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32화 (32/167)

< 32. 길이 있어 >

“이건 내일 우리가 갈 관제묘 지도가 아닌가?”

철면신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북리준을 쳐다 보았다.

“제갈낭자! 이 지도를 조금 자세히 보시겠소?”

북리준의 말에 제갈청하가 탁자에 펴 놓은 지도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 이게 왜....?”

“뭔데 그러느냐?”

철면신산이 놀라 입을 벌리고 있던 질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숙부님, 여기를 좀 보세요!”

제갈청하가 관제묘를 중심으로 사방 뻗어 있는 일곱 개의 소로를 가리켰다. 제갈청하의 손으로 가리키는 지도를 한 걸음 떨어져 살펴본 철면신산이 신음성을 내었다.

“으음, 진법이구나.”

“왜 이걸 놓쳤지요?”

철면신산과 제갈청하가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살피다 동시에 머리를 들었다.

“육합에 칠성의 묘리라.....”

“아닙니다. 육합에 팔괘의 묘리입니다. 이 곳의 길이 거의 없어져 보이지 않지만 분명 길이 나 있습니다,”

북리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빈 공간을 보고 제갈청하가 입을 열었다.

“직접 확인해 본 거야?”

“절벽 위에 올라 직접 보았소. 나무와 바위로 길이 거의 없어져 있었지만 분명 길이 있소.”

제갈청하가 옆에 있던 필묵을 들어 북리준이 가리킨 곳에 길을 내자 철면신산이 다시 침음성을 내뱉었다.

“유일한 생로로구나. 보이지 않는....”

“만일 그럴 일이 없겠지만.... 이 관제묘 주변의 진이 발동 된다면 이 곳으로 빠져 나와야 합니다. 나머지는 죽음 밖에 없습니다.”

“자네가 보기에 이 진법이 최근에 진설 된 것으로 보였나?”

철면신산이 자신과 질녀가 발견 못한 진법을 알려준 낭인에 대한 호감이 급속히 높아진 것을 느꼈다.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에 진설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반란군이 설치한 것은 아니겠구만. 진의 발동은 이 관제묘 안에서 할 수 있겠구만.”

철면신산이 지도 위에 펼쳐진 지세와 방위를 가늠하고는 관제묘를 손가락으로 쿡 찍었다.

“저도 그리 생각 합니다, 만일을 위해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정말 고맙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만에 하나를 준비 하는 것이 안 하는 것 보다 나은 법이지. 푹 쉬시게.”

북리준이 포권으로 예를 표한 후 군막을 나서자 지도에 코를 박고 있던 제갈청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웬 한숨이냐?”

“저 낭인의 공부가 질녀 보다 나은 듯 해서요.”

“후후, 이 무림에는 수 많은 기인이사가 숨어 있다. 저 도천학이라는 낭인도 그 중 하나 일 수도 있지.”

“기인이사라....”

제갈청하가 커다란 근육질 덩치에 잘생긴 얼굴의 도천학이라는 자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

“자네들은 무림세가쪽 사람들과 함께 남로에 배정 되었다. 이후 모든 명령은 세가쪽 철면신산의 명을 따르도록.”

팔기의 군관이 새벽 댓바람에 쳐들어와 제 할말만 툭 던지고 돌아갔다.

“어차피 돈 먹으러 온 거기는 하지만 참 정나미 떨어져요.”

“애초에 정이라는 게 있기는 했냐?”

벽안독검의 말에 귀산자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제부터 각자의 짐을 정리해 무림세가 쪽으로 이동한다. 이후 우리 직속상관은 제갈세가의 철면신산이다. 명심하도록!”

섬전창의 말에 낭인 열이 주섬 주섬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형님, 할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짐을 다 챙겨든 섬전창 옆에 도조장이 다가왔다.

“말하시게!”

“혹시 몰라서 미리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 안에 들어가서 천재지변에 준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무조건 저를 믿고 따라 주십시오.”

“천재지변에 준하는 일?”

“닥쳐 보면 제 말이 뭔 뜻인지 알 것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고는 자신의 짐을 챙긴 북리준의 뒷모습을 보고 벽안독검이 입을 열었다.

“뭐래요?”

“천재지변에 준하는 일이 발생하면 자기를 따라 달라는 구나.”

“아침부터 뭔 헛소리를.... 저 새끼 어제 제갈세가 막사에 가서 술 얻어 먹고 왔나 보네.”

“후후, 닥쳐 보면 안다니까 가 보자꾸나.”

낭인들이 자신들의 짐을 다 챙겨 들고 부피가 큰 군막과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한 켠에 잘 묶어 두었다.

무림세가의 정예들이 길을 나설 채비를 마치고 다가오는 낭인들을 맞이했다.

“철면신산 대협을 뵈오. 저희가 무림세가 분들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섬전창이 포권을 취하며 대표로 예를 표하자 철면신산이 맞포권을 하였다.

“낭인 여러분들을 환영하오. 임무가 완성 될 때 까지 잘 부탁 드리오.”

북리준과 눈을 맞춘 제갈청하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햐아, 저 미친년이 인사한 거 봤냐?”

하후상이 커다래진 눈으로 팽무강 옆에 붙어 소근거렸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죽겠네.”

모용민이 철면신산과 제갈청하가 도조장이라는 자에게 다가가 뭔가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청하가 알아서 말해 주겠지.”

“저 년이 그렇게 우리 한테 고분 고분하기를 기대 하는 거야? 하, 너 정신 나갔구나.”

팽무강의 말에 하후상이 자신의 머리에 손가락을 대고 빙글 돌렸다.

“남로쪽을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네.”

“다행이군요. 생로가 남로쪽으로 나 있으니까요.”

북리준의 말에 철면신산이 제갈청하와 눈을 맞추었다.

“하루의 시간이 있으니 자네와 함께 생로를 더듬어 보려 하네. 괜찮겠는가?”

“저는 문제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하지요.”

지괴 냉가려의 진법에 대한 유진을 무공 만큼 파고 들었던 북리준의 입장에서 처음 보는 진법을 살펴 볼 기회는 감사한 일이었다.

“임무가 끝나면 나중에 관제묘를 중심으로 한 진을 연구해 보려고 하네. 혹시 자네도 관심이 있다면 합류를 요청 하겠네.”

제갈세가의 인물들은 고대의 진법에 관한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린다는 말이 생각나 북리준이 웃음을 지었다.

“보수만 넉넉히 셈해 주시면 참가 하겠습니다.”

“하하하, 자네가 낭인이라는 것을 깜빡 잊었구만. 제갈세가가 그리 빈한한 집안이 아니니 문제 없을 걸세.”

“돈벌레....”

제갈청하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중얼 거렸다.

“돈이라는 것이 있으면 편리한 물건이더군. 그 쪽은 항상 풍족한 삶을 살아 물질적인 궁핍이 얼마나 힘든 건지 모르겠지. 돈벌레? 나한테는 비난으로 들리지 않아.”

북리준이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은 얼굴로 말을 마치고는 신형을 돌렸다.

“청하야, 왜 그리 무례하게 구는 것이냐? 저 청년이 우리 가문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이 숙부는 생각한다.”

“제 성격이 원래 이렇잖아요. 진법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돈부터 밝히는 것이 눈꼴 시어서요.”

“이 숙부는 저 청년이 점점 마음에 든다. 너무 막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피이, 도움은 개뿔....’

왜 그리 북리준에 대해 반감이 드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답답함에 제갈청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

동창과 금의위, 팔기 중 삼기의 고수들과 하후세가, 하북팽가, 모용세가, 진주언가, 제갈세가의 인물들, 낭인까지 포함 하여 백여명의 군웅들이 굳은 표정으로 관제묘를 향해 나아갔다.

“태자저하! 저하께서는 일단 저 관제묘 안에서 쉬고 계시면 저희가 고수들의 배치를 끝내겠나이다.”

곽대인의 말에 유공공과 황태자가 폐허로 변한 관제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전에 회의를 진행 한 대로 배정 받은 로에 은신해 주시기 바라오. 이 후 신호를 보내기 전 까지 자리를 지켜 주시고 전투가 시작 되면 최대한 빨리 장 내를 정리했으면 하오. 건투를 빌겠소.”

금의위 위장인 곽대인이 군웅들을 향해 포권을 취하자 군웅들이 맞포권으로 예를 표한 후 지정된 로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공공과 함께 폐허로 변해 버린 관제묘 안에 들어서니 약 오장 정도 되는 낡디 낡은 거대한 목조 관우상이 아래를 굽어 내려다 보고 있었다.

“관운장의 상은 그나마 멀쩡하구려.”

“아무리 관제묘가 폐허가 되었다고 관우상에 어느 누가 손을 대겠나이까?”

관우상 바로 아래 계단의 묵은 먼지를 털어낸 유공공이 비단 한 장을 품에서 꺼내어 깔아 놓았다.

“저하, 좌정하시지요!”

“고맙소.”

무너진 관제묘 정문 너머로 바삐 움직이는 군웅들의 모습이 보였다.

관제묘를 중심으로 남로에 배정을 받은 철면신산이 약 삼십여명의 군웅들을 인솔하여 이동을 시작했다.

“아마도 이 관제묘를 들어서는 대로인 남로와 서로의 사잇길로 적들이 들어설 것이다. 다행이 숲이 우거져 있고 바위들도 험난하니 우리가 은신할 공간이 많이 있을 듯 하다. 출발 시 지정한 낭인들은 각 세가와 함께 움직이시오.”

출발 전 철면신산이 열 명의 낭인을 각 두 명씩 조를 지어 각 세가에 배치를 했다.

“오늘 하루 은신처를 찾아 몸을 숨기고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하니 알아서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 하기 바란다.”

철면신산의 말에 포권을 취한 후기지수들과 휘하 고수들이 흩어져갔다.

“섬전창은 우리와 함께 움직이세. 도조장과 갈 곳이 있다네.”

“알겠습니다!”

철면신산과 제갈청하, 섬전창과 북리준이 길이 없는 숲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오, 진짜 길이 있었네.”

제갈청하가 울창한 숲 사이로 희미한 길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이 길 위에 나 있는 나무들과 주변 나무의 키 차이 때문에 위에서 보면 확연히 보이더군.”

“어차피 우리 넷이 몸을 숨길 곳을 찾으면 되니 시간이 될 때 이 길의 끝까지 한번 가보세.”

철면신산과 제갈청하가 길의 흔적을 찾아 숲으로 들어서자 뒤에 멀뚱하니 서 있던 섬전창이 북리준에게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도아우! 지금 뭐 하는 건가?”

“오전에 제가 드린 말씀 기억 하시지요?”

“천재지변에 준하는 일이 발생하면 자네를 따라 달라는 말?”

“만에 하나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갑자기 발생하면 이 길로 무조건 들어서세요.”

이해 할 수 없는 얼굴로 섬전창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네.”

저 앞에 철면신산과 제갈청하가 흔적만 남은 길의 경계에 군데 군데 부러진 나무를 박아 끊겨진 길을 이어갔다.

“지금 물어 보러 갈까?”

하후상이 은신할 장소를 정하고 친우들과 모였다.

“그 년이 제대로 설명해 주겠어? 차라리 도조장에게 물어 보는 것이 낫겠다.”

“문제는 그 미친 것하고 그 놈이 같이 있다는 거잖아.”

“새털 같이 많은 날 뭘 걱정하냐? 나중에 물어 보자구. 그 낭인 놈이 그 밤에 왜 찾아 왔는지 말이야.”

언철진의 말에 모용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이 말이 맞아. 지금은 임무에 집중하자구.”

“그래, 오삼계만 잡으면 끝나는 일이니까 최선을 다해 보자. 그럼 이틀 뒤에 보자구.”

팽무강이 팽가의 고수들이 은신해 있는 곳을 향해 신형을 돌리자 세 명의 친우들도 각 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

두 번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관제묘를 향하는 대로에 일단의 무리들이 들어섰다.

검은 피풍의와 검은 삿갓을 눌러쓴 말을 탄 칼 같은 예기를 풍기는 무인들의 등장에 은신해 있던 동창 위사의 얼굴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오삼계의 친위대인가? 왜 군복이 아닌 피풍의?’

검은 피풍의를 입은 무인 약 백여명이 꾸역 꾸역 관제묘 앞 너른 공간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난 후 그 뒤에 군장을 갖춘 인물 십여명이 마지막에 들어섰다.

관제묘 안에 유공공과 곽대인이 황태자를 호위 하며 무너진 정문 밖에 모여 있는 무인들을 예리한 눈으로 바라 보았다.

말을 탄 군장 하나가 무엇인가를 말 안장에서 풀러 들고는 관제묘 앞으로 나아와 무너진 정문 안으로 휙 던져 넣었다.

‘데구르르르’ 굴러간 무엇인가가 황태자와 유공공, 곽대인이 서 있는 계단 앞 까지 도달했다.

“이, 이건....”

유공공의 눈이 커질대로 커져 입을 벌린 채로 가리킨 것은 누군가의 잘린 수급이었다.

< 32. 길이 있어 > 끝

ⓒ 편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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