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28화 (28/167)

< 28. 같이 가지요. >

“매일 새벽 까지 어디 가서 뭐 하다 오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가잖아? 혹시 예쁜 낭자?”

곡굉이 어슴프레 밝아져 오는 새벽에 자신의 군막 안으로 들어서던 북리준을 보고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형님은 잠도 없소? 그리고 남의 군막에는 무슨일로 왔소?”

생각해 보니 전장에서 습득한 전검과 살검을 남해무극칠절과 일월천뢰륜법에 녹이기 위한 혼자 만의 수련을 이어 온 지 일년이 다 되어 갔다.

“아, 내가 깜빡 잊고 어제 저녁에 이야기 한다는 게 그만.... 섬전창, 기억하지?”

“섬전창.... 아, 일년 전 우리 팔조에 잠깐 얼굴 비치고 간 낭인이잖아요. 눈빛이 바다 빛인 벽안인과 같이 왔던.”

“벽안독검이야. 어제 늦은 저녁에 자네를 찾아 왔는데 내가 깜빡 잊었지 뭐야. 조장을 꼭 봤으면 하던데?”

“섬전창과 벽안독검이? 무슨 일로?”

“그야 난 모르지. 직접 당사자를 만나 이야기 한다고 하니까. 아마 조금 있다 다시 올 거야. 오면 이리로 데려다 줄까?”

땀에 절은 몸을 씻고 건곤무극신공으로 거칠어진 기를 다듬을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줘요. 한 시진 정도 잘 꺼니까 그 이후에 봤으면 좋겠네.”

“그려, 좀 쉬라고. 조장이 탈 나면 여기 저기 죽어 넘어질 놈들이 한 둘이 아니니까.”

곡굉이 군막을 나선 지 약 한 시진 후!

“조장, 날세!”

곡굉의 목소리에 북리준이 감았던 눈을 떴다.

“들어오세요.”

곡굉이 군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 뒤를 섬전창과 벽안독검, 독안검이 차례로 들어섰다.

“오랜만이네.”

섬전창이 인사를 건네자 북리준이 웃는 낯으로 일행을 맞이했다.

“반갑네요. 쪽빛 눈동자도 오랜만이고.”

“하하, 참 말을 예쁘게 한단 말이야. 나도 반갑다, 친구!”

“대형, 저도 왔습니다.”

독안검이 고개를 숙이자 북리준이 손사래를 쳤다.

“좀 그러지 말라니까 그러네.”

군막 안 자그마한 탁자에 좌중의 인물들이 둘러 앉고 북리준이 군막 한켠에서 화주병 두어개를 탁자에 올려 놓았다.

“술은 낮술이 최고지요.”

“호오, 팔기에서 알면 난리 날텐데?”

벽안독검이 반가운 표정으로 화주병을 잡아갔다.

“우리 조장만 예외요. 우리 조장의 군막에는 술을 끊기지 않게 넣어 주고 있다우.”

생각지 않은 술판이 벌어지고 북리준이 섬전창과 벽안독검, 독안검, 곡굉의 잔을 채웠다.

“일단 한 잔씩들 쭉 하시지요.”

호쾌하게 잔을 들어 예를 표하고는 북리준이 잔을 비우자 나머지 인물들도 잔을 입에 가져갔다.

“크으, 좋네! 술 고프면 친구 한테 오면 되겠네.”

벽안독검이 싱글거리는 얼굴로 다시 잔을 채웠다.

“언제든지! 물론 책임질 일은 스스로 책임 진다는 전제 하에서지.”

“물론, 내가 철없는 십 대인 줄 아나?”

“나이만 먹고 머리는 십대 보다 못한 자가 많다는 말이지!”

곡굉이 북리준 대신 말을 받았다.

“그래,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발걸음을 하시었소? 파견 임무는 다 끝나신 거요?”

처음 이 곳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자신에게 잘 대해 주던 좋은 기억에 섬전창이 친근하게 다가 왔다.

“다 끝나고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네.”

“많이 바쁘시겠구려. 여기는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니 그리 재미 있지는 않네.”

북리준이 채운 잔을 다시 입에 가져갔다.

“그래? 혹시 새로운 일을 한번 해 보지 않겠나?”

섬전창의 은근한 어조의 말에 북리준이 잔을 내려 놓았다.

“용건이 그거 였소?”

“그렇다네. 이번에 청 황실의 동창과 금의위, 청황, 양황, 정백기의 고수들이 포함된 특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네.”

“어떤 임무인데?”

곡굉이 관심이 있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 밀었다.

“자네는 말고! 도조장을 누군가 콕 찝어서 꼭 이번 임무에 동행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네.”

“나를? 누가?”

북리준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섬전창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북 팽가의 소가주인 단혼참마도 팽무강이라는 자 일세. 혹시 그 자와 왕래가 있었는가?”

“팽무강? 난 모르겠는데?”

북리준이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면서 예전에 전장에서 자신을 주시하던 창과 도를 가진 무인과 다섯 조장들과 어울렸을 때 저 편 나무위에서 관망하던 네 명의 인물들이 떠올랐다.

“어디에서 소문을 들었는지 도조장의 솜씨가 좋다고 이번 임무에 꼭 포함시켜 달라고 했네. 도조장의 청부비는 팽가에서 후하게 쳐주겠다고 하더군.”

섬전창의 말에 벽안독검이 잔에 술을 채우며 말을 받았다.

“이거 대단히 좋은 기회야. 여기 백리 형님과 나 포함해서 약 열 명 정도가 청조에서 인정을 받은 낭인들이야. 보수도 후하고 대접도 나쁘지 않아 모든 낭인들이 선망하는 자리야.

이번 임무에서 제대로 역할을 한다면 다음 부터는 우리하고 같이 움직일 수 있을 거네.”

벽안독검 구백의 말에 독안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대형의 실력을 알았다면 그 자리에 내가 아닌 대형이 갔어야 하는데 벽안독검의 말대로 기회가 나쁘지 않습니다.”

“뭐야? 조장을 우리한테서 빼앗아 갈려는 거였어?”

곡굉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섬전창이 손을 들어 진정 시켰다.

“길어야 한 달 짜리 청부 일세. 청부가 끝나면 다시 이 곳으로 돌아 올거네.”

“요새 오삼계 군과의 전투가 뜸해진 것과 관련이 있는건가?”

불쑥 북리준이 던지는 질문에 섬전창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모르네. 솔직히 저 위에서 우리 같은 낭인들에게 자세한 것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네. 그저 그때 그때 당시에 내려지는 지시를 이행하고 나중에 돈을 받으면 그 뿐이네.”

이틀에 한번씩 벌어지던 전투가 요새 나흘 또는 닷새 간격으로 주기가 늘고 양쪽 다 상대방의 진지를 탈환하려는 의지 보다는 현상 유지의 의지가 감지되는 상황을 북리준이 찔러 보았다.

“얼마나 벌 수 있는데?”

“많이! 여기 보다는 훨씬 많이 줘.”

벽안독검이 불콰해진 얼굴로 북리준을 향해 잔을 들었다.

“부조장! 어차피 요새 전투가 뜸해지고 조원들의 검진 운용이 매끄러워졌으니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지?”

“난 안 갔으면 좋겠는데..... 조장이 하고 싶은 대로 해.”

곡굉이 퉁명스런 목소리를 내뱉고는 술잔을 들이켰다.

“같이 가지요. 대신 청부비와 제반 사항은 섬전창께서 챙겨 주시오.”

“알겠네. 내가 섭섭지 않게 이야기 하겠네.”

“하하, 친구하고 같이 가니 마음이 가벼워지네.”

“잘 부탁 한다, 친구!”

“걱정마시게. 나만 믿으라고.”

세 낭인이 군막을 나서고 단둘이 남게 되자 곡굉이 북리준의 잔을 채워 주었다.

“꼭 가야 되겠나?”

“솔직히 여기에서 있는 것 보다 내 개인적으로 도움이 될 듯 해서요. 한 달이면 금방 이니 형님한테 잘 부탁해요. 말썽이 생길 것 같으면 환영창이나 흑웅에게 이야기 하고요.”

“자네가 없다고 패악 부릴 놈들은 없지. 그저 자네가 없으면 불안해서 말이지.”

곡굉의 말에 북리준이 곡굉의 어깨를 툭 쳤다.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말이 있소. 사람은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또 만나는 거요.

형님과 함께 한 지가 일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 전에는 어찌 지냈소? 나 없이 말이오.”

“그래 말이다. 언제부터 너무 자네한테 기대고 있었나 보이. 그래, 잘 다녀오게.  그 동안 이 곳 걱정은 말고.”

****

군단이 주둔한 중앙의 거대한 천막 중 하나에 유공공과 곽대인이 정갈한 술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내일 출발인가?”

“그렇습니다. 만반의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유공공의 말에 곽대인이 고급스런 자기 술병을 들어 유공공의 잔을 채워 주었다.

“황태자 저하께는 황제폐하께서 주신 천금의 기회일세. 반드시 오삼계의 목을 가져와야 하네.”

“말해 무엇 합니까? 저희 동창과 금의위의 최고수들과 청황, 양황, 정백기와 하후세가, 모용세가, 진주언가, 하북팽가, 제갈세가의 정예들이 준비 되어 있습니다.

저쪽에야 오삼계의 친위대와 잡스런 사파 문파의 무인들이 다 일텐데 뭘 걱정을 하십니까?”

곽대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잔을 비웠다.

“자네 말이 맞지. 그런데 말일세..... 왜인지 모르겠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네.”

“모처럼 만의 외유시니까 그런가 봅니다. 단숨에 오삼계의 목을 따서 복귀하면 그 뿐. 오삼계의 목을 취하고 나면 이 지긋지긋한 반란도 일거에 진정 될테고요.”

곽대인이 느긋한 표정으로 안주를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그렇지? 그렇게 되어야지. 후우, 나도 이제 늙어가나 보이. 쓸데 없는 걱정이 늘어 가는 것을 보니 말이야.”

“하하하, 유공공! 앞으로 십년은 거뜬히 자리를 지키실 분이 엄살이 심하십니다.”

“네 놈은 이십년은 버틸 것 아니냐?”

“가 봐야 아는 거지요, 하하하!”

****

“내일은 볼 수 있는 거지, 그 낭인놈?”

“그렇다니까 그러네.”

제갈청하가 팽무강에게 얼굴을 들이밀고는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야, 저 미친년이 왠일로 사내 놈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러냐?”

“이 병신아! 사내 놈이 아니라 검진의 출처가 궁금해서 그런다.”

하후상의 이죽거림에 제갈청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나 저나 내일 일찍 출정을 한다니까 다들 가서 푹들 쉬라고. 각 세가의 정예들은 준비 다 끝냈지?”

“그래 봐야 각 세가별로 우리 빼고 둘, 셋 인데 뭔 준비? 듣자하니 저 쪽은 빼어난 고수들이 없다고 하던데 금방 끝내고 돌아 오자구.”

언철진의 말에 모용민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낭인들이 길을 잡나?”

“아마도. 호남 토박이인 섬전창과 파산권이 길을 잡을 예정이라더라.”

팽무강이 대답 한 후 자신의 군막에서 친우들을 몰아내었다.

“자자,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이만 하고 나가라. 나도 잠 좀 자야지.”

****

“내일인가?”

“그러네요.”

북리준과 곡굉이 자신의 군막에서 간단한 소채와 화주를 놓고 짧은 이별을 준비했다.

“첫째도 둘째도 네 놈 몸 챙겨. 쓸데없이 나서지 말고. 거기에는 너 보다 잘난 놈들이 부지기수니까 말이야.”

“하아, 잔소리 좀 그만해요. 벌써 백번째요.”

“나보다 훨씬 무공도 높고 젊은 네 놈이 왜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을꼬?”

“형님이나 방심하지 말고 몸사려요. 나중에 나하고 할 일이 많아요.”

“뭔 일?”

“나중에 때가 되면 이야기 해 줄테니까 괜히 팔 다리 하나 없어진 병신 꼴이 되어 나타나면 내가 죽도록 패 줄거요. 알겠소?”

“허허, 걱정말게. 동생이 나중에 무슨 일에 내가 필요 한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함께 함세.”

둘이 말없이 잔을 부딪고는 연신 술을 들이키는 모습을 휘영청 밝은 달빛이 군막 사이를 비집고 훔쳐 보고 있었다.

날이 밝아 중앙 군막 앞에 북리준을 포함한 낭인들 십여명과 검은 무복 차림의 동창, 금의위, 청황, 양황, 정백기와 무림세가의 정예들이 도열해 있었다.

중앙 군막이 걷히고 유공공과 곽대인이 일행들과 동일한 검은 무복 차림으로 앞장 선 황태자의 뒤에 섰다.

“준비는 다 되었소?”

“네, 바로 출발 하시면 되옵니다.”

유공공의 말에 황태자가 도열해 있는 군웅들을 일견 하고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오삼계의 목을 가지러 가지요!”

< 28. 같이 가지요. > 끝

ⓒ 편광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