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천산파의 옛터 >
“여기서 얼마나 사셨는지요?”
성큼 거리는 큰 걸음으로 앞서 나가는 막대광의 등을 북리준이 바라 보았다.
“한 이십년 되었나?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독고놈을 찾아 왔다 이 곳이 좋아 눌러 앉았네.”
“독고총관님도 이 곳 출신이 아니신가 봅니다.”
“그걸 자네가 어찌 아누?”
“이십년 전에 친구분과 같이 이 곳에 오셨다고 방금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까?”
“응? 내가 그랬나?”
오른손에 든 술병을 연신 입으로 가져가던 막대광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나 저나 아무도 찾지 않는 천산파의 유적을 찾는 이는 오랜만일세. 무슨 연유라도 있는가?”
술병을 입에 문 채 넌지시 질문을 던지는 막대광의 눈이 잠깐 빛을 내었다.
“아시는 분의 부탁으로 천산파에 대해 알아 볼 것이 있어서요.”
“하긴 자네 나이에 천산파와 무엇을 연관시키기에는 너무 거리가 있지....”
‘아는 사람의 부탁이라.... 조금 더 파 봐야 겠구나.’
객잔을 나서 약 한 시진 정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런 두런 나누며 산을 오르다 막대광이 손가락으로 저 앞에 있는 무엇인가를 가리켰다.
“저게 천산파를 기리는 기념비의 잔재일세.”
안개가 옅게 낀 산허리 즈음에 반쯤 부서져 내린 비석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인간사 만큼 무상한 것이 있을까? 백년 전 마교의 침공에 무림과 일반인의 피가 강이 되어 흘러 넘칠 때 자신의 목숨과 가문의 모든 것을 던져내어 중원 무림을 구한 천산파가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니 말일세....”
“혹시 천산의 후예들이 살아 있지 않을까요?”
“엥, 백년 전에 마교 잔당의 복수행으로 완전 멸문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무슨 후예?”
술병을 입에 물고 자신의 앞에서 비석을 바라보는 북리준의 등을 매섭게 바라 보았다.
“왜 그들의 후예가 있다면 만나 보고 싶은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백년 전설의 후손인데요.”
“없는 후손을 무슨 수로 만나나? 그나 저나 천산파의 옛 터에 꼭 가볼건가?”
“네, 온김에 한번 보고 가고 싶군요.”
“그러시든가... 가세!”
반쯤 부서져 이끼가 두툼하게 낀 비석을 일견하고는 북리준이 앞장 선 막대광의 뒤를 따랐다.
“이곳일세.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만 백년 전에는 정말 볼 만했을 거네.”
막대광의 말대로 예전에 무엇인가가 서 있었던 흔적만이 남은 거대한 공터에 시선을 던졌다.
“정말 규모가 상당했군요.”
완만한 산비탈에 광활하게 펼쳐진 천산파의 옛 터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천괴님이 천산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한 번 도와주라 하셨는데 이렇게 폭망했을 줄이야...’
“한번 쭈욱 돌아 보고 오겠습니다. 어르신도 같이 하시겠습니까?”
“난 여기서 술이나 마시고 있을 테니 천천히 구경 하고 오게.”
거대한 공터의 초입 바위에 털썩 주저 앉아 품속에서 육포를 꺼내어 질겅 거리는 막대광을 두고 북리준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젊은 놈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공이 약해 보이지도 않고.... 무슨 목적으로 이런 황량한 천산파를 찾아 왔는고? 제발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놈을 만났는데 적이 아니기를....’
술병을 입에 물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도천학의 뒷모습에 시선을 던졌다.
‘하아, 정말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구나...’
쌍괴동에서 천괴와 지괴의 유진을 오년간 수련하고 나와 시간이 될 때 반드시 천산파를 돕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막상 멸문된 상황을 확인하니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거대한 공터 중간에 무너져 내린 듯한 건물의 폐허 더미 사이로 토끼와 뱀 들이 제 집 드나들 듯 지나가는 모습에 신형을 돌리려는 찰나 양 팔목에 찬 수투가 미세하게 ‘우우우웅’ 울기 시작했다.
‘응? 왜 쌍륜이....’
폐허로 변한 잔재 사이를 보니 아래로 내려 가는 계단의 흔적이 보였고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쌍륜의 울림이 더욱 심해져갔다.
‘이곳에 뭔가가 있구나....’
슬쩍 뒤를 돌아 본 후 아무도 없음을 확인 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형을 돌렸다.
‘저 노인네를 믿을 수가 없는데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되겠다. 나중에 혼자 와서 확인을 해 봐야지.’
계단 밑 폐허가 멀어질수록 잦아드는 팔의 떨림을 뒤로 하고 술병을 입에 물고 육포를 질겅 거리는 막대광에게로 다가갔다.
“어르신 말씀대로 볼 것 하나 남아있는 것이 없네요.”
“백년 전 멸문 당한 직전 천산파의 유진이 남아있을 거라는 괴소문이 돌아 한 오십년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다 헤집고 갔으니 당연하지. 끄응, 다 보았으면 내려 가서 저녁이나 먹세. 물론 자네가 내겠지?”
“하하하, 당연 하지요. 이렇게 안내 까지 해 주셨는데 당연히 사례도 해야지요.”
“요새 싸가지 없는 젊은이만 보아 오다 자네 같은 된사람을 만나니 기분이 좋구만. 가세!”
막대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산객잔으로 발걸음 옮기는 중에 북리준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 하셨던 것 중에 천산파의 유진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그거? 그냥 카더라 라는 헛소문이지. 마교 잔당의 복수행에 생존자가 전무한 상황에 중인들이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간다는데 그 유명한 천산파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 않느냐는 누군가의 말에 귀가 솔깃해서 잊을만 하면 저 잿더미를 쑤시고 다니는 놈들이 어마 어마 했다는군.”
“그런데 결국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는 모양이군요.”
“마교 놈들이 좀 독종인가? 아예 건물 서까래까지 다 헤집고 기름을 쏟아 부어 불을 붙힌 탓에 천산파의 불이 꺼지는 데 한 달이 걸렸다고 하더군. 그 와중에 뭐가 남아 있겠나? 마교 놈들이 다 가지고 갔겠지...”
해가 어둑 해질 무렵 객잔에 도착한 북리준과 막대광이 잠시 후 일층에서 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조 후 방으로 올라갔다.
‘뭔가가 있어. 지괴님의 쌍륜이 울리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나 저나 이 객잔이 요상스럽네. 막대광과 독고우라는 노인이 예사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왜 이런 외진 곳에 몸을 담고 있는 걸까?’
북리준이 몸을 씻고 일층에 내려 오니 막대광과 독고우가 먼저 자리를 잡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서오게, 도소협!”
“먼저 시작 하셨군요.”
“손님도 없는데 도소협 같은 호구가 나타났으니 제대로 뜯어 먹어야지. 클클클!”
“이놈이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을 내뱉는구나.”
독고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친우를 쏘아 보았다.
“하하하, 제대로 호구 노릇 한번 하겠습니다.”
막대광의 농담에 북리준이 호탕하게 웃으며 화답을 했다.
“내가 말했잖아. 보통 젊은이가 아니라구. 아주 마음에 들어.”
회과육과 마의상수, 궁보계정 등이 차려진 상에 황주를 곁들여 두어순배 술이 돌았다.
“주방장님이 사천 분이신가 봅니다.”
“허허, 어찌 아누?”
“사천 요리인 회과육, 궁보계정을 이렇게 맛깔나게 내시는 것을 보고 알았지요.”
북리준의 말에 독고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받았다.
“내가 아는 후배님을 영입 했다네. 사천에서 꽤나 유명한 숙수 였지.”
“숙수로만 유명하지는 않았잖아?”
“미친놈! 그 입 다물고 술이나 처먹어라.”
두 노인의 시덥잖은 농과 웃음으로 화기애애한 저녁을 즐기는 중에 누군가가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어, 기룡이가 왔네.”
객잔문을 바라 보고 앉아 있던 막대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왔구나. 별일 없었느냐?”
곤륜 문하 무인의 도복에 검을 든 각진 얼굴의 젊은이가 두 노인에게 다가왔다.
“숙부님들, 그 동안 무탈 하셨는지요?”
“우리야 맨날 똑같지 뭐... 그나 저나 제대로 무인이 되어 돌아왔구나.”
그 때 계단으로 오십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와 면사로 얼굴을 가린 호리한 체형의 여인이 내려왔다.
“잘난 곤륜의 속가제자 납시었군.”
“아버지.... 그만하세요.”
면사를 쓴 여인의 차분한 말에 객잔주인이 도경명이 고개를 팩 돌렸다.
“누님, 저 왔어요.”
“그래, 고생했다. 일단 올라 오너라.”
곤륜 무인 복장의 젊은이가 계단에 서 있는 자신의 아비를 무시한 채 성큼 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저 망할 놈의 자식이....”
“아버지....”
“히유... 알겠다.”
“주인장, 이리로 와서 인사나 하시유.”
막대광의 말에 도경명이 고개를 흔들어 찡그린 인상을 털어내고는 탁자로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 곳 천산객잔을 운영하는 도경명이라 하오.”
“반갑습니다. 도천학이라 합니다.”
“오랜만에 동성분을 만나니 반갑구려.”
자신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은 도경명을 유심히 바라 보던 북리준의 얼굴에 찰나지간 놀란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 기운은.....!’
천괴의 장난스런 말들 중에 어떻게 천산파의 인물을 알 수 있는지 만나 보면 알 것이라는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건곤무극신공의 기운이야. 분명한....’
순간 멈칫하는 도천학을 보며 예리한 눈빛을 빛내던 독고우가 도경명의 잔을 채워주었다.
“저 망할 놈의 자식이 이제 대 놓고 애비를 무시하네요.”
“나중에 이야기 하세. 손님이 계시니...”
“아, 죄송합니다.”
“저는 상관 없습니다. 불편하시면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에이, 자네가 빠지면 무슨 재미가 있나? 둘이 이야기 하던가 말던가 그냥 나랑 술이나 먹세.”
자신의 동생인 도기룡이 곤륜의 속가 제자로 들어 간지 두 해 만에 돌아온 것을 도교교가 축하해 주었다.
“기룡아, 축하한다!”
“다 누님 덕분이지 뭐.... 아버지는 여전하시네.”
“네가 이해해라. 가문의 중한 짐을 지고 계시잖니?”
“치이, 백년 전에 멸문지화를 당해 쥐뿔도 남은 것이 없는 가문의 중한 짐은....개뿔!”
“천산의 후예가 곤륜 문하로 들어가는 것을 극구 반대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거라.”
“누님,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수? 백년을 기다려도 안 오는 개파조사의 전인이 있기는 한거유?”
자신의 동생인 도기룡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곤륜의 속가제자로 들어간 이유를 알고 있는 도교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난 가문의 심공 하나만 붙들고 이 객잔에서 버텨 온 지 구십년이오. 천산파의 무공을 아는 선조들이 다 죽어 유일하게 남은 심공만 부여 잡고 객잔 주인 노릇 한 지가 삼대가 넘어 가는데 너무 꿈이 긴 거 잖아?”
“아버지의 유일한 희망이신데 기다려야지.”
“그냥 이대로 오지도 않을 사람을 기다리다 저렇게 늙어 죽고 싶지 않아. 난 곤륜의 문인이 되어 내 꿈을 펼칠거야.”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의 부딪힘을 이십년 가까이 지켜본 도교교의 가슴 한 켠이 아릿해져갔다.
“좀 쉬고 싶어. 내일 이야기 합시다.”
동생의 축객령에 도교교가 교구를 일으켰다.
“그래, 내일 보자!”
시끌벅적 취기에 오른 아버지의 목소리에 도교교가 일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하하, 그래, 전장에 몸을 담았다는 말이군.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 생각했네.”
도경명이 앞에 앉은 젊은이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연신 막대광과 술잔을 부딪쳤다.
“막노야, 우리 기룡이가 말입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어요. 저 놈의 자식이.....”
“아버지, 취하셨어요. 손님께 폐가 되겠네요.”
어느새 도경명의 옆으로 다가온 면사 차림의 여인을 바라 본 북리준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버님이 많이 취하신 듯 하니 소저께서 모셨으면 합니다.”
거구의 호남형 얼굴의 사내가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두 분 노야께서는 여흥을 더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도교교가 일어 나지 않으려는 아버지를 일으켜 세워 계단으로 향했다.
“도아우, 오늘 못 먹은 술은 내일 마시세나. 어디 가면 안되네!”
“네, 알겠습니다.”
두 부녀가 자리를 떠난 후 너른 객잔에 세 사람만이 남아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 44. 천산파의 옛터 > 끝
ⓒ 편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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