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출정 >
“목적지는 어디인지요?”
“랑산 팔각채네.”
익히 안면이 익은 청황기 군관이 섬전창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얼마나 걸리겠나?”
섬전창과 함께 지도를 펼친 파산권이 입을 열었다.
“은밀함을 유지하며 접근 한다면 열흘은 족히 걸립니다.”
“출발하게. 따르겠네!”
군관이 말을 마치고 급히 뒤로 신형을 날렸다.
“열흘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군관의 보고에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팔각채가 뭐요?”
호남쪽은 초행인 북리준의 물음에 섬전창이 발걸음을 떼며 설명을 했다.
“랑산은 일찍이 요순시대의 순임금이 이름을 내려 주었을 만큼 아름다움이 빼어난 명산일세.
남쪽으로는 계림과 닿아있고 북쪽으로는 장가계와 마주보고 있고 물이 수려하고 산이 아름다우며 기이한 동굴과 빼어난 풍경으로 유명하다네.
예로부터 중원인들은 랑산의 첫관문인 천하제일항을 지나면 인간계가 아닌 신선계가 펼쳐진다고 표현할 정도로 수려한 산일세.”
북리준을 포함한 낭인들이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앞장 서자 그 뒤를 군웅들이 따르기 시작 했다.
“그런 천하제일항을 지나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곳이 팔각채네. 팔각형의 봉우리 여덟이 모여 있는데 이 봉우리들이 높이도 높이거니와 기묘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네.”
“그럼 그 여덟 개의 산봉우리 안에 우리의 목적지가 있다는 말이오?”
“그건 나도 모르지. 팔각채 근처에 당도 하면 다시 지시가 내려 올걸세.”
섬전창의 설명에 북리준이 고개를 주억 거렸다.
“반갑다. 난 사망도라 한다.”
“난 파산권. 호남 토박이지.”
“저쪽은 흑도부, 이쪽은 거령웅입니다, 대형!”
독안검이 북리준의 옆에서 저 뒤에서 어슬렁 거리며 움직이는 대부를 등에 맨 낭인과 덩치가 산만한 낭인을 가리켰다.
“낭인은 총 일곱이오?”
“아닐세, 앞서 척후로 나선 세 명이 있네. 소개는 나중에 해 주지.”
뒤를 흘낏 돌아보던 북리준의 눈에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 보는 흑색 무복에 같은 색의 면사를 한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뭐야?’
속으로 설마 자기가 아니겠지 라며 주위를 둘러 보다 하얀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을 콕 찍어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군.’
생전 처음 보는 여자의 어이없는 행동에 피식 웃음을 짓고는 다시 앞을 바라 보았다.
“미친년아! 저 놈이 너를 제대로 본 거 같다.”
하후상의 말에 제갈청하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꺼져!”
“저녁 때 까지 기다려라. 이동 중에 네 궁금증을 풀어 달라고 할 수 없잖아. 앞으로 열흘 정도 걸린다니 천천히 물어 보라구.”
“쟤 성깔을 모르고 얼굴만 들이밀어도 웬만한 사내 놈들은 다 넘어 올 걸?”
언철진의 말에 모용민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우리도 어릴 때부터 같이 본 사이가 아니었다면 저 년의 미모에 혹했을 거야.”
“청하가 괜히 무림 삼화 중 하나겠냐? 쟤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우리와 제갈세가 사람을 제외하고는 없을걸?”
“맞아, 조금만 제 비위를 거스르면 칼 들고 멱을 따겠다고 덤비는 미친년이 무슨 무림 삼화?”
하후상의 말에 모용민이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무림삼화가 아니라 어떤 여자 한테 춘화를 내밀어도 마찬가지 반응일꺼다, 병신아!”
“넌 저 년이 여자로 보이냐? 킁, 난 아니라고 본다.”
“목적지 도착 하기 전에 칼부림 하고 싶지 않으니까 저 병신새끼 입에 재갈 좀 물려라.”
티격태격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무림 후기지수들을 뒤에서 보던 황태자가 웃음을 지었다.
“저들은 참으로 친한가 보오.”
“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라고 합니다.”
자신과 연배가 비슷한 무림세가의 후기지수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에 황태가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마음 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부럽군.”
형제가 서른 다섯명에 언제 어디에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독수가 날아 올지 노심초사 하며 겨우 황태자의 위를 차지한 윤청이 고소를 지었다.
“힘을 가지시면 나중에 저런 사람들이 태자 저하의 주위에 생길 것입니다.”
곽대인의 말에 황태자가 조용히 읖조렸다.
“그래, 힘이 생기면 말이지....”
“일단 오삼계의 목을 가져 가시면 태자 저하의 위엄에 누구도 도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유공공의 말에 윤청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이 곳에서 쉬었으면 합니다.”
저 앞에 지평선이 붉게 물들어 갈 때 즈음 길잡이로 나섰던 섬전창이 뒤로 돌아와 군관에게 보고를 했다.
숲 속 안 너른 공터를 동창과 금의위의 위사들이 점검을 한 후 황태자가 숲 한 켠 바위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기다리시면 군막을 준비 하겠나이다.”
팔기에 속한 군관들이 능숙한 솜씨로 군막을 펴기 시작 하자 섬전창이 벽안독검을 바라 보았다.
“우리도 준비 하게.”
벽안독검과 파산권이 능숙한 솜씨로 말에 실어온 천막을 내려 낭인들이 묵을 군막을 만들어 내었다.
“앞으로 사흘 정도는 불을 피울 수 있습니다. 사흘 후 부터는 벽곡단과 건량으로 식사를 해야 합니다.”
섬전창의 말에 팔기의 군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녁을 지으라는 전령을 보냈다.
섬전창이 낭인들이 저녁을 준비 하는 곳으로 돌아 오니 모닥불 위에 솥 하나가 걸리고 그 안에 건량과 곡물 가루를 넣어 저녁을 준비 하고 있었다.
모닥불에 둘러 앉아 지니고 있는 그릇에 건량죽을 받아든 낭인들이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왔는가?”
처음 보는 낭인 셋이 식사를 하는 곳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섬전창이 입을 열었다.
“배고파 죽겠수. 밥이나 주슈.”
각이 진 얼굴에 대환도를 등에 비끄러맨 낭인이 자리를 잡았다.
“여기!”
벽안독검이 건네든 그릇을 받아든 세 낭인이 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별일 없지?”
“아무것도 없수. 어차피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로만 다녀야 하니 없을 수 밖에.”
섬전창의 말에 팔다리가 길쭉하고 뼈밖에 남지 않아 빼빼 마른 낭인이 툭 하니 말을 뱉었다.
“저 쪽은 처음 보는데?”
쇠로 만든 거대한 주판을 등에 맨 낭인이 북리준을 고개로 가리켰다.
“인사들 하게. 저쪽은 귀환도, 천수비도, 귀산자네. 여기는 도천학이라고 하네.”
“별호도 없는 애송이가 웬일로?”
팔다리가 길쭉한 천수비도가 죽을 입에 넣으며 이죽거렸다.
“대형은 네 놈이 씹을 정도로 만만한 분이 아니다. 입 닥치고 밥이나 처먹어!”
옆에 있던 독안검이 차가운 어조로 천수비도를 쏘아 보았다.
“호오, 독안검이 대형으로 모신다고? 저 젊은놈을?”
“휴우,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러네. 어찌 되었건 반갑소. 앞으로 잘 부탁 드리오.”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한 독안검이 대형이라부르자 세 낭인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뭐 숨겨진 한 수가 있나 보네. 앞으로 잘 해 보자구.”
귀산자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죽을 씹었다.
그 때 저 편에서 무림 후기지수 중 둘이 이쪽으로 다가 오는 것이 보였다.
“팽소가주, 제갈소저! 어서 오시오.”
섬전창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이하는 가운데 나머지 낭인들은 관심 없다는 듯 식사에 열중했다.
“도조장을 좀 볼 수 있겠소?”
팽무강의 말에 북리준이 죽을 먹다 고개를 들었다.
“나요?”
팽무강의 옆에서 제갈소저라 불리운 처자가 부담스런 눈빛을 보냈다.
“잠시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오. 난 팽무강이라 하오.”
자신을 이 임무에 추천해 준 사람이라는 말에 먹던 그릇을 내려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다녀 오겠소.”
“그러시게.”
낭인들이 식사를 하는 곳을 벗어나 약간은 한적한 바위 앞에 공간이 보였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이 좋겠다.”
팽무강의 말에 세 명이 튀어 나온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서로를 바라 보았다.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하셨소?”
북리준이 자신을 부담스런 눈길로 쳐다 보는 여자의 눈을 피해 팽무강을 바라 보았다.
“내가 그 쪽을 추천했다는 말은 들었습니까?”
“들었소이다. 나하고 일면식도 없는데 이렇게 추천해 주어 고맙소.”
“그쪽은 일면식이 없지만 난 두어번 그쪽을 보았소. 아주 인상 깊게 말이지.”
이미 전장에서 한번, 조장들과의 대결을 지켜 본 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내색을 하지 않은 채 북리준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디서 배웠어?”
갑자기 흑색 면사를 두른 여인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뭘 말이오?”
영문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북리준을 보며 팽무강이 고개를 저었다.
“야, 그렇게 다짜 고짜 물으면 누가 대답을 하냐? 좀 천천히 가자구.”
팽무강이 자신이 팔조가 전장에 투입 되었을 때 땅에 새겨진 팔조삼재검진을 그려 제갈청하에게 주었다는 설명을 하자 다시 제갈청하가 입을 열었다.
“그 검진, 어디서 배웠냐고?”
북리준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툭 하니 말을 뱉었다.
“얼굴도 안 보여 주는 사람한테 내가 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예상치 못한 북리준의 말에 팽무강과 제갈청하가 서로를 바라 보았다.
“얼굴 보여 주면 이야기 해 줄 거야?”
“일단 얼굴이나 보면서 이야기 합시다.”
제갈청하가 손을 들어 천천히 면사를 벗으려 하자 팽무강이 북리준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저 년 얼굴을 보면 다 놀라 자빠지던데.... 넌 어떤지 볼까?’
면사를 벗은 제갈청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 보던 북리준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예쁜 얼굴을 굳이 가릴 필요가 있나? 보기 좋네.”
“허어, 이건 예상 밖인데?”
대부분 제갈청하의 얼굴을 본 사내들의 경우 경호성을 터뜨리거나 음심이 동한 눈빛을 띄는 것을 보아온 팽무강이 심심한 표정으로 보기 좋다는 말을 하는 북리준을 보며 혀를 찼다.
“이 놈, 걸물이네. 자, 이제 얼굴을 보여 줬으니까 네 놈 보따리를 풀어봐. 그 검진, 어디서 배웠냐고?”
“어디서 배웠는지가 중요한 것이오? 이 검진의 요체를 알고 이야기 하는 것인지 궁금하군.”
“네 놈이 이 검진을 어디서 주워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감히 진법을 나하고 논하겠다는 거야?”
북리준의 말에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는 제갈청하를 보고 팽무강이 끼어 들었다.
“도조장! 이 아가씨는 제갈세가에 속해 있네. 섣불리 이야기 하다 칼 맞을 수도 있네.”
“제갈세가라....좋소. 한번 이야기 해 봅시다.”
“이런 발칙한 놈이... 좋다! 음양 오행이론에 대해 아는 대로 읊어 봐라. 어디서 대강 들은 대로 주절거리면 이 비도를 네 놈 입에 처박아 주마.”
어느새 양 손에 쥔 예리한 비도를 보며 북리준이 웃음을 지었다.
“오행은 목, 화, 토, 금, 수요. 이 오행은 서로 상생, 상극하는 관계로 상생하면 양이고 상극하면 음이라고 하오.
상생의 순서는 수생목,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상극의 순서는 수극화, 화극금, 목극토, 토극수라 하오.
이 음양은 태극을 설명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오.
더 나아가 진법을 구성 하는 요체 중 천, 지, 수, 화를 합쳐 사상이 나왔소.
이 사상에 중심인 땅이 합쳐져 오행이 나온 것이고....
위, 아래, 동, 서, 남, 북을 합쳐 육합이 나오고 음양과 오행을 합쳐 칠성이 나왔소,
천, 지, 수, 화와 바람, 번개, 산, 우물을 합쳐 팔괘가 나오고 이 팔괘에 중심을 찍으니 이는 구궁이라 하오.
오행을 다시 음양으로 나누어 천간이 나오고 육합을 음양으로 나누어 십이지지가 나오고 천간과 지지를 합쳐 비로소 육십갑자가 생성 되었다오.”
막힘 없이 잔잔한 어조로 입을 여는 북리준을 보고 팽무강의 눈이 커질대로 커졌다.
< 29. 출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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