로 사라져갔다.
"도천학인지 뭔지 당신의 가면을 부숴 버리겠어요."
****
광동제일객잔의 숙소에 들어온 북리준이 간단한 요기거리와 화주를 방에 들여 놓고는 마지막 책자를 펼쳤다.
'작금의 청조 상황은 매우 혼란스럽다.'
첫 문장을 읽고 잔에 든 화주를 목 안에 털어 넣고는 다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청초 화중, 화남 지방을 지배하며 청조에 반항하는 남명정권으로부터 화북 지역의 청조를 지키기 위해 설치한 세 개의 번(울타리)이 있었다.
복건의 정남왕, 광동의 평남왕, 산해관의 평서친왕이 그들 이었다.'
다시 한잔의 화주를 입에 털어 놓고 오리구이 한점을 씹으며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세 개의 번의 힘을 빌어 남명정권을 멸하고 청조는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다 삼번 중 가장 세력이 강한 오삼계, 즉 평서친왕의 일파가 병권을 장악하고 재정을 통제하며 관리와 사신을 파견 하는 등 청 조정을 무시 하는 횡포를 일삼았다.'
"지난 번에 들었던 삼번이 이것이었군..."
현 나라의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된 내용을 읊조리듯 계속 읽어내려갔다.
'당금의 황제가 청조에 위협이 될 세 개의 번을 폐하는 칙서를 내렸으나 오삼계와 평남왕 경정충이 이를 거부 하고 광동의 정남왕인 상가휘의 아들 상지신이 반란에 동참하게 되어 화남 지역은 세 개의 번왕이 주축이 되어 반청 복명의 기치를 내걸고 전쟁이 시작 되었으니 이를 삼번의 난이라 칭한다.'
끝까지 천풍루에서 제공한 책자를 다 읽은 북리준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일단 내게 필요한 것은 실전을 통한 경험이다. 실전을 통한 경험을 극대치 까지 끌어 올릴 수 있는 곳은 바로 전장이다.'
천괴의 조언을 받아 들여 실전을 통해 자신의 무를 완성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북리준이 책자의 말미에 적힌 마지막 줄을 상기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청조에서 낭인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고 했지. 일단 현재 익히고 있는 무공을 체화하기 위해 군문에 들어가자.'
화주를 잔에 따라 단숨에 들이킨 북리준이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내 원수인 마사히로와 목철군의 파멸 시키기 위한 내 힘이 너무 부족하다.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걸려도 무방하니 일단 내 세력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 16. 천풍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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