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21화 (21/167)

< 21. 조장이 되다. >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춤 거리는 곡굉의 앞에 염백이 자신의 수라도를 빼들었다.

“자, 장난이 심하군. 군영 내에서 아군끼리 칼부림 하면 팔기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너 같은 새끼 하나 없어진다고 누가 신경이나 쓸 거 같아?”

병풍처럼 염백과 곡굉을 둘러싸 외부의 시선을 차단한 낭인들을 흘낏 쳐다보고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잘게 썰어서 개 먹이로 던져 주면 끝이지...”

곡굉이 염백의 얼굴에 떠오른 냉혹한 표정을 보며 이게 말로 끝나지 않을 상황임을 파악하고 자신의 도를 꺼내 들었다.

“미, 미친놈! 내가 그리 호락 호락 네 놈의 도에 죽어 줄줄 아느냐?”

“크크크, 삼 초 안에 멱을 따 주마!”

그 때 곡굉을 형님으로 모신다며 밤 새 이야기를 나눈 삼인의 젊은 낭인이 주춤 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 그만 하시오. 우리도 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든 채 곡굉에게로 다가가자 뒤를 막아서고 있던 임괴라는 낭인이 재빠르게 염파의 뒤로 물러섰다.

“더 없냐? 이 허풍선이와 함께 묻힐 놈이...”

염파의 서슬 퍼런 살기에 다른 낭인들이 주춤 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너희 넷이 다 인가 보구나.”

“아무도 없습니다. 진행 하시지요.”

임괴가 늘어선 낭인들 사이로 고개를 빼고 주위를 살핀 후 염파 옆으로 다가 왔다.

“오랜만에 형님의 수라도를 제대로 견식 하겠네요, 흐흐흐!”

커다란 도신이 위압적인 수라도를 늘어 뜨린 채 천천히 염파가 걸음을 옮겼다.

“머, 멈추시오. 더, 더 다가오면 베겠소.”

젊은 낭인 중 하나가 떨리는 검 끝을 내밀며 소리쳤다.

“베어 봐라. 할 수 있다면...”

순간 염파의 수라도가 퍼득 거리며 자신에게 검을 겨누는 낭인을 양단 하기 위해 밑에서 솟아오르려는 찰나 ‘따아악’ 소리와 함께 이마를 부여 잡고 주저앉았다.

“어, 어떤 개새끼가...”

순식간에 부어 오른 이마를 왼손으로 누르며 자신에게 돌을 날린 자를 찾아 눈을 부라렸다.

“하아, 정말로 손이 많이 가는 아저씨네... 뒤로 물러나요.”

북리준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서자 곡굉과 젊은 낭인들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너야? 돌팔매를 한 개새끼가....?”

“돌을 던진 것은 맞는데 내 부모는 개가 아니거든.”

“이런 병신 같은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부조장을 자처 하던 임괴가 자신의 검을 빼 들고 신형을 날리려는 찰나 북리준의 손목이 휘돌아 가며 ‘쌔애앵’ 소리와 함께 찰진 돌멩이가 임괴의 이마를 직격했다.

“커허어억”

정확하게 이마를 얻어 맞은 임괴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자 뒤에 서 있던 똘마니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섰다.

“머리수로 누르시게?”

북리준이 빙글거리는 얼굴로 수라도를 쳐다 보았다.

“모두 뒤로 물러나, 개새끼들아!”

염파의 고함에 낭인들이 쓰러진 임괴를 끌고 뒤로 물러섰다.

“넌 누구냐?”

“나? 네 놈이 차지 하려고 하는 팔조 조장!”

“호오, 전임자시군.”

“미친놈! 네 놈 같은 후임은 관심 없다. 꺼져라.”

북리준의 말에 수라도가 자신의 도를 혀로 햝으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네 놈이 대신 죽겠다니 기꺼이 목을 날려주마.”

“꼭 개새끼들은 죽도록 처맞기 전까지 엄청 짖는다더니...”

염파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는 모습을 보고 북리준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네 얼굴 곧 터지겠다....”

“크아아아악”

염파가 수라도를 앞세워 자신을 있는 대로 약을 올리는 젊은 놈을 썰어 버리기 위해 도를 놀리기 시작했다.

“위, 위험....”

뒤에 서 있던 곡굉이 나름 이 곳 낭인계에서 콧김을 낸다는 수라도의 무공을 알기에 걱정스런 경호성을 터뜨렸다.

자신의 목을 노리고 횡으로 날아드는 도를 슬쩍 뒤로 반보 물러나 흘려 내자 지나쳐가던 도가 다시 급격한 회전을 하며 북리준의 가슴을 종으로 가르려 했다.

뒷짐을 진 채 오른발을 반보 빼내어 사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도를 가슴 한 치 앞으로 비켜내는 등 약 십 여초의 도세를 잉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 듯 유유히 피해내었다.

“이, 이익, 제발 한 번만 맞아라!”

연신 내지르는 도초 사이를 미꾸라지 같이 빠져 나가는 북리준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끝내자!”

북리준이 가슴을 꿰뚫기 위해 일직선으로 날아 오는 도를 슬쩍 비껴낸 후 자신의 가슴을 지나쳐 가는 염파의 오른팔을 두 손으로 휘감았다.

“빠가각, 크허어억”

팔목뼈가 부러지는 순간 도를 놓치고 이를 악물고 왼발로 북리준의 머리를 터뜨리기 위해 각을 날리는 염파의 눈에 한껏 냉정한 표정의 북리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잘못 건드렸구나...’

“퍼거걱, 크아아악”

왼발목이 다시 부러져 나가고 그 자리에 주저 앉으려는 찰나 북리준의 두 손이 넘어가는 염파의 왼팔을 감아 쥐었다.

“남의 목숨을 빼앗으려면 그만한 각오는 했겠지?”

여지없이 부러져 나가는 왼팔목과 귀신같은 금나수법으로 오른발목까지 깔끔하게 부러뜨린 북리준이 허물어져 가는 염파의 가슴을 냅다 걷어찼다.

“커허어어억, 쿠당탕탕...”

날아오는 염파를 받아들던 똘마니들이 같이 땅을 뒹구는 모습에 젊은 낭인들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장! 저 놈들 어떻게 할까?”

곡굉이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북리준에게 다가왔다.

“하아, 수라도인지 수라간인지 놈은 양팔목과 발목이 다 부러졌으니 부상병으로 처리하고... 너희들 이리로 와라.”

정신줄을 놓은 수라도를 이미 널부러져 있는 임괴 옆에 눕혀 놓은 낭인들이 손가락을 까닥여  자신들을 부르는 무서운 고수의 부름에 다급히 북리준의 앞에 일렬횡대로 줄을 섰다.

“앞으로 팔조 안에서 말썽을 일으키면 저렇게 만들어서 내 보낼 것이다.”

“넵! 절대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여기 있는 곡굉이 부조장이다. 앞으로 부조장 말을 잘 들어라.”

자신들 십 여명이 다 덤벼도 이길 수 없는 수라도를 간단히 불구로 만든 조장이라는 자의 말에 낭인들이 다시 허리를 곧추 세웠다.

“네, 절대 복종 하겠습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팔조의 저녁을 추진하러 나간 사이 곡굉이 저 편 나무에 기대 앉아 있던 북리준의 옆에 앉았다.

“조장!”

“하, 내가 당한 것 같소....”

“고맙다. 동생이 나서지 않았으면 그 새끼 도에 목이 달아 났을거야.”

“난 이름만 조장 할테니 그 쪽에서 다 알아서 하시우. 그 쪽이 해결 못할 일이 있다면 그때만 나서겠소.”

“알겠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네.”

****

이틀에 한 번씩 출전하여 온 몸에 피범벅이 된 채 복귀하고 전사자들을 대체할 낭인들을 스무 번 정도 받은 어느 날!

곡굉이 어제 까지 웃고 떠들었던, 오늘 같이 돌아 오지 못한 낭인들을 추모 하며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형님! 나 좀 잠깐 봅시다.”

북리준이 팔에 입은 자상에 금창약을 바르던 곡굉을 불러내었다.

“무슨 일인데?”

“이대로는 안되겠소.”

“뭐가?”

곡굉이 뜬금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많이, 어이 없이 저렇게 죽어 나가는 거 말이오....”

“전장이 원래 그런 곳이야. 그나마 동생 때문에 우리 팔조는 전사자 수가 다른 조에 비해 월등히 적잖아.”

북리준이 저녁 추진조가 공수해 온 술병 하나를 내밀자 곡굉이 받아 쥐고는 입에 물었다.

“내일부터 우리 팔조 낭인들에게 검진을 가르치겠소.”

“검진?”

너무도 생각지도 않은 말에 곡굉의 눈이 커졌다.

“무슨 검진을?”

“삼재검진의 일종이오.”

“그런 것도 알아?”

북리준이 한 달 반 정도 거친 전장에 묻고 온 낭인들의 수가 더해 질수록 고민이 깊어져갔다.

‘어차피 전장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닌 거 같다.’

단순이 돈에 팔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장으로 내몰려 개죽음을 당하는 낭인들을 조금이라도 줄일 방법을 찾다 지괴 냉가려의 유진 중 진법에 관한 것이 떠올랐다.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움직이는 아주 기초적인 검진이오. 이런 전장에서 쓰기에는 나쁘지 않은 것이오.”

“언제 누구한테 가르치려구? 배우려고 할까?”

곡굉이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다만 몇 명만 시작해도 됩니다. 이틀에 하루 정비하는 날 검진을 연습하면 될 듯 합니다.”

“효과가 있을까?”

“단언컨대 지금 죽어가는 숫자를 반으로 줄일 수 있소.”

북리준의 단언에 곡굉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알겠네. 한번 사람들을 모아 봄세.”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곡굉의 손에 북리준이 무엇인가를 쥐어 주었다.

“이게 뭐야? 돈?”

“내가 여지껏 받은 돈인데 이걸로 밖에서 쓸만한 금창약과 지사제 등 응급처치 약을 구해 주시오.”

곡굉이 뭔가 말하려 하자 북리준이 손을 저어 막았다.

“나 돈이 그리 필요 없는 사람이오. 말이 금창약이지 벤 상처에 바르면 이틀 안에 썩어 나가는 것이 무슨 금창약이오?

밤새 곽란 토사를 한 놈이 후둘거리는 다리로 전장에 가는 것은 그냥 죽으러 가는 거지 그게 싸우러 가는 거요?

아무 말 말고 돈 되는 대로 사제 금창약과 응급약을 구해 주시오.”

곡굉이 슬쩍 전낭을 열어 보니 적잖은 돈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북리준을 쳐다 보았다.

“알겠네... 그리고, 고맙네...”

자신의 본명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곡굉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저녁 먹고 바로 시작 할 수 있게 준비 좀 해 주시오.”

저녁을 먹고 난 후 팔조 천막촌 뒤편 공터에 북리준이 자신의 검을 어깨에 기댄 채 바위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장!”

곡굉의 부름에 감았던 눈을 뜨자 약 스무명 정도의 낭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장의 말대로 검진에 관해 설명을 했더니 당장 배우겠다는 자들만 추려 왔네.”

십대 후반부터 사십대 초반 정도 까지 다양한 낭인들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자신들의 조장을 바라 보았다.

바위에서 뛰어 내린 북리준이 여지껏 파악한 나이와 무공 수위 등을 고려하여 나이와 경험이 많은 낭인 하나와 젊은 낭인 둘을 짝을 지어 주고는 그들의 앞에 섰다.

“조장! 조장이 하는 일은 내가 다 믿으니까 오긴 왔는데 지금 내 나이에도 소용이 있는 건가?”

세파에 찌들어 오십은 훨씬 넘어 보이는 사십대 초반의 낭인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를 믿고 따라 오면 절대 저 개 같은 전장에서 헛되이 죽어 나가지는 않게 할 것이오.”

굳은 표정의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조장의 일갈에 모두들 믿는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장 주위에 있으면 살 확률이 높아 항상 조장 주위에 우리 팔조 뿐이 아니라 다른 조의 놈들까지 모여 적군이 함부로 못 덤벼드는 효과가 있어 팔기군 측에서도 의아해 하고 있다네.

조만간 팔기군 측에서 조장 주위로 모이는 것을 금할 것 같으니 그 전에 각자 살 방도를 찾아야지.”

처음 듣는 곡굉의 말에 모여 있던 낭인들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 보았다.

“이제부터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것은 삼재검진이오.”

“내가 아는 그 삼재 검진? 그걸 왜 또 배워?”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어 그리 부르는 거고 일단 배워보면 그쪽이 아는 검진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그럼 팔조삼재검진이라고 하자고. 그냥 부르면 남들이 우습게 볼 거 잖아?”

곡굉이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북리준이 손을 내저었다.

“이름은 알아서 부르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 21. 조장이 되다. > 끝

ⓒ 편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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