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52화 (52/167)

< 52. 북경으로 >

북리준에게 호되게 당한 육도평이 정신을 차리자 마자 응급처치를 받고는 줄행랑 치듯 말 한 마리를 빌려 객잔을 빠져 나갔다.

“후환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겠네. 어떤 간 큰 인간이 황궁 동창 영반에게 따지러 가겠냐?”

막대광이 연신 술잔을 비우며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만에 하나 정말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도교교의 조심스런 말에 북리준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현 동창 영반인 유공공와 연이 있습니다. 확인을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호오, 동창의 영반을 안단 말이야? 북리 아우랑 다니면 심심하지는 않겠네 그려.”

막대광의 말에 독고우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여 곤륜에 도공자가 돌아갔을 때 그 인간이 뭔가를 물어오면 황궁으로 찾아 오라는 말만 전하면 됩니다.”

“몇 대 주워 맞은 일로 북경 자금성에 동창 영반을 찾을 일은 없을 듯 하네. 고맙네.”

도문주가 포권을 취하며 감사를 표했다.

“남도 아닌데 이 정도는 별일 아닙니다.”

그 때 방 구석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기룡을 향해 도문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망할놈의 새끼, 당장 이리 안 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선 도기룡이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아버지 앞으로 나섰다.

“인사 드리거라. 천지쌍선 조사님들의 진전을 이은 북리봉공이다. 배분상으로 태사조 정도 되시나 일단은 봉공으로 칭하기로 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도기룡이라 합니다.”

육사형을 두드려 팰 때 전신에서 피어 올린 살기에 아직도 정신이 얼얼한 도기룡이 조심스럽게 포권을 취했다.

“하나 묻겠다.”

북리준의 말에 도기룡이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을 했다.

“말씀 하시지요.”

“천산의 무공이 돌아 왔음에도 곤륜의 문하를 고집할 것인가?”

“......”

머리 속이 복잡해진 도기룡이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자 도문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곤륜에 가서 뼈를 묻어라, 망할새끼야!”

“아버지, 조금 시간을 주시지요. 아직 혼란 스러울 것입니다.”

따뜻한 누이의 말에 도기룡의 눈에서 울컥 눈물이 배어 나왔다.

“제가 잘 말하겠습니다. 말씀들 나누고 계세요.”

도교교가 두 눈이 벌개진 채 안간힘을 쓰고 울지 않으려는 동생의 손을 잡고 방을 빠져 나갔다.

“에잉, 심약한 놈....”

도문주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놈의 행태에 혀를 찼다.

“도문주님이 조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젊은 혈기에 언제 올지 모르는 전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심정이 저는 이해가 갑니다.”

“북리봉공의 말이 옳네. 자네도 솔직히 거의 포기하고 있었지 않는가?”

독고우의 말에 도경명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맞습니다. 저도 지쳐 포기하려는데 아들놈이 오죽 하겠습니까? 그래도 조금만 더 참았으면 하는 것이 제 마음이었고 이렇게 북리봉공이 오고나니 더 후회가 되는군요.”

도경명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독고우가 도문주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제가 떠나기 전 까지 도문주님과 도낭자의 성취를 확인한다면 천산파의 품으로 다시 돌아 올 것입니다. 열흘 동안 두 분께 무공을 사사 할 때 도공자도 참관을 시키십시오.”

“정말 고맙네. 저 놈만 돌아 온다면 정말 여한이 없을 것이네.”

****

날이 밝기가 무섭게 아버지의 성화로 마지못해 천산파의 옛터로 끌려가는 도기룡이 죽을상을 지었다.

‘폐허가 된 곳에 뭐가 있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이리 난리람?’

자신의 누이가 백색 무복 차림에 처음 보는 검을 지닌 채 웃는 얼굴로 앞장서는 아버지를 따라 나서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일 가 보면 안다고 하더니 뭐가 있기는 있나 보네.’

모처럼 만의 두 자식과의 나들이에 기분이 좋아진 도경명이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도문주님이 도낭자와 공자를 데리고 동부에 다녀 오십시오. 가서 쌍괴님의 유진을 보여 주고 두 분이 지금껏 익히신 천산파의 검을 원 없이 보여 주고 오십시오.

제가 가서 백날 설명하는 것 보다 두 분이 직접 보여 주시는 것이 효과가 클 것입니다.’

북리봉공이 전날 자신의 방으로 돌아 가기전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참 속이 깊은 청년이야. 그러니 조사님들의 진전을 이었겠지...’

천산동부 앞에 도착하여 입구를 열고 계단을 타고 들어가 공공무환진을 통과하여 세 개의 동부를 본 도기룡의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 이게 진정 꿈이 아니겠지요?”

동굴 하나의 양 벽면을 가득 채운 금괴와 은괴를 본 도기룡의 놀람이 자신의 아버지와 누이의 검에서 풀려 나온 고절한 검술에 극에 달했다.

“이, 이것이 처, 천산의 검입니까?”

자신의 얕은 식견으로도 두 사람이 펼친 천산검결과 천산십팔류, 천산파천삼검이 곤륜의 장로급이 펼친 그 어떤 고절한 검술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두 분의 내공이.....”

“북리봉공의 도움으로 공청석유를 취했느니라.”

“그럼 저도....?”

“미안하지만 공청석유가 두 명 분 밖에는 없었어.....”

‘아, 조금만 참았더라면 나한테 공청석유가 돌아 왔을텐데...’

도기룡이 쓰린 속을 부여 잡고 애써 태연하게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할 수 없지요.”

“그 대신 네놈에게도 줄 것이 있다.”

도경명이 동부 안에 들어갔다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나왔다.

“이건?”

한 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검을 건네 받으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충천검!”

검병에 용사비등한 필체로 음각되어 있는 글을 읽고는 아버지에게 눈을 돌렸다.

“검을 뽑아 보거라.”

‘스르르릉’ 천지를 갈라낼 듯한 예기를 가득 품은 검신이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자 도기룡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하아아...”

“네 놈이 이 검을 가지고 곤륜으로 가던 이 곳에 남던 선택은 네 놈이 하는 것이다. 이 곳의 모든 것은 천산파의 재건을 위해 쓰여질 것이기에 네 놈이 곤륜으로 돌아 간다면 그 검 외에는 가져갈 것이 없느니라.”

도교교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갈등 서린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지금으로부터 일주일의 시간을 줄 터이니 네 놈의 거취를 정하거라.”

자신의 아버지와 누이의 늠름해진 어깨를 천산을 내려오며 처연히 쳐다보던 도기룡이 객잔에 들어오자 마자 자신의 방에 틀어 박혔다.

****

“이제 부터는 두 분이 매일 검술을 연마하시고 참오하며 서로 북돋우신다면 천산파의 재건이 눈 앞에 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늘 떠나지만 마음만은 이 곳에 놓고 가겠습니다. 부디 천산파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시오.

훗날 제 개인적인 일이 마무리 된다면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북리준이 마지막으로 천산의 검을 가다듬어 주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북리봉공! 여기 일은 걱정 하지 말고 봉공의 복수행에 전심을 쏟아 주시게. 최대한 이 곳의 일이 마무리 된다면 나와 교교가 한팔 거들러 가겠네.”

“꼭 가겠습니다!”

교교가 면사를 벗은 찬란한 미모에서 눈부신 미소가 피어 올랐다.

“너무 무리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돌아 오게 되면 쌍괴님의 모든 무공의 정화가 녹아 있는 남해무극칠절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동부를 나와 객잔으로 돌아온 세 사람을 맞이하는 독고우, 막대광, 곤오, 도기룡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가시는가?”

독고우의 말에 북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곳의 일은 두 분만 믿고 떠나겠습니다.”

“이봐, 무관을 여는 일만 마무리 되면 나하고 독고놈은 득달같이 자네에게 달려 갈거니까 어디로 가면 되는지 기별이나 해 놓으라구.”

섭섭함을 가득 채운 얼굴로 입을 여는 막대광을 향해 북리준이 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부디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이미 떠나기 위한 채비를 다 마치고 마지막으로 동부에 들렀다 온 북리준이 처음 타고 이 곳에 도착한 마차에 다시 올랐다.

“진짜 여비는 필요 없는가?”

도경명이 꼭 주고 싶다는 전표를 한사코 거절한 북리준이 독고우와 막대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분이 떠나실 때 넉넉하게 챙겨 주시면 됩니다.”

그 때 말없이 작별인사를 건네던 사람들을 보고 있던 도기룡이 주춤 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결심은 하셨는가?”

“네, 천산파의 재건에 힘을 보태기로 하였습니다.”

“잘되었군. 나중에 내가 돌아 오게 된다면 제대로 천산파의 무공을 전수해 주겠네. 그동안 아버지와 누이를 잘 보필해 주기 바라네.”

마차에 올라 뒤로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들고는 북리준이 천산객잔을 벗어나는 모습을 일행들이 한정없이 바라 보았다.

‘꼭 찾아 뵙겠습니다....’

도교교가 면사 안에 붉디 붉은 입술을 깨물며 다짐에 다짐을 하고 있었다.

****

“언제라고?”

팽무강과 그 친구들이 북경성 내 손꼽히는 주루인 북경제일루에 모여 앉았다.

“내일 정도면 북경에 도착 할 것이라 연통을 받았네.”

“하하, 일년 조금 안되었나? 빨리 보고 싶구만.”

하후상이 정말 기대 된다는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미친년은 안 온대?”

“왔다, 병신아!”

하후상의 뒤통수에 손바닥이 작렬하며 눈에 별빛이 번쩍거렸다.

“어, 왔냐?”

“큭큭큭, 참 불가사의한 놈이란 말이야.”

모용민이 뒤통수를 제대로 맞고도 반가운 표정을 짓는 하후상을 보고 키득거렸다.

“그런데 왜 북경에서 보자는 거지? 신강에서 온다면 하북의 팽가에 먼저 들르면 되는 거 아닌가?”

언철진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리자 팽무강이 입을 열었다.

“황궁에 볼 일이 있는 모양이던데? 이 곳에서 우리는 만나고 다음 날 유공공과 곽대인을 만나게 다리를 놓아 달라고 했어.”

“유공공과 곽대인? 왜지?”

“그때 우리가 목숨 걸고 탈출 할 때 나눈 이야기 생각나냐?”

“뭐? 탈출 하면 구운 오리하고 화주 먹자는 거?”

하후상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일행들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아니면 말고지 뭐!”

“저 병신 입에 재갈 물려라.”

“야야, 북경에서 그런 쪽팔린 짓은 하지 말자구.”

팽무강이 오랜만에 만나는 친우들과의 좋은 분위기를 음미하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도조장의 그 무위와 해박함을 가지고 왜 낭인을 하고 있느냐에 대해 이야기 했잖아. 어쩌면 조정에 죄를 짓고 도망다니는 것 일 수도 있다고...”

“아, 기억났다. 도조장이 그런 거라면 우리가 돕자고 했지.”

하후상의 말에 일행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도조장이 스스로 정면 돌파를 하려고 하나 생각이 들더라구. 어찌되었건 내일 우리를 먼저 보기로 했으니까 다들 이 자리에 같은 시각에 보자구.”

****

“들어오시게!”

유공공의 집무실 문이 열리며 곽대인이 예의 쾌활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소원했습니다. 무탈 하셨는지요?”

“그리 내 안부가 궁금했으면 직접 넘어와 확인 하면 되지.... 망할 놈 말만 번지르르하구나.”

“하하, 그나저나 무슨 일로 소장을 부르셨는지요?”

금의위 위장인 곽대인이 유공공의 앞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도조장이 조만간 북경에 들어온다고 기별을 받았다.”

“아, 드디어 들어오는군요. 언제 볼 수 있는지요?”

“무림 후기지수들과 먼저 만남을 가진 후 우리에게 온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내일 모레 정도?”

곽대인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도천학이라는 이름으로 역모나 반란, 그에 준하는 관련 자료를 찾아 보았으나 없었습니다.”

“나도 알아 보았는데 그 쪽이랑은 연관이 없는 듯 하다.”

“그럼 왜 우리를 보자는 걸까요?”

“우리 둘 다 그 자에게 목숨빚을 졌고 황송하게도 황태자 전하도 그 자를 기다리고 있으니 무리한 요구가 아니면 들어 주는 방향으로 하자.”

“제가 보기에 도조장이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사람은 절대 아니지요. 그럴 사람이었다면 그 지옥에서 우리를 위해 그리 희생을 했겠습니까?”

곽대인이 찻잔을 내려 놓으며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안다. 그러니 도조장이 요구하는 것을 웬만하면 수락하자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도 연통을 넣으셨는지요?”

“진작에 알고 계시네. 도조장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시다네.”

< 52. 북경으로 > 끝

ⓒ 편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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