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친구를 얻다
북경제일루 앞마당에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말과 마차에서 북리준이 내려섰다.
“어이쿠, 멀리서 오셨나 봅니다요. 말과 마차는 제게 주시지요!”
십대 초반 정도의 어린 점소이가 냉큼 나와 말의 고삐를 끌고 객잔 뒤편으로 향하자 그 뒤에 서 있던 점소이가 앞으로 나섰다.
“어서오십시오. 혼자 오셨는지요?”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분을.....?”
그 때 북경제일루에 삼층에서 누군가 고개를 빼들고 버럭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조장, 여기야 여기!”
“야야, 창피하다.”
“저 병신을 누가 말리겠냐?”
북리준이 어깨를 으쓱 하며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하후상에게 화답을 했다.
“저쪽이라네요.”
“아, 팽무강 공자님의 손님이셨군요. 이리로...”
점소이가 먼지를 뒤집어 쓴 사내의 몰골을 보고 크게 돈이 안 될 것으로 생각한 자신을 자책하며 삼층으로 손님을 모셨다.
“하하하하, 도조장! 정말 반갑다.”
하후상이 달려 오듯 다가와 북리준을 껴안았다.
“반갑소이다, 하후공자!”
“어서 어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
하후상의 손에 이끌려 북경의 전망이 한 눈에 보이는 너른 자리에 자리를 잡고 있던 팽무강, 언철진, 모용민, 제갈청하가 들어 왔다.
“모두들 안녕 하셨는지요?”
북리준의 포권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맞포권으로 예를 차렸다.
“여기 우리가 말한 음식과 술들을 내 주시게.”
팽무강의 말에 뒤에 있던 점소이가 날 듯이 계단을 타고 내려 간 뒤 양손에 미주가효를 든 종업원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너무 과한 듯 한데?”
“이것 보다 열 배는 더 차리고 싶은데 공간이 협소해서 이러니 이해 바랍니다.”
팽무강의 말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자자, 우리의 목숨을 구해 준 도조장을 위해 건배 하자구.”
하후상이 탁자 다리가 부러질 듯 차려 놓은 음식을 앞에 두고 건배를 청했다.
“도조장의 무궁한 전도를 위해!”
팽무강의 건배사에 모두들 호쾌하게 잔을 비워 내었다.
“제갈숙부님은 세가의 일 때문에 다른 지방에 계셔서 부득히 참석을 못했어. 꼭 미안하다고 전해 달래.”
제갈청하의 말에 북리준이 웃음을 지으며 잔을 채웠다.
“다음에 보면 되지요.”
“그나 저나 우리 연배가 다 비슷한데 서로 말을 놓는 게 어떨까? 그러지요, 저러지요, 하십시다는 아닌 것 같아.”
하후상의 말에 모용민이 손바닥을 철썩 맞부딪쳤다.
“저 미련한 놈이 일년에 한 두 번 쓸만한 말을 하는데 오늘이 그날 인가 보다. 난 찬성!”
“나도 좋아.”
“도조장의 의견도 들어봐야지.”
언철진도 손을 들어 찬성을 표하자 팽무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나야 손해 볼 일이 아니지만....”
“그럼 된 거네. 우리는 더더욱 손해가 아니니까.”
제갈청하가 냉큼 북리준의 말을 잘라 먹었다.
“그럼 이제부터 친구로 지내자구. 천학, 다시 보게 되어 반갑다.”
팽무강이 포문을 열자 나머지 친구들이 서로 인사를 건넸다.
“천학, 이름 좋네. 나는 상이라고 불러줘.”
“나도 환영해. 철진이라고 하면 돼.”
“나는 민!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우리랑 상의 하기.”
“난 청하, 반갑고 정말 고마워!”
제갈청하의 말에 북리준이 무슨 말이냐는 의문을 얼굴에 떠올렸다.
“호북에 돌아 올 때 네가 준 단혼사가 아니었으면 마교도의 손에 죽음을 당했을거야.”
“아, 그거.... 요긴하게 썼다면 다행이네.”
북리준의 말에 하후상이 얼콰해진 얼굴로 잔을 내밀었다.
“그 뿐이 아니라니까. 네가 황태자 전하께 건넨 폭우이화통이 우리 전체를 살렸다구. 네가 우리를 두 번이나 살린 거야.”
하후상의 말에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온 팽무강이 입을 열었다.
“천학! 우리가 뭐 도와 줄 일이 없나? 비록 우리가 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네게 도움이 될 일이 분명 있을꺼야.”
다들 한 두 번씩 북리준에게 목숨 빚을 진 사이라 팽무강의 말에 말똥해진 눈으로 북리준을 바라 보았다.
“어려워 말고 이야기 해 봐. 막말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못 한다고 말할테니까.”
제갈청하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북리준을 재촉했다.
“네가 오기 전에 우리끼리 한 이야기가 있다. 혹여 네 가문이 역모에 연루되어 곤란한 상황이라도 우리가 도움이 될 일이라면 무조건 돕기로 말이다.”
팽무강의 말에 북리준이 자신의 잔을 치켜 들었다.
“이 잔을 쭉 들이키고 내 이야기를 할게.”
북리준의 말에 자신의 앞에 있는 잔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은 친구들이 눈을 빛내며 시선을 모았다.
“일단 내 본명은 도천학이 아니야. 그리고, 너희들이 오해한 부분이 있는데 역모나 뭐 그런 것 때문에 본명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앞서 나가지 말자고.”
자신들의 탁자 외에는 다른 손님이 없는 것을 확인한 북리준을 보고 눈치 빠른 모용민이 입을 열었다.
“여기는 오늘 우리가 전체를 빌렸어. 마음 놓고 이야기 해도 돼.”
고개를 끄덕인 북리준이 자신이 열다섯의 나이에 왜구의 습격으로 고아가 되어 해남검단에 끌려가 오년간 왜구들과의 아귀 다툼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 검에 그리 살기가 넘실 거렸구나.”
“삼재검과 남해검법만으로 오년을 살아 버텼다니.... 대단하네.”
“쟤 몸에 상처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 한번 나갈 때 마다 온전히 돌아 온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
저마다 북리준이 해남검단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주억 거렸다.
이 후 남해검문에 줄을 안 서려는 자신의 아집때문에 자신의 피붙이 같은 청룡대원들을 사지에 내몰고 남해검문의 현재 높은 자리에 있는 누군가와 마사히로라는 왜구 수장과의 더러운 음모에 관한 이야기에 하후상이 콧김을 내뿜었다.
“이런 개새끼들이 다 있나? 당장 가서 내 창으로 머리를 꿰뚫어 줘야겠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직까지 내 본명을 못 밝히는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언제고 때가 되어서 네 맘이 편해질 때 알려 줘도 돼.”
제갈청하가 북리준의 어두운 과거를 듣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하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도 될까?”
팽무강이 잔을 들어 비우고는 북리준에게 내밀었다.
“말해보게!”
“자네의 무공 말일세.... 삼재검과 남해검문의 입문 무공인 해천단공과 남해검법 이상의 뭔가가 있는 듯 한데...? 삼재검과 남해검법으로 이렇게 강해질 수 있는가?”
팽무강의 의문에 모두들 동의한다는 듯 북리준의 입을 바라 보았다.
“그 때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기연을 만났어. 오년간 전대 고수의 무공을 닦고 나온거지.”
더 이상 깊은 이야기를 피하는 듯한 모습에 팽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이 많네.... 하긴 시간이 필요 하겠지.”
북리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누른 제갈청하가 잔을 들었다.
“나중에 꼭 네 본명과 나머지 이야기를 해 줘.”
“그렇게 할게.”
북리준의 어두웠던 과거를 듣고 난 후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하후상이 짐짓 큰 소리로 북리준을 불렀다.
“우리가 뭐 도와 줄 거 없어? 그 이야기 하려다 딴 길로 이야기가 샛어.”
“있어. 너희들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오늘 자리를 마련한거야.”
“그렇지? 말해 봐.”
하후상의 재촉에 일행들이 다시 흩어졌던 시선을 모았다.
“내일 황궁에 들어가는 것은 알고 있지?”
“응, 무강이한테 이야기 들었어.”
언철진이 상체를 곧게 펴고는 말을 받았다.
“내가 복수하려는 상대가 만만치 않아. 제일 먼저는 마사히로를 위시한 남해바다에 기생하는 왜구들이고 두 번째는 남해검문 전체가 될 수도 있어.”
“으흠, 정말 만만치 않네...”
작금 남해 바다에 창궐하는 왜구 문제는 청조의 아주 골치 아픈 문제 중 하나였다.
삼번의 난이 겨우 마무리 되어 한숨 돌리고 난 청조에서 왜구를 손대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에 제갈청하가 침음성을 내었다.
“내 생각은 이래. 난 내일 황궁에 들러 청조의 골치덩어리인 왜구토벌을 위한 해결책을 제시 하려고 해.”
“어떻게?”
“내가 아까 이야기한 해남검단 기억해?”
“엉, 왜구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친지나 자녀들로 구성된..... 음, 칼받이 부대?”
솔직담백한 하후상의 말에 친우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상이의 말이 맞아. 칼받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난 그 해남검단을 내게 달라고 요청하려고 해.”
“엥? 그런 허접한 검단을 왜....”
하후상의 의문에 동감 한다는 표정으로 친우들이 북리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검단이 아니고 정말 왜구를 씹어 삼킬 수 있는 검단을 만들 거야. 물론 거기에 황실의 힘을 빌려야 겠지.”
“거기에 우리 힘을 보태달라?”
언철진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너희들의 가문은 청조에 협조적인 무림세가이고 왜구토벌에 가담하겠다고 하면 가문에서도 반대를 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물론 너희들이 힘을 보태준다면 황궁에 정식으로 요청을 넣을 계획이다.”
“우리를 제외한 다른 계획을 듣고 싶군.”
모용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질문을 던졌다.
“자세한 것은 다 말 못 하겠지만 일단 동창과 금의위의 고수들을 빌릴 생각이다. 그리고 전대 고수 두 분이 합류할 예정이고 이번 호남행에 함께 했던 낭인들도 불러 모을 생각이다.
자금은 충분히 준비 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검단의 고기 방패 취급을 받고 있는 검단 소속 무인들을 왜구들이 두려워 할 무인으로 바꿀 계획이 있다.”
북리준의 말에 팽무강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왜구를 토벌하는 데에 우리 가문의 힘을 쓰는 것은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왜구 토벌 후 남해검문과의 관계이다.”
“무강이의 말이 맞아. 우리 모용가도 왜구토벌을 위해 세가무인들을 파견해 주는 것은 허락을 받을 수 있지만 남해검문과 검을 맞대게 된다면 문제가 달라지지.”
모용민이 팽무강의 말에 동의를 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그럼 왜구 토벌까지만이라도 함께 해 줄 수 있는지 확인해 줘. 내일 황궁에 들어가 이야기를 꺼내면 분명 너희들의 가문에 파견 요청이 갈테니까.”
“내일 황궁에 들어가 왜구와 남해검문의 유착에 대해 이야기 할 거야?”
제갈청하가 무슨 생각이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아니, 황궁에는 왜구 토벌에 관해서만 이야기 할 거야. 분명 황궁에도 남해검문의 선이 닿아 있는 자들이 있을테니 괜히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필요는 없지.”
“나랑 생각이 같네. 그래, 일단 왜구 토벌에 대한 기치를 세운다면 황궁에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좌중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불편한 침묵이 탁자 위에 내려 앉자 하후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이, 천학이 아니었으면 우리 여기서 이렇게 술 못 먹었다. 단순하게 생각해. 일단 은혜를 갚고 나중에 생각하자. 뭐 그리 복잡하게 살아?”
하후상의 벌개진 얼굴로 흥분하며 입을 열자 팽무강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상이 말이 정답이네. 너무 깊게 가지 말자. 어차피 가문이 추구하는 길과 동떨어진 일이 아닌데 먼저 앞서 고민할 필요 없지!”
“저 병신이 일년에 두 번 옳은 말을 하는데 오늘 다 했다. 앞으로 저 병신에게 들을 말이 안 남았네.”
제갈청하의 말에 하후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도 두 번 이상 쓸만한 말을 할거니까 세어봐.”
“아이구, 어련하시겠어.... 내가 꼭 세겠습니다요, 네네!”
모용민이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