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우리는 팔조야! >
"곽규라고 했나?"
북리준이 얼음장 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곽규의 앞에 섰다.
"그, 그래! 하, 한판 뜰까?"
후둘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고는 자신의 거치도로 북리준을 겨누었다.
"그 힘, 전장에 가서 써라. 우리는 팔조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쏘아 보낸 진득한 살기에 곽규가 식은땀을 흘렸다.
"파, 팔조... 알았다. 이번 마, 만은 봐 주마."
"이봐, 왜 그리 식은땀을 흘려?"
옆에 서 있던 동료가 땀범벅이 된 곽규를 보며 혀를 찼다.
"모, 몸이 안 좋네.... 조금 쉬어야 겠다."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나는 곽규를 보며 북리준이 쓰게 웃음을 지었다.
청나라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일에서 십까지 쓰여진 깃발을 들고 연무장에 일렬 횡대로 늘어섰다.
"각 자 속한 조의 깃발로 모여라."
청나라 장수의 우렁한 목소리에 낭인들이 이리 저리 이합집산을 시작했다.
'한 조가 스무명 정도 되는군.'
'八(팔)'이라 적힌 깃발 뒤로 낭인들이 모여 들자 맨 뒤에 북리준이 느릿한 걸음으로 자리를 잡았다.
약 한 식경에 걸쳐 낭인들이 시끌벅적한 가운데 자신에게 속한 조의 줄에 서자 예의 장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서 있는 조가 앞으로 전장에서 동고동락할 전우들이 된다. 내가 몇 조인지 확실하게 숙지 한 후 준비가 끝나는 대로 한 시진 후에 출발 한다."
약 이백여명의 낭인들이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가운데 반 수의 낭인들이 자신들의 짐을 챙기기 위해 자리를 뜨고 나머지 낭인들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었다.
북리준이 가부좌를 하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눈을 떴다.
"혼자 왔나?"
정제되지 않은 거친 기세를 내뿜으며 다가 오는 사십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예리한 인상의 사내가 말을 걸어 왔다.
"그쪽도?"
"낭인들이 다 혼자 인 거지. 저렇게 친한 척 해도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 되면 가장 이기적인 자들이 낭인이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입에서 침을 튀기며 이야기 하는 한 낭인의 모습에 북리준의 시선이 머물렀다.
"백리천이라고 한다. 동료들이 섬전창이라고 부르기도 하더군."
자신을 백리천이라 소개는 사내의 등 뒤로 두 번 접혀진 창이 눈에 들어왔다.
"도천학. 별호는 없소."
"검을 쓰나?"
"이것 저것...."
"같은 조에 소속 되었으니 한번 잘해 보세."
백리천이 자신의 옆구리에 찬 호리병을 입에 가져다 대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용병은 처음인가?"
"그렇소."
"전장에 나가면 말일세, 지옥도가 따로 없다네. 사방에서 피분수가 뿜어지고 목이나 팔이 날아 다니는 곳을 처음 경험하는 거라면 내 옆에 붙어있으시게."
순수한 호의를 가지고 말해 주는 백리천을 향해 북리준이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한 시진이 지나자 팔기군의 양람기 복장을 한 군대가 광장 저 편에 도열을 시작했다.
"청조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모양이야. 반란군의 기세가 장난이 아니라고 하더군."
북리준의 옆에 선 백리천이 툭 하니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랑 붙을 곳이 운남의 번왕인 오삼계 군이라는군. 삼번 중 가장 강력한 군세를 자랑하는 곳이니 조심하게."
청나라의 군대가 진군을 시작하자 그 뒤를 이백여 낭인들이 장수의 지휘하에 따라 붙기 시작했다.
"낭인 생활은 얼마나 되었소?"
"한 십오년 정도 되었나? 오래 되긴 했군."
낭인 용병 생활을 십오년 정도 해서 살아남은 백리천은 이 곳 낭인들 사이에서 강자로 인정 받는 자 가운데 하나였다.
청나라의 군대를 따라 붙어 걷는 와중에 저 앞에 검을 검집째 어깨에 메고 큰소리로 입을 여는 한 사내를 보며 백리천이 웃음을 지었다.
"저 앞에 저 놈! 나쁜 놈은 아닌데 허풍이 조금 세지. 허풍도 곡굉이라고 하고 무공은 그저 그런 수준인데 운이 좋더군."
"운도 실력이지요."
"허허, 맞네. 운도 실력이지. 그렇게 따지면 저 놈이 나 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봐야 하나?"
보름을 넘게 꼬박 걸어 호북성과 호남성의 경계 지역에 다다랐다.
새까맣게 보이는 군인들과 수많은 천막군이 거대한 평야를 가득 메운 장관에 북리준의 눈이 커졌다.
"이런 전장은 처음이라 그랬나?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들 그런 표정을 짓더군."
담담한 표정의 백리천의 뒤에서 허풍도 곡굉이 처음 온 초짜 낭인들에게 침을 튀겨 가며 허세를 떨고 있었다.
"자네들은 이런 거대한 전장은 처음이지? 앞으로 나만 잘 따라 오면 별 탈 없을 거라구."
"허풍 하나는....."
질서정연하게 거대한 평야 한 가운데 천막군으로 향한 군대가 구령 소리에 맞추어 자리에 섰다.
"뭐야? 정람기와 양홍기도 다 온거야?"
"아무래도 오삼계의 세를 꺾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하후승이 저 앞에 펄럭이는 정람기와 양홍기의 군기를 보며 입을 열자 옆에 섰던 팽무강이 안력을 돋우어 앞을 내다봤다.
"언가와 모용가도 저 앞에 모여 있네. 뭔가 작전에 변경이 있는 모양이네."
하후승과 팽무강이 자신들의 직속수하들을 이끌고 성큼 거리는 걸음으로 무림세력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왔는가?"
"오랜만이군."
진주언가의 이공자인 언철진이 다가오는 팽무강을 보며 아는 체를 했다.
"왔구나, 덜 떨어진 놈!"
모용세가의 장자 모용민이 다가오는 하후상을 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밥맛 없는 새끼, 아직 안 죽었구나."
모용민과 하후강의 으르렁 거림에 언철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 철 드냐, 쟤네들....."
"철 드는 순간 죽는 거야. 저렇게 살다 죽게 놔 둬. 그나 저나 작전에 변경이 있나 보네. 이렇게 다 모인 것을 보니..."
"오삼계가 사천과 호남을 다 집어 먹은 모양이야."
"사천까지?"
언철진의 말에 모용민과 으르렁 거리던 하후강이 고개를 돌렸다.
"화남지방을 다 집어삼켰네. 이거 심각한데..?"
"오삼계 쪽에 사파쪽 얘들이 붙은 모양이야. 그 놈들을 우리 보고 상대해 달라는 거지."
모용민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팽무강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마천각, 흑풍루, 귀혈방, 사혈림이 붙었다."
"미친놈들..."
하후강이 귀에 익은 사파 문파의 이름에 투덜거렸다.
"이 곳 호북성에는 놈들의 발이 닿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 조정의 의지야."
"의지 좋아하네."
"네 놈은 의지가 뭔지도 모르지?"
"입 닥쳐라. 내 창으로 확 쑤셔 박기 전에...."
"아이구 무셔라!"
모용민과 하후강이 으르렁 거리던 말든 팽무강이 언철진에게 다가갔다.
"낭인 중에 쓸만한 자는 있나?"
"용병들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흑도부, 벽안독검, 거력웅 정도.... 그쪽은?"
"섬전창이 그나마 제일 낫고 그 밑으로 파산권, 사망도 정도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후강이 툭 끼어 들었다.
"낭인들하고 같이 움직이라는 건가? 걸리적 거릴 텐데?"
"그건 모르지..."
무림문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섬전창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형님!"
"어, 아우 왔는가?"
파란 눈에 짙은 흑발이 인상적인 사내가 반가이 인사를 했다.
"인사하게. 여기는 도천학, 이쪽은 벽안독검이라 하네."
"반갑소!"
고개를 끄덕여 무심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북리준을 바라보는 벽안독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넌 내가 신기하지 않나 보군."
대부분 자신들 처음 대하는 자들의 신기한 듯 쳐다보는 눈길에 익숙해 있었는데 이 자는 아무 감흥이 없는 듯 했다.
"내 눈... 신기 하지 않나?"
"내가 자란 남해 바다를 닮았군. 보기 좋아..."
"하하하, 내가 여지껏 들은 칭찬 중 최상이군. 나도 반갑다. 구백이라고 한다."
그 때 저 뒤에서 한참 허풍을 떨고 있는 곡굉을 발견하고는 벽안독검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쟤 아직도 살아 있네.... 신기한 놈!"
"저 놈처럼 운이 억세게 좋은 놈은 보다 보다 처음 봤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섬전창이 곡굉을 바라 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형님, 이야기 들었소?"
"무슨 이야기?"
"오삼계 측에 사파가 끼여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여지껏 청나라 팔기군과 같이 움직이던 무림문파들에게 사파의 처리를 요청한 모양이에요."
"무림인은 무림인들끼리 해결해라?"
섬전창의 말에 벽안독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마 낭인 중에 이름이 그나마 알려져 있는 자들을 추려 합류 시킬 모양이더군요."
벽안독검의 말에 섬전창이 말없이 팔짱을 낀 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북리준을 바라 보았다.
"동생, 함께 하려 했는데 어려울 것 같군. 첫 전투에서 무조건 살아남게. 나중에 같이 할 기회가 있을 걸세."
"알겠소이다."
잠시 후 청나라 군대 장수들이 낭인들 사이를 헤집으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두 분을 모셔오라 합니다."
"자네 말대로 진행 되나 보군. 동생, 나중에 보세."
"나랑 연배가 비슷한 거 같으니 친구 하자. 친구, 나도 나중에 꼭 보자구."
벽안독검 구백이 활짝 웃음을 짓고는 섬전창과 장수를 따라 나섰다.
"용병들은 이쪽으로 모이시오."
한 장수의 우렁한 목소리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낭인들이 한 군데로 모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속한 조는 모두 숙지 했을거라 믿소. 각 조를 나타내는 기를 따라 이동 하면 배속될 팔기군으로 인도할 것이오. 무운을 빌겠소."
'八(팔)' 이라는 기를 따라 이십여명의 낭인들이 무질서하게 이동을 시작하자 맨 뒤에 북리준이 따라 붙었다.
거대한 평야를 가득 메운 군대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군기에 처음 전장에 나선 낭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걱정 말라니까. 내 말대로만 하면 문제 없다고."
앞장 서는 기의 바로 뒤에서 허풍도가 연신 떠들어 대는 모습을 보고 북리준이 웃음을 지었다.
'유쾌한 자군.'
"모두 주목!"
양람기 갑옷을 입을 장수 하나가 약 천 여명의 낭인들 앞에 섰다.
"여기에서 나누어진 편제대로 각 정홍, 양백, 양홍, 정람, 양람기로 배속될 것이다. 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자신이 속한 군을 명심하기 바란다."
각 조를 나타내는 깃발들이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 하자 낭인들 또한 그 깃발을 따라 발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八(팔)' 이라 씌여진 깃발 다섯이 뭉쳐 이동을 시작하자 팔조에 속한 백 여명의 낭인들이 움직이고 홍색 바탕에 노란용이 춤추는 거대한 정홍기의 깃발이 저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우리 정홍기 휘하의 군에 배속 되었다. 정홍기를 나타내는 군복을 지급 할테니 내일 출정시 모두 빠짐없이 착용하기 바란다."
백 여명의 낭인들이 정홍기 소속을 나타내는 낡아빠진 군복을 나누어 받고 배식 받은 주먹밥과 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자네들은 청나라의 팔기군의 유래에 대해 아나?"
밥을 먹고 각자 휴식을 취하는 중에 주위에 있는 낭인들에게 곡굉이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소."
"하하, 귓구멍 파고 잘 듣게. 나 정도 되는 사람이나 알려 주는 귀중한 정보니 말일세.
청을 세운 초대 황제인 누루하치가 만주족의 부족제를 본 떠 만든 군사제도 인데 처음에는 청, 백, 홍, 람 네 개의 기로 구성되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조직이 커지자 이 네 개의 색깔을 정과 양으로 나누어 지금의 팔기군이 된거야."
전장에 처음 나온 초보 낭인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곡굉을 주시했다.
"저 깃발을 봐!"
저 앞에 펄럭이는 홍색 바탕에 노란용이 춤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정홍기 소속이고 저쪽 홍색 바탕에 하얀색 테두리가 둘린 것이 양홍기야."
"그럼 팔기라는 것이 정황, 양황, 정백, 양백, 정홍, 양홍, 정람, 양람기라는 거네."
"야, 너 머리가 좀 굴러가네. 맞아."
곡굉이 한껏 거드름을 피더니 입을 연 낭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 팔기들이 다 같은 급이겠네?”
“그렇지 않아?”
“무식한 놈! 귓구멍 파고 잘 들어.
이 팔기 중에 정황, 양황, 정백기 삼기는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직속 부대야. 나머지 오기는 하오기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제후들이 관할 하는 군이라는 거야. 급이 다르지, 급이!”
< 18. 우리는 팔조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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