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47화 (47/167)

< 47. 뭔가 있다! >

고요한 가운데 소진배검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북리준을 향해 곤륜의 기본보법인 금안행공을 밟으며 곤륜에서 하사받은 검이 세 가닥으로 나뉘어 뻗어나갔다.

‘고작 삼재검으로 곤륜의 검을 받아 내겠다고?’

북리준의 검이 고요한 가운데 무겁게 나탁탐해로 뻗어오는 검을 쳐내기가 무섭게 신형이 푹 꺼지며 묘한 각도로 돌려친 후 자세 그대로 신형을 쭉 펴며 마지막 검을 흘려 내었다.

“허허, 나탁탐해에 이은 회두망월, 한망충소를 저리 붙여 쓸 수 있구나.”

예리하기 그지 없는 소청검법의 검로가 단순한 삼재검에 막혀 버리자 도기룡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우연일 꺼야....’

“하아앗”

도기룡의 두 발이 크게 원을 그리며 쭉쭉 북리준과의 거리를 단축하더니 북리준의 전신의 찢어 내기 위해 검무를 추기 시작 했다.

“하아, 저리 단순한 동작으로.... 아름답구나!”

막대광이 간결한 손놀림으로 힘들이지 않고 도기룡의 검을 흘려 내는 북리준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도기룡의 검이 상대의 몸을 난자 하기 위해 거침없는 직선을 때로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 들었으나 목검을 든 북리준의 삼재검로에 족족 가로막혔다.

“이이이익, 야아아아앗”

자신의 기를 검에 밀어 넣고 도기룡이 검을 날리자 오른발을 축으로 돌아 날아오는 검을 흘려 낸 후 자기 힘에 겨워 앞으로 밀려 나간 도기룡의 목에 대붕전시의 자세를 취한 북리준의 목검이 대어졌다.

“이, 이게.... 믿을 수가 없다....”

자신이 삼년 넘게 밤낮 없이 수련한 곤륜의 검이 길거리에서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삼재검에 졌다는 사실에 도기룡이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실망할 필요 없다. 넌 그 검을 얼마나 수련 하였는가?”

“사, 삼년을 밤낮없이 수련했소.....”

“단순히 수련만 한 연습용 검술이 어찌 목숨을 내걸고 휘두른 전검을 이기겠느냐? 난 삼재검만으로 오년을 지옥같은 전장에서 버텼다.

왜구들의 시퍼런 검날에 베이며 적들의 목을 베고 전우의 시체를 밟고 왜구놈들의 팔다리를 잘랐다.”

북리준이 목검을 땅에 꽂아 넣은 후 자신의 상의를 탈의 했다.

“허어....”

막대광과 독고우가 북리준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상처를 보며 탄식을 터뜨렸다.

“살수의 검과 낭인의 검을 인정 못한다? 검은 내 앞에 적을 죽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네가 약하면 상대방이 살수이건 낭인이건 넌 그 검에 죽는 나약한 놈이 되는 것이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살수건 낭인이건 삼재검이건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워야 한다.

이 도산검림의 강호에서 살아남는자가 강한 것이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뽑아든 목검이 진득한 살기를 가득 머금고 망연히 서 있는 도기룡의 목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주, 죽는다....’

자신의 목 한치 앞에 멈춘 목검에 넘실 거리는 살기에 도기룡이 저도 모르게 침을 흘리며 주저 앉았다.

“검을 장난으로 잡지 마라. 죽기를 각오하고 잡아야 하는 것이 검이다!”

신형을 돌려 자신의 옷을 주워들고 객잔 안으로 돌아가는 북리준의 모습을 독고우와 막대광이 감탄어린 눈으로 바라 보았다.

“저 놈, 제대로 된 놈이네...”

“기룡이에게 전화위복이 되기를 바래야지.”

“저, 저는 정말 북리봉공이 마지막에 내 아들을 죽이려는 줄 알았습니다.”

도경명이 더듬거리며 저 앞에 정신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는 기룡을 바라 보았다.

“살검이 뭔지를 아는 놈이야....”

독고우가 눈을 빛내며 객잔 안으로 들어서는 북리준의 뒷모습을 쳐다 보았다.

****

넋이 나간 도기룡을 자신의 방에 넣어주고 착잡한 표정으로 일층으로 내려온 도경명을 북리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심하게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닐세... 저 놈이 너무 세상을 물렁하게 보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이 기회에 자신이 생각하던 세상을 깨내고 나왔으면 좋겠네.”

도경명이 북리준의 앞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하지만 팔을 잠깐 내어 주시지요.”

“응? 무슨 일로....”

“도문주님의 건곤무극신공의 화후를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도경명이 흔쾌히 자신의 오른팔을 내밀자 북리준이 맥문을 잡고 조심스럽게 진기를 흘려 내었다.

“으흠... 기가 정순합니다. 다른 심공이나 무공을 수련한 적이 없으신지요?”

“없네. 어릴 때부터 오로지 건곤무극신공만 익혔네. 이 심법에 맞는 무공이 없어 나와 교교는 심법만을 수련했다네.”

약 사십년 정도의 정순한 내공을 소유한 도경명의 맑은 얼굴을 보며 북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낭자는 나중에 한번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 때 막대광이 무엇인가를 잔뜩 짊어지고는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새벽에 갈 준비는 다 끝냈네.”

기름을 잘 먹인 횃불 대여섯개와 굵고 얇은 밧줄을 종류별로 묶은 꾸러미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북리봉공....”

“말씀하시지요.”

도경명이 약간 머뭇 거리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내 딸인 교교도 같이 갔으면 하네. 교교는 내 뜻에 따라 다른 심법이나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았다네.”

“두 분이 괜찮으시다면 저는 상관 없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독고우과 막대광이 도경명에게 눈길을 주었다.

“교교가 간다면 우리가 보호하겠네.”

독고우의 말에 막대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근한 어조로 북리준을 바라 보았다.

“이봐, 북리아우! 아직 교교 얼굴을 못 봤지?”

“네, 항상 면사를 쓰고 계셔서.....”

일반 아녀자들이 쓰는 얇은 면사가 아닌 흑색의 두터운, 거의 두건으로 불려도 무방한 면사를 쓴 도교교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면 깜짝 놀랄걸세. 왜 교교가 그리 두터운 면사를 쓰고 있는지 말일세, 크크크!”

“그럴까요?”

문득 백봉이라 불리우며 웬만한 사내 뺨치는 괄괄한 성격을 지닌 제갈청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겠지?’

“장래를 약속한 처자가 있는가?”

북리준의 얼굴에 떠오른 아련한 표정에 독고우가 툭 질문을 던졌다.

“하하하, 아닙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방에 처박혀 넋을 잃고 있는 도기룡을 뺀 일행들이 도문주의 방에 모였다.

“곤오는 혹시 몰라 이곳을 지키라 했네.”

흑색 무복을 입은 독고우와 막대광이 밖으로 나설 채비를 하는 찰나 흑색경장에 두건을 쓴 도교교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준비 다 되었어요.”

“교교야, 우리가 가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단다. 꼭 독고숙부님과 막숙부님 옆에 붙어 있거라.”

도문주가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 보았다.

“지괴님이 후인들을 위해 안배를 해 놓으신 곳이라면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출발 하시지요.”

북리준이 횃불과 밧줄 무더기를 막대광과 함께 나누어 지고 객잔을 나섰다.

교교한 달빛이 살포시 내려 앉아 있는 천산파의 옛 터에 도착한 도경명의 눈에 감회가 어렸다.

“참 오랜만에 왔구나. 나도 많이 지쳤었지...”

조사의 후인을 기다리는 열망이 뜨거웠을 때 마음을 다 잡기 위해 수시로 올라 왔던 천산파의 옛터에 발걸음을 끊은지 어언 오년이 넘어가는 것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해 합니다. 이백년의 기다림이 짧을 수는 없지요....”

북리준이 발걸음을 옮기며 도경명을 위로했다.

‘우우우우웅’

희미한 터만 남은 곳 중앙에 다 무너져 버린 돌계단에 가까이 다가가자 양 팔목의 륜들이 울기 시작했다.

“이 밑에 뭔가 있습니다.”

북리준이 자신이 들고 있는 횃불로 무너져 버린 계단 밑을 가리켰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북리준이 일행들을 남겨 놓은 채 횃불을 들고 무너진 계단 밑으로 뛰어 내렸다.

‘우우우우우우웅’

두 팔에 전해 지는 진동이 심해지는 것을 느끼며 횃불을 들고 폐허로 변해 버린 터를 세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양팔에 전해지는 잔떨림이 굵게 느껴지는 지점에 서서 횃불로 바닥을 살피다 북리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찾았다!’

이끼와 잡풀이 잔뜩 끼어 있는 바위를 손을 헤집어 횃불을 가져다 대고 보니 그 바위 위에 일륜과 월륜 모양의 홈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들 이리로 내려 오시지요!”

북리준의 말에 일행들이 조심스럽게 뒤로 내려섰다.

“이 곳 인 것 같습니다.”

북리준이 횃불을 가져다 댄 곳에 난 구멍을 보고 도경명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 일월쌍륜의 모양이군.”

“다들 조금만 뒤로 물러나 주시지요. 이 곳에 일월쌍륜을 넣어 보겠습니다.”

북리준이 자신의 횃불을 뒤에 서 있던 막대광에게 넘긴 후 일월수갑안에 내장 되어 있던 일월쌍륜을 양 손에 나눠 쥐었다.

‘딸깍 딸까깍’

일륜과 월륜을 두 개의 홈에 정확히 맞아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쿠르르르르릉’ 일행들이 서 있는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저, 저기....”

일륜과 월륜의 구멍이 있는 거대한 바위가 몸서리를 치더니 서서히 뒤로 밀려 나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웅’

바위가 밀려난 동공 안에서 탁한 공기가 후욱 뿜어져 나오고 북리준이 횃불을 받아 밑을 비추었다.

“계단이네요.”

장정 서넛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설 정도의 넓이에 횃불이 비추이는 범위를 넘어 저 아래 검디 검은 어둠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북리준이 일월쌍륜을 회수한 후 횃불을 들고 조심스럽게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잠깐만 기다리시지요.”

일행들이 계단 안으로 내려서자 북리준이 밀려난 바위 밑을 이리 저리 더듬다 무엇인가를 잡아 당기자 ‘그르르르릉’ 바위가 원래 위치로 돌아가 입구가 닫혔다.

다섯 사람이 든 횃불이 저만치 잠겨 있는 어둠을 쫒아 내며 길을 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내려가는 거지?”

약 반시진 정도를 구불 구불한 계단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던 도경명이 가쁜숨을 내쉬었다.

“어, 점점 넓어지는데?”

막대광의 말대로 일정한 너비의 계단이 점점 넓어지는 듯 하더니 드디어 기나긴 계단의 길이 끝이 났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막대광이 횃불을 높이 들어 주위를 살피니 삼방이 꽉 막힌 자그마한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도 다 털어갔나 보구나....”

도문주가 맥 빠진 얼굴로 빈 동공을 바라보았다.

“잠깐만.... 모두들 뒤로 물러나 주세요.”

북리준이 일행들을 뒤로 물리고 예리한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기의 흐름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진법입니다!”

“진법?”

북리준의 말에 막대광이 안광을 돋우어 앞을 바라 보았다.

“미친놈아, 안광을 돋운다고 진법이 보이냐?”

독고우의 핀잔에 막대광이 자신의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혹시나 해서 봤다....”

“다행이 지괴님의 진법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주시지요.”

“오오, 그럼 도둑놈들이 다 털어간 것이 아니네.”

“우리가 내려온 계단과 벽을 보았을 때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지 상당히 오래 되었다. 정말 지선님의 진법이라면 저 너머에 뭔가가 남아 있을 수도 있겠어.”

독고우의 말에 도경명과 막대광이 기대에 찬 눈으로 여기 저기를 살피는 북리준의 뒷모습에 시선을 던졌다.

“알았다. 공공무환진을 펼쳐 놓으셨구나!”

“정말 저 조그만 공간에 진법을 펼친 게 맞나?”

막대광의 말에 북리준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번 경험해 보시겠습니까? 사람을 해하는 진이 아니니까요.”

“그래? 난 여지껏 진을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네.”

북리준이 밧줄 하나를 들어 막대광의 허리에 묶고는 자신의 양손에 밧줄을 그러잡았다.

“도저히 못 견디시겠으면 소리 치세요. 꺼내 드리겠습니다.”

“체면이 있지 내가 소리를 지르겠나? 점잖게 이야기 하면 꺼내 주게.”

잠시 후!

“으아아아아악 꺼내 줘.... 제발.... 아아아악!”

자신들이 빤히 보이는 자그마한 공터에 누워 몸부림을 치며 눈물 콧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친우를 보며 독고우가 혀를 찼다.

“못난 놈!”

< 47. 뭔가 있다! > 끝

ⓒ 편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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