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20화 (20/167)

< 20. 허풍도 >

북리준의 눈부신 활약 덕에 목숨을 부지한 낭인들이 고개를 주억 거렸다.

“다 들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눕시다. 부상자들의 몫은 천막 안에 넣어 주고 오시오.”

북리준의 말에 십여명의 낭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름이...?”

“북리준!”

“전장이 처음 아니지?”

“그렇다고 칩시다.”

적병이 내지르는 검도창에 주눅 들지 않고 냉철한 얼굴로 적들을 사정 없이 갈라내는 검과 적들에게 포위 되지 않는 순간적인 위치선정 등이 전장에서 몇 년 굴러먹은 낭인 못지 않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자세히 보니 세파에 찌든 사십 중후반 되는 얼굴을 가진 곡굉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 혼자 살기 바쁘오...!”

“오늘 같이만 해달라는 말이다. 저 불쌍한 놈들의 생떼 같은 목숨이 아깝지도 않냐?”

“어차피 각오하고 들어온 인생들이잖소?”

북리준이 술병을 하나 입에 물고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맞지.... 하지만 말이야. 누군가 조금 도움을 줘서 이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닌가?”

지옥에서 살아 남았다는 기쁨에 한껏 들뜬 얼굴로 음식과 술을 입에 넣으며 떠들어 대는 낭인들의 보며 곡굉이 술병을 입에 물었다.

‘허풍도가 아니고 인정도라 해야겠군...’

왜 평소에 그리 잘난 체를 하며 말이 많았는지 그 거드름 안에 수줍게 숨어 있는 측은지심을 엿본 북리준이 다시 신경질적으로 술병을 입에 물었다.

“너무 오지랖 떨지 마시오. 그러다 당신 먼저 저 세상으로 가오.”

“큭큭큭, 자네가 말했잖는가? 각오하고 들어온 인생이라고....”

북리준이 그나마 먹을만한 음식에 손을 뻗어 입안에 넣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사시오?”

북리준이 자신만의 안위에 모든 것을 쏟는 낭인들과 다른 곡굉의 모습에 의문이 들었다.

“이 지옥에 발을 들인 지 십년이 조금 넘었군....”

잔잔한 어조로 처음으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십 년 전 딱 저 모습이었네.”

곡굉이 눈짓으로 저 앞에서 해맑게 웃고 떠들며 연신 음식을 먹는 젊은 낭인들을 가리켰다.

“무공이 높기를 하나, 뒤를 봐 줄 수 있는 뒷배가 있나... 오직 젊은 혈기와 도 한 자루에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전장으로 흘러들었다네.”

십 년 전 처음 들어선 낭인 용병의 길에 대한 회한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때 나이가 지긋한 낭인 한 분이 계셨었네.”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곡굉이 다시 술병을 입에 물었다.

“별호도 없고 주위에서 명 하나는 지독하게 길다고 혀를 내두르는 늙은 낭인이었지. 이름도 안 가르쳐 줘서 그냥 ‘어르신’이라고 반 장난 식으로 불렀다네.”

곡굉의 차분한 목소리를 안주 삼아 북리준이 다시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그 분이 딱 나같이 했다네. 처음 전장에 온 젊은 새끼들이 객기를 부리다 뒤질 것을 염려하여 듣지도 않는 이야기를 연신 주절 주절 떠들었다네.”

어느새 팔조에 속한 낭인들 십여명이 곡굉과 북리준의 주위에 모여 앉았다.

“그때 당시에는 노망 직전 늙은이의 주접이라고 귀담아 듣지 않았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낭인의 말대로 움직여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더군.”

“그 낭인.... 어찌 되었소?”

한 젊은 낭인이 궁금하다는 듯 불쑥 질문을 던졌다.

“나 때문에..... 죽었다네....”

다시 술병을 입에 물다 병이 빈 것을 발견하고는 땅에 내려 놓자 누군가 병 하나를 다시 손에 쥐어주었다.

“고맙다.”

한 모금의 술을 다시 넘기고는 곡굉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원래 그 날 전투를 마지막으로 고향에 돌아 가겠다고 말했었어. 모아 놓은 돈도 조금 있고 지긋 지긋한 피냄새도 그만 맡고 농사나 짓다 너희들을 기억하며 평안하게 죽겠다고 했지.

그런 영감탱이가 내가 적병에게 둘러싸여 죽기 일보 직전에 몸을 던져 나를 구하고는 대신 죽었다네.... 병신같은 짓을 한거지....”

완전히 잊은 줄 알았던 생경한 감정이 가슴 한켠을 아릿하게 조여왔다.

“죽기 직전에 내 품 안에서 중얼 거리더군. 많은 목숨을 구하고 가서 자신은 극락에 갈거라고...

네 놈도 말로라도 생떼 같은 목숨이 이어갈 수 있도록 계속 떠들라고 하더군. 누가 듣던 말던 말일세.”

왜 곡굉이 허풍도라는 치욕스런 별호가 붙었음에도 쉴 새 없이 젊은 낭인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쏟아 냈는지 그 이유를 안 북리준이 주름투성이 곡굉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참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 있구나....’

****

다음 날 아침!

지옥 같은 하루를 지낸 낭인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몸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그 때 청나라 장수가 팔기군 십 여명을 대동하고는 팔조의 천막촌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지?”

어제 곡굉과 술잔을 나누고 형님으로 모시기로 한 젊은 낭인이 일어서려 하자 곡굉이 손을 들어 말렸다.

“놔두게. 전투가 불가능한 낭인들을 골라 돌려 보내는 거라네. 물론 은자 한냥 정도는 던져 주지....”

곡굉의 말대로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있는 부상자들을 지휘봉으로 가리키자 일반 군인들이 들것에 실어 낭인들을 천막 밖으로 빼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저렇게 부상을 당하고 빠져나가는 것이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네.....”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어제 눈 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한 달만 버티면 은자가 다섯 냥이야. 그리고, 매일 그 지옥도에 몸을 담그는 것도 아니잖아?”

돈이 궁해 칼 한 자루를 들고 들어선 전장에 대한 두려움을 애써 떨치려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맞아! 은자 다섯냥.... 이런 곳이 아니면 누가 우리한테 그런 거금을 주겠어?”

팔기군 병사들이 십 여명의 부상자를 실어 나르고 난 후 양홍기의 장수가 팔조 인원들을 보고 소리를 쳤다.

“오늘 오후 추가 인원이 들어올 것이다. 내일 묘시에 다시 전장으로 이동 하니 오늘은 각자 정비를 하도록.”

자기 할 말을 마친 장수가 신형을 돌려 돌아가자 젊은 낭인 중 하나가 곡굉에게 질문을 했다.

“추가 인원? 낭인이 또 들어오나요?”

“이곳에서 물러나면 청조는 막다른 곳에 몰리게 되어 있어. 이기기 위해 매일 낭인들을 보충해 줄 수 밖에.”

북리준이 천막촌 한켠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했다.

“잠깐 시간을 내주게.”

어느새 다가온 곡굉이 북리준의 옆에 냉큼 앉았다.

“그렇게 앉을거면 뭐하러 묻소?”

“허허허, 동생이니까....”

북리준의 무심한 얼굴을 슬쩍 본 곡굉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조장이 되어주게!”

뜬금 없는 말에 북리준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곡굉을 바라보았다.

“지금 팔조의 경우 나쁜 새끼가 없어 다행이지만 추가로 투입 되는 놈들 중에 개 같은 새끼가 없을 거라는 보장이 없네.”

“관심없소.”

단칼에 거절하는 북리준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조장이 되면 말일세. 조금은 편해 진다네. 물론 조 내부에서 말썽을 일으키려는 놈을 지그시 힘으로 눌러 줘야 하는 수고가 들기는 하지만 말일세.”

자신의 무공과 실전을 연결 시켜 몸에 체화하기 바쁜 와중에 곡굉의 제안은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쪽이 하시오. 가끔 도움을 줄테니...”

“나? 난 그런 그릇이 안된다네. 물론 무력도 배짱도 없고 말이야.....”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만 난 관심이 없소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천막촌 구석으로 걸어가는 북리준의 뒷모습을 보며 곡굉이 웃음을 지었다.

“내가 말이야, 사람 보는 눈이 조금 있단 말일세. 동생 옆에 있으면 아주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 날 것 같단 말이지.”

점심 식사를 하고 난 후 저 쪽 중앙 연무장 쪽에서 거대한 소란스러움이 잦아들고 팔조의 천막촌을 향해 일단의 무리들이 들어섰다.

“여기가 너희들이 앞으로 함께 할 조이다.”

청나라 장수가 삼 십 여명의 낭인들을 천막촌 앞에 데려다 놓고는 휭하니 돌아섰다.

“크크크, 이게 누구야, 허풍쟁이 아저씨가 여기 계셨네?”

얼굴에 검상 하나가 가뜩이나 차가운 뱀상의 사내 얼굴을 더욱더 매섭게 보이게 했다.

“어, 와, 왔는가?”

곡굉의 안색이 일그러지며 말을 더듬거렸다.

“아직도 허풍 떨고 다니시나? 나만 따라 오면 살 수 있다고 말이지, 크크.”

삼십여명의 낭인 중 곡굉의 앞에 선 뱀상의 낭인을 중심으로 십 여명이 병풍 치듯 둘러섰다.

“어이, 뒤에 떨거지들, 저 쪽으로 이동해라.”

뒤에 서 있던 이십여명의 낭인들이 우루루 천막촌 앞에 서 있는 낭인들과 합류했다.

“잘 들어라! 여기 계신 분은 우리 낭인계의 신성이신 수라도 염파 대협이시다.”

이십여명의 낭인들을 개 몰 듯이 천막촌 쪽으로 몰아낸 꺽다리 낭인 하나가 한껏 거드름을 피고 있는 염파를 소개했다.

“낭인계의 양아치들이네. 자기 보다 힘이 없는 낭인들 등쳐 먹기로 유명한 들개 같은 놈들이지.”

어느새 북리준의 옆에 선 곡굉이 나지막하게 설명을 했다.

“관심없다 했잖소?”

“그렇다는 거지 뭐!”

약 백여명의 팔조 낭인들 앞에 선 꺽다리 낭인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이 곳 팔조의 조장님은 여기 계신 염파님이시고 부조장은 나 임괴님이 맡으실 거다. 앞으로 배식을 포함한 모든 배급은 나 임괴님이 총괄하고 조장님께 먼저 진상하고 나머지는 너희 떨거지들 차지가 되는 것이다.”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소?”

그 때 곡굉을 형님으로 모신다며 싹싹하게 낭인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만들어 가던 젊은 낭인이 불쑥 나섰다.

“꼭 어딜 가나 저렇게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개자식들이 있기 마련이지.....”

수라도가 한껏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중얼 거렸다.

“끌고 와라!”

임괴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아홉명의 낭인이 흉흉한 기세를 발하며 젊은 낭인을 끌어 내었다.

“다시 한번 그대로 씨부려 보거라!”

수라도의 앞에 억지로 무릎 꿇려진 낭인이 두려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그건 부, 불공평하다 했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이야기하는 낭인이 수라도의 우각에 가슴을 얻어 맞고는 뒤로 넘어갔다.

“커헉 컥.....”

“불공평? 앞으로 이 새끼 한테는 물도 밥도 주지 마라. 주는 새끼는 똑같이 대해 주마.”

낭인 열이 염파의 각에 가슴을 맞고 컥컥 거리는 젊은 낭인을 향해 주먹과 발길질을 시작했다.

“이, 이봐 염파, 이제 그만하게!”

곡굉이 젊은 낭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가는 모습에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호오, 겁쟁이 허풍쟁이 아저씨가 웬일로.... 왜 대신 맞아 주시게?”

이죽거리는 얼굴로 천천히 발걸음을 떼는 염파를 피해 뒷걸음짓치던 곡굉이 임괴의 가슴에 부딪쳤다.

“같은 낭인끼리 서로 도와주지 못할망정 이러지 말자고....”

“같은 낭인이라..... 하, 우리 낭인계가 너 같은 새끼들 덕분에 업신 여김을 당하는 거야.”

평소에 허풍을 떨어 대며 죽지도 않고 자신의 눈 앞에 알짱거리는 곡굉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염백이 자신의 도를 꺼내었다.

순간 십여명의 낭인들이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도록 등을 돌린 채 장막을 만들었다.

“뒤지지도 않고 잊을 만 하면 내 눈 앞에서 알짱거려 성가셔 죽는 줄 알았는데 오늘 아예 이 세상에서 지워주마!”

< 20. 허풍도 > 끝

ⓒ 편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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