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19화 (19/167)

< 19. 참전 >

북리준이 어느새 곡굉의 말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말재주는 타고 난 놈이군.’

“그럼 우리는 황제 직속 부대인 삼기에 배속 될 일은 없겠네?”

“당연한 거 아냐? 누가 황제 직속 부대에 신원도 무공도 확실치 않은 낭인들을 배속 시키겠냐?”

“이 전쟁에 황제도 오나?”

약간 떨어져 보이는 낭인이 어눌하게 질문을 던졌다.

“미쳤냐? 황제는 자금성에서 중심을 잡고 있어야지. 정황, 양황, 정백기의 고수들은 참전 하겠지. 아마도....”

곡굉의 말에 낭인들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아까 어눌한 낭인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난 처음 참전하는 건데 어떻게 적들과 싸우는 거요?”

“아주 시기 적절한 질문이군. 술 한잔 하면 딱인데..... 쩝!”

군문에서 낭인들은 일반 병사보다는 유하게 다루기는 하나 술은 철저하게 금하고 있기에 곡굉이 입맛을 다셨다.

“내일 전투가 시작 되면 아마 우리가 맨 앞에 서게 될 것이야.”

곡굉이 주위를 살피고는 고개를 숙이고 나직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절대 미친 놈처럼 적들을 향해 돌진 하는 병신짓은 하지 마라. 그 놈은 내일 지는 해를 못 볼테니까...”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요?”

“적당히 해야지. 적당히....”

곡굉의 적당히 라는 말에 처음 참전한 낭인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허풍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펴 청나라 장수가 있는지 확인 후 막대기 하나를 들어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자, 여기가 우리 팔기군이야.”

자신의 앞에 쭉 길게 횡으로 선 하나를 긋고는 반대편에 다른 선 하나를 그었다.

“저쪽이 반란군, 오삼계 군이라고 하자구.”

팔기군이라 칭한 선 중간 중간에 원을 대여섯개를 그리고 반대편 오삼계군 선에도 같이 그리고는 중앙 정면의 원을 막대기로 가리켰다.

“여기가 우리가 내일 자리할 곳이야. 한 마디로 개죽음 당하기 딱 좋은 자리지.”

처음 참전하는 낭인들 십 여명이 곡굉의 말과 막대기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진을 형성하고 청나라의 대장군이 ‘전원 돌격’ 이라는 명이 떨어지면 미친 듯이 무기를 들고 ‘와아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이렇게 앞으로 뛰쳐나가 적들과 맞붙는 거야.”

곡굉의 막대기가 원들 앞에 반란군의 진지를 향해 화살표를 하나씩 붙였다.

“그럼 저쪽도 ‘죽여’ 라고 이렇게 뛰어 나오겠지?”

반란군 진지라는 선 위에 그려진 동그라미들에 또 화살표를 붙였다.

“이렇게 ‘쾅’ 부딪치면 단번에 수백, 수천의 목숨이 날아가. 거기에 끼고 싶어? 우리는 한 달 동안 살아 남아야 돈을 받는 낭인이라고. 살아야 할 거 아냐?”

“그럼 뒤로 도망 가라는 말이오?”

“이런 병신! 전진 하라고 하는데 뒤로 도망 가면 청나라 장수의 검에 목이 날아가지.”

여기 까지 이야기한 곡굉이 더욱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를 죽였다.

“일반병사들과 장수들이 앞으로 뛰쳐 나갈 때 반보씩 늦게 움직이라고. 뛰어도 조금 늦게 뛰고....”

“그게 말이 돼?”

한 낭인이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자 곡굉이 다시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목소리 낮춰! 이 병신아. 네 놈이 용감하게 돌격 했다 치자. 네 놈의 뜀박질이 뛰어나 맨 앞에서 뛰다 적들에게 둘러싸였어. 그냥 난도질 당하고 이 세상하고 작별하는 거야.

절대 적들에게 포위 당하는 위치에 가지마.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고수도 전장에서 적들에게 둘러싸이면 그냥 끝이야, 끝!”

허풍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북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북리준이 해남검단에서 보낸 오년 동안 왜구들과 사투를 벌이며 얻은 교훈과 일맥상통하는 곡굉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그리고 내일 방패를 무조건 하나씩 챙겨.”

“방패?”

“전군이 돌격을 시작하면 양쪽 후방에서 적들의 머릿수를 줄이기 위해 궁수들이 활을 쏜단 말이다. 하늘을 새까맣게 메운 화살비 못 봤지?

용감한 병사들에게는 화살도 피해 간다고? 지랄, 한 순간에 그 용감한 병사는 고슴도치가 되는거야.”

“없는 방패를 어떻게 구해?”

“그래서 내일 나를 따라 하란 말이다. 내 앞에 나가던 놈이 죽어 나가면 그 방패를 챙기거나 이도 저도 없는데 하늘이 어두워지면 죽어 넘어진 시체 밑으로 기어 들어가! 무조건....”

너무도 실감나는 곡굉의 설명에 낭인들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내일 내 옆에서 내가 하는대로만 따라해. 특히 젊은 놈들은 들끓는 전장의 살기에 동해서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어 개죽음 당하지 마라.

한 달 뒤 내가 받을 돈을 남이 받고 희희낙락하게 하기 싫으면 말이다.”

****

오만이 넘는 대군이 호남과 호북 경계의 평야 지대에 진을 형성 하고 전면에 진을 구성하고 있는 반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푸르르릉 푸르릉”

거대한 평야 곳곳에서 뿜어내는 투기에 반응하여 기마들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기마병, 창병, 일반 병사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돌격 군호를 기다리며 손에 흐르는 땀을 옷에 닦고 있었다.

“어제 내 말 잘 생각해.”

허풍도 곡굉의 말에 몇몇 낭인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북리준 또한 지급받은 군복을 입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전장의 투기구나. 주위의 낭인과 군인들의 수준에 맞추어 내공을 쓰지 말고 전투에 임하자.’

자신의 무공을 드러내면 군문에서 실전을 쌓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음을 감안 하여 최대한 육체의 근력만으로 전투에 임하기로 마음을 굳히고는 심호흡을 했다.

“애송이! 너무 긴장 하지 마라.”

북리준이 심호흡을 하는 것을 보고 허풍도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한 이야기 잘 생각하고 너무 앞으로 나서지 마라.”

“알겠소!”

북리준이 처음 보았을 때 보다 호감이 가는 곡굉의 말에 고개를 주억 거렸다,

“전군 도올격!”

거대한 진의 중앙 뒤 지휘대에 올라선 정이품 무직경관인 팔기호군통령의 군호에 오만이 넘는 진형이 울컥 거리며 전면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크와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거대한 평야가 근 십만이 넘는 군인들이 뿜어내는 고함소리에 진동을 했다.

“간다아아아아아악”

곡굉도 주위 사람들에 동화되어 고함을 지르고는 앞으로 뛰어나갔다. 물론 남들 보다 조금 늦게....

“온다아아아아”

곡굉이 설명했듯이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저 앞서 달리던 한 무리의 군인들이 고슴도치가 된 채 쓰러져 갔다.

“방패, 방패!”

곡굉의 외침에 중간 중간에 널부러진 방패병 시체 사이에 방패를 챙기는 사이 다시 하늘이 어두워졌다.

“시체 밑으로!”

방패를 챙겨든 곡굉이 방패를 하늘로 향한 채 신형을 웅크리고 미처 방패를 챙기지 못한 낭인들이 시체들 밑으로 뛰어 들었다.

“파바바바바팍 바바바바박”

방패와 시체들 위에 쏟아진 화살비가 한 바탕 지나간 후 곡굉의 옆에 방패를 챙겨들었던 북리준의 귀에 곡굉의 외침이 들려 왔다.

“그대로 있어, 새끼들아! 움직이지마.”

시체 밑에 신형을 웅크리고 있던 몇 낭인이 신형을 일으키다 다시 쏟아지는 화살비에 전신이 꿰뚫린 채 쓰러졌다.

“병신 새끼들....”

“당신 탓이 아냐.....”

북리준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를 악무는 곡굉을 향해 고함을 쳤다.

서너차례의 화살비가 그치자 다시 뒤에서 돌격을 외치는 군호가 들려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화살비에 살아남은 기마병과 창병, 군인들이 정면에 달려 오는 적군을 향해 온 몸을 부딪쳐 갔다.

“콰차차차창 차차장 콰직”

기마병들이 서로의 몸을 부딪고 장창과 언월도들이 말 위에서 몸부림을 쳤다.

창병의 긴 창에 꿰뚫린 적의 시체를 던져 버린 채 검과 도를 뽑아든 팔기병들이 앞으로 뛰어 나갔다.

“차창 창 크아아아악 카악”

사방에서 피가 난무하고 팔다리가 비산하며 어디에서 날아드는지 모르는 검과 도, 창이 무작위로 목숨을 앗아갔다.

“후욱 훅”

자신에게 달려드는 창병의 창을 오른발을 반보 빼어 흘려 보낸 북리준의 검이 지나치는 창병의 목을 갈랐다.

이어 옆에서 날아오는 도를 맞아 검을 뻗어 내어 막아내고는 오른발로 적의 가슴을 걷어찼다.

“커헉!”

저 멀리 나동그라진 적의 가슴에 다른 아군의 검이 떨어져 내리고 북리준의 검이 옆에 낭인의 목을 쳐 내는 적군의 등을 갈라버렸다.

북리준의 주위에 널부러진 적들의 수가 이십을 넘어가자 너무도 사나운 기세에 주위의 적군들이 주춤 주춤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다.

“이야야야야, 이 개새끼들아!”

많이 듣던 고함소리에 돌아 보니 적병 세 명에 둘러싸인 곡굉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위태 위태하게 적병의 도와 창을 피해 내던 곡굉이 힘겹게 한 명의 적을 베어 넘기고는 냅다 뒤로 뛰기 시작 했다.

그 때 그와 대치하던 창병이 창을 잡고는 달아나는 곡굉의 등을 향해 창을 내던졌다.

‘이런...’

땅을 박차고 창을 내던지는 적병의 머리를 갈랐으나 이미 손을 떠난 창이 곡굉의 등을 향해 맹렬히 날아갔다.

“어어억”

열심히 도망가던 곡굉의 발이 널부러진 시체에 걸려 앞으로 넘어지자 그 위를 던져진 창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지나치며 다른 적병의 등에 꽂혔다.

다른 한 명의 적병을 베어 넘기며 이 광경을 본 북리준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정말 운이 좋은 자군.’

한 호흡만 늦었어도 창에 꿰뚫릴 뻔한 곡굉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고는 북리준의 검이 다음 목표를 향했다.

“뿌우우우우우우 뿌우우웅”

“전군 철수! 전군 철수!”

거대한 전장에서 피바람에 잠기기를 두 시진.

철군의 나팔소리에 양 쪽 군대들이 썰물 빠지듯 각자의 진지로 물러섰다.

어림잡아 만이 넘어 보이는 시체들을 남긴 채 각자의 진지로 물러선 군대가 내일의 싸움을 위해 정비에 들어갔다.

낭인들을 책임지는 팔기군의 장수가 ‘八(팔)’이라 씌여진 기가 나부끼는 천막촌에 들어섰다.

“모두 집합!”

부상을 입어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낭인을 제외하고는 장수의 말에 하나둘 천막촌 앞 공터에 모여 들었다.

“너! 인원수를 파악해라.”

청의 장수가 별다른 상처 없이 굳건히 서 있는 북리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귀찮군!’

“줄을 서 보시오.”

앞에 다섯 사람의 낭인을 세우고 그 뒤로 줄을 세우자 오열 종대의 모양이 갖추어졌다.

북리준이 천막 안에 널부러져 응급처치를 받고 있는 낭인의 수를 어림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섰다.

“부상자 스물 하나, 생존자 사십 일곱이오.”

“흠! 여기는 많이 살아 남았군....”

중얼거리는 장수의 말에 북리준이 줄 중간에 후줄근하게 서 있는 곡굉을 바라 보았다.

‘저 자 덕분에 덜 죽었지....’

주위에 젊은 낭인들이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으나 곡굉의 무거운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오늘 하루 모두들 수고 많았다. 부상자들의 저녁까지 챙겨서 푹 쉬고 다음 전투를 대비하기 바란다.”

장수가 낭인 십여명을 데리고 떠난 잠시 후 팔조에 속한 낭인들이 먹을 음식, 금창약, 붕대등을 가지고 돌아 왔다.

“술도 줍디다....”

젊은 낭인이 술병 이십여개를 북리준과 곡굉의 앞에 내려 놓았다.

“이 놈에게 고맙다고 해라. 이 놈이 아니었으면 이 곳에 반 정도는 아예 못 돌아왔다.”

< 19. 참전 > 끝

ⓒ 편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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