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낭인의 삶을 시작하다. >
다음 날 다시 천풍루의 문을 두드린 북리준의 앞에 예의 지부장이 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어떤 정보를 원하시는지요?"
"말에 가시가 돋아 있네..... 뭐가 잘 안 되나 보군."
"그쪽 때문이지요. 도대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아무런 정보가 없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항상 내어 주는 차 대신 술을 원한 북리준의 요청대로 단촐하지만 정갈한 술상 하나가 앞에 놓였다.
"차차 알아 가면 되지 뭐가 그리 급한지....."
"두고 보세요. 열흘 안에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아 놓을테니까요."
"그러시든지."
북리준이 웃음을 지으면 술잔을 비우고는 발 안에서 씩씩 거리고 있는 지부장을 바라 보았다.
"지금 삼번의 난의 여파로 나라가 뒤숭숭한데 무림은 개입 하지 않는가 보네."
"관무불침! 관과 무림은 바다와 강물 같아 서로 침범치 않는 것이 오래된 불문율이지요.
물론 관과 인연이 있는 무림문파들은 제외하고요."
목이 타는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의 차를 마신 지부장이 다시 말을 이어간다.
"관에서 무림의 힘을 빌리는 방법 중 가장 보편적이고 무리수가 없는 방법이 제가 드린 책자 말미에 적힌 낭인을 고용하는 방법이지요."
젓가락을 들어 맛깔스런 야채볶음을 입에 넣어 씹고는 다시 술을 한잔 들이켰다.
"낭인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
"낭인? 낭인이 뭔지는 알고 하시는 말씀인지요?"
"보수를 받고 의뢰나 전쟁에 참여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 아닌가?"
도천학이라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빙글거리며 입을 열자 얄미운 생각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낭인은 일단 무공이 높지 않고 수입이 변변치 않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돈을 버는 하급 인생을 뜻하는 말이에요. 당신 같이 돈도 있고 무공도 낮지 않은 사람이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군요."
칠흑 같은 긴 머리가 반을 가린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하급인생....."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비우는 사내의 모습에 발 너머 지부장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얄미운 놈이 잘 생기기는 했네....'
북리준이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왜구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밤낮을 잊은 채 무공을 수련하고 해남검단에서 오년간 동거동락한 전우들을 자신 때문에 이 세상에서 지워버린 상념에 가슴 한 켠이 아릿해졌다.
'그 때 대공자나 이공자의 손을 잡았다면 청룡대원들이 그리 허망하게 죽어 나가지는 않았을까.......?'
쓸쓸한 표정으로 말없이 잔을 비우던 북리준의 앞에 어느새 면사를 한 지부장이 자리를 잡았다.
"홀로 마시는 술은 맛이 없지요. 저랑 같이 해요."
진한 후회를 온 몸에서 피어 내는 사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그 앞에 앉은 지부장이 사내의 잔을 채워 주었다.
"어디에 설려고 하는지요? 청조? 삼번?"
"반청복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간을 보지않았으면 해."
혹시 남명과 연관 되어 있는 사람인지 슬쩍 떠 보았으나 단칼에 잘린 지부장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청조에 서서 싸우려면 북경으로 가세요. 그 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거대한 낭인시장이 서요."
"전쟁에 나갈 방법은?"
"지금 삼번의 힘이 너무 강력하여 청조에서 모든 금력을 동원하여 무림의 힘을 빌리려고 노력 중이에요. 이미 관과 연관이 되어 있는 모용세가, 하북팽가, 진주언가, 하후세가 등은 전쟁에 발을 깊숙이 담그고 있지요.
북경에 가서 등록만 하고 바로 전투 지역으로 이동하면 끝이에요. 물론 보수와 대우는 살아 남는 기간에 따라 달라지지요."
말을 마친 지부장이 자신의 잔을 내밀자 북리준이 잔을 채워주었다.
"문제는 낭인들이 가는 곳은 말 그대로 죽음이 난무하는 사지라는 거예요. 조정에서 생각하는 낭인들의 용도는 삼번의 힘을 빼는 칼받이 정도가 다이니까요."
북리준이 채운 잔을 면사를 들어 단숨에 비운 지부장이 다시 잔을 내밀었다.
"충고 하나 해도 되나요?"
"얼마든지."
"낭인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방법, 권하고 싶지 않네요. 돈이 궁한 것도 아닌데 왜 굳이 그런 진흙탕 속으로 들어 가려는지 이해가 안 가는 군요."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지 않나?"
북리준이 술주전자를 들어 마지막 잔을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보료는?"
"그리 중요한 정보를 드린 것도 아닌데 나중에 좋은 인연을 위해 무료로 해드리지요."
"좋은 인연..... 좋군!"
"가기 전에 그 쪽에 대해 알 수 있는 실마리 하나만 주고 가요."
"후후, 철저한 직업의식이군...."
전각을 벗어 나는 사내의 등을 응시하던 광동지부장인 공소혜의 귀에 풍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자에 대해 계속 조사할까요?"
"아니, 놔둬! 지옥에 스스로 걸어 들어 갔으니 살아 돌아 온다면 그때 알아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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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북경이군!"
생전 처음 북경에 와 본 북리준의 눈에 거대한 전각과 수많은 인파, 수시로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청조의 팔기군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표와 금자, 은자를 전부 금구전장 북경 본점에 맡기고 일부러 갈아 입지 않아 낡고 더러워진 무복에 씻지 않은 채로 낭인시장을 찾아 나섰다.
"어이!"
지저분한 흑의무복에 씻지 않아 떡이진 긴 머리로 얼굴의 반을 가린 북리준을 향해 두 명의 낭인이 다가왔다.
"처음 왔나.....어?"
초짜 낭인들을 등쳐 먹고 낭인 시장 근처에서 기생하던 쓰레기 둘이 북리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득한 살기에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처, 처음이 아니시면 살펴 가시지요..."
'어딜 가나 쓰레기들이 있기 마련이지.'
두 낭인을 유형화된 살기로 쫓아낸 북리준이 낭인들이 득시글 거리는 광장 한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광장 북쪽 편에 거대한 천막이 쳐져 있었고 팔기군의 하나인 양람기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이런 쓰레기들을 데리고 전쟁을 하라니...."
양람기 산하에 속한 하후세가의 삼공자인 하후승이 커다란 창을 손에 든 채 무질서하게 모여 있는 낭인들을 쏘아보았다.
"어차피 우리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이 놈들이 번왕들의 수하들 하나라도 데리고 간다면 할 바는 다 하는 거야. 뭘 신경써?"
산같은 덩치에 대도를 등에 찬 하북팽가의 소가주인 팽무강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팔기군 하오기 중 하나인 양람기에 속한 하후세가와 하북팽가, 정람기 휘하에 속한 모용세가, 양홍기 밑에 속한 진주언가가 관과 연관된 대표적인 무림세력 이었다.
"지이이잉“"
천막 옆에 거대한 징이 울리자 삼삼오오 모여 우왕좌왕 하던 낭인들이 천막 앞으로 모여 들었다.
"오늘은 하후세가와 하북팽가인가?"
”그럼 내일이 모용세가겠구만.“
"진주언가는 언제인가?"
"모레겠지...."
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면서 대화하는 내용을 묵묵히 듣던 북리준이 낭인들의 무리에 섞여 천막 앞에 섰다.
"저 새끼들은 어떻대?"
"하후세가 삼공자 새끼는 우리를 개 취급하고 하북팽가의 소가주 놈은 아예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정도?"
"살 확률이 중요하지."
"어딜 가도 비슷하지 뭐!"
약 백 여명이 넘어 보이는 낭인들 저마다가 자신들의 무기인 검, 낭아도, 거치도, 곤, 대부, 창 등을 든 채 천막 앞 약 일장 정도 높이의 대를 바라 보았다.
"모두 주목!"
팔기군 양람기 복장의 장수가 우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 청조의 용병에 지원해 준 여러분들께 감사하오. 반역의 무리인 삼번과의 전쟁 중에 혁혁한 전과를 올린 무인분들은 확실한 대우가 약속 되어 있소."
"혁혁한 전과는.... 개소리지..."
"생존이 중요한 거야. 생존!"
낭인들이 두런거리는 목소리로 눈은 장수에게 고정한 채 투덜거렸다.
"내 오른편에 준비 되어 있는 등록소에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등록하면 바로 대청조의 군대에 편제가 될 것이오."
장수가 가리키는 곳으로 낭인들이 우루루 몰려 가기 시작 하자 대 위에서 내려다 보던 하후승과 팽무강이 무심한 눈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운남 번왕인 오삼계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는군."
"명나라의 명장으로 청나라에 투항했다지만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진짜 군인이라더군.“
”호남이 이미 그 자의 수중에 떨어지고 호북도 시간문제라던데...."
용병으로 등록 하기 위해 긴 줄을 서기 시작한 낭인들을 내려다 보던 하후승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 놈들이 오삼계의 반군을 막기 위해 내일 출정 한다지?"
"세 놈 중 가장 세가 강한 놈한테 가는 것이니 저 놈들도 운이 없는 거지."
"이름?"
"도천학."
"나이?"
"스물다섯."
스물다섯이라는 말에 고개를 처박고 써 내려가던 병사가 슬쩍 고개를 들어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일부터 한 달 동안 살아 남으면 은자 다섯냥이 지급된다. 죽으면 그만이다."
"알겠소!"
"내일 묘시에 이 곳으로 와라. 다음!"
다음이라는 말에 뒤에 서 있던 낭인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볼일 다 봤으면 꺼져!"
톱날 같은 거치도를 어깨에 걸치고 얼굴을 가로지르는 검상이 험상 궃은 낭인이 북리준을 거칠게 밀어내었다.
"뭘 꼬라봐? 뒤질래?"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든 북리준이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겁쟁이 새끼! 저런 새끼는 전쟁터에 가면 땅 파고 숨을 놈이다. 겁쟁이 새끼, 내 이름은 곽규다. 억울하면 한판 붙던가."
저 멀리 멀어져 가는 북리준의 뒷모습을 보며 곽규가 침을 퉤 뱉었다.
"겁쟁이 새끼..."
낭인 용병들을 위한 임시 처소 천막 하나에 들어선 북리준이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낭인이라..... 원하는 만큼의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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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자 어제 등록을 마친 낭인들과 며칠 동안 기다린 낭인들이 다시 광장으로 모여 들었다.
"이 앞에 각자 속한 조를 명기해 놓았다. 반 시진 후에 출발 할테니 각자 속한 조에서 대기 하도록."
양람기 복장의 장수가 우렁거리는 목소리로 할 말을 한 후 지휘대를 내려오자 여기 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씨부럴. 글을 모르는 놈은 전혀 배려를 안하네."
"글을 모르는 게 자랑은 아니잖아... 무식한 새끼들."
"허허, 그래 글자 좀 읽을 줄 아는 유식한 새끼들이 과연 열흘 후에 지금 같이 우리 앞에서 이바구를 털 수 있을지 두고 보자구."
전 날 북리준을 조롱하던 곽규가 짙은 가래침을 뱉으며 으르렁 거렸다.
"야, 너 말이야 새꺄!"
무심하게 붙여 놓은 방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북리준을 불러세웠다.
"내 이름이 곽규인데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읊어봐라."
북리준이 긴 한숨을 내쉬고는 붙여놓은 방에 곽규의 이름을 찾았다.
'같은 조네....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너도 까막눈이지? 병신새끼, 괜히 글을 아는 척 하고 지랄이야..."
마음을 굳힌 북리준이 두 눈을 부릅뜨고 온갖 허세를 부리는 곽규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야? 한판 뜨자고?
한껏 내려 앉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 오는 북리준을 향해 자신의 어깨에 걸친 거치도를 손에 감아쥔 곽규의 두 다리가 보이지 않게 후둘거리기 시작했다.
< 17. 낭인의 삶을 시작하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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