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54화 (54/167)

54. 검단을 내어 주시오.

다음 날 팽가를 위시한 친우들과 밤 늦게 까지 자리를 함께한 북리준이 미리 준비한 흑색의 무복을 정갈하게 갈아입고 북경제일루를 나섰다.

“많이 기다렸나?”

북경제일루 객잔 앞에 팽무강이 환한 얼굴로 북리준을 맞이했다.

“아니, 나도 방금 왔다네. 바로 출발하지.”

자금성에 처음 가 보는 북리준을 위해 팽무강이 안내를 자처하여 함께 움직이기로 하였다.

팽무강이 준비한 말에 올라탄 북리준이 팽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말을 몰아 나갔다.

“천학이, 왜 천자가 사시는 궁의 이름이 자금성 인지 아는가?”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설명해 주게.”

“자금성을 글자 그대로 풀어내면 ‘자주색의 금지된 성’ 이라네. 이 중 자(紫)는 천구의 북쪽을 가리키는 자미원에서 유래된 것인데 옛날 사람들은 천제가 자미원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네.

북극성을 포함한 별자리인 자미원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지.”

‘따각 따각’ 두 마리 말이 머리를 나란히 한 채 북경의 중심에 위치한 자금성으로 방향을 잡아 나갔다.

“역대 중국 모든 나라의 황제는 자신을 하늘의 아들인 천자로 칭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자금성의 자(紫)는 황궁이 세상의 중심 이라는 뜻이라네.”

“으흠, 세상의 중심이라... 그런 금(禁)은 무엇을 금한다는 것인가?”

북리준이 팽무강의 말을 다시 한번 중얼거리고는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황제가 기거하는 곳인 만큼 그 누구도 허락없이는 출입할 수 없다는 뜻이지.”

“그렇군. 그런데, 이 자금성은 명나라 영락제가 만든 궁성인데 청나라에서 그대로 사용하는 연유가 있는가? 본래 중국 역사상 패망한 나라의 황궁을 허물고 다시 짓는 것이 사실상의 관습이 아닌가?”

팽무강이 주위를 스윽 둘러 보더니 북리준의 말 옆에 자신의 말을 바짝 붙였다.

“원래는 자네 말이 맞지. 현실적으로 청나라는 살아남은 남명정권과의 싸움에 급급하여 요 근래에 겨우 안정을 찾았다네.

만일 명나라의 궁궐을 부수고 새 궁궐을 짓는다고 한족을 착취한다는 불만이 나오면 겨우 찾은 안정을 흔들 위험이 크다는 것과 대 놓고 명나라의 정통을 계승자임을 자처 했기에 자금성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네.”

“정설? 그럼 다른 설도 있다는 건가?”

“후후, 난 이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네. 이 자금성은 영락제가 14년 동안 십만명이 넘는 장인과 백만명이상의 노동력을 때려 박아 운남성의 남목, 쑤저우 등지에서 생산한 금전, 기와의 도토는 안휘성 태평에서 공수 하는 등등 최고급 자재를 이용해서 만든 걸작 중에 걸작이지.

즉, 괜히 손 대봐야 망치면 망쳤지 더 나아질 것이 없다고 판단한거네. 어찌보면 아주 실용적인 생각이지.”

팽무강과 북리준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황성의 남쪽에 위치한 웅장한 천안문을 지나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에 다다랐다.

“난 여기까지 일세. 이제부터 자네 혼자 입궁해야 한다네.”

팽무강이 자금성의 수문위장에게 품 속에서 동창의 직인 선명한 첩지를 꺼내어 내밀었다.

“귀인은 나를 따르시오!”

“나중에 객잔에서 다시 보세.”

팽무강의 인사를 뒤로 하고 자금성 안으로 들어선 북리준이 휘황찬란한 자금성 안을 이리 저리 휘돌아 화려한 전각 앞에 섰다.

“유공공님의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東輯事厰(동집사창)이라 편액이 날카로운 기세를 한껏 뿜어내는 전각 앞에 동창의 위사가 북리준을 이끌었다.

“오호, 어서오시게!”

유공공과 금의위 위장인 곽대인이 집무실에 들어서는 북리준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분 대인을 뵙습니다. 그동안 별래무양하셨는지요?”

“도조장 덕에 이렇게 무탈하게 잘 있네.”

곽대인이 예의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신다.”

유공공이 희미한 반가움을 얼굴에 띄우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태자 전하! 유공공, 곽대인 입실이옵니다.”

“들라하라!”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고 중앙에 앉아 있는 황태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서오시게!”

황태자가 얼굴 한가득 반가움을 담은 채 북리준을 맞이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천민이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이리로 앉거라.”

중앙에 위치한 검은색 자단목 탁자 위에 휘황찬란한 미주가효가 한껏 차려져 있고 황태자의 좌우에 유공공과 곽대인이, 정면에 북리준이 자리를 잡았다.

“정녕 그대를 보고 싶었노라.”

금박이 둘러진 자기병을 들어 친히 북리준을 잔을 채운 황태자가 건배를 권했다.

“우리의 목숨을 구해준 도천학 조장을 위해 건배를 하세.”

유공공과 곽대인이 기분좋은 웃음을 지으며 잔을 비우고 북리준도 고개를 돌린 채 잔을 비워내었다.

유공공과 곽대인도 직접 북리준의 잔을 채우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술잔이 비워져갔다.

“그래, 우리의 은인에게 무엇을 보답할지 말해 보시게.”

황태자가 유공공과 곽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보시게. 유공공님과 내가 자네의 거취에 대해 상의를 해 보았다네.”

“말씀하시지요. 경청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미 윤허를 하셨네. 선택은 자네 몫일세.”

유공공이 넌지시 먼저 입을 열었다.

“동창에 자네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네. 종사품직의 첨형관으로 일단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떤가? 이백여 동창 위사 중 단 네 명 뿐인 보직일세. 자네와 함께 대 청조의 앞날을 밝혀 보려고 하네.”

“또 하나의 선택지가 있다네. 바로 금의위 내 정사품직인 진무사로 자네를 영입하고 싶네. 삼백여 금의위 무사 중 단 두 명 뿐인 자리일세.”

곽대인 또한 얼굴에 잔뜩 기대감을 품은 채 북리준의 입을 쳐다 보았다.

“본좌는 도조장이 동창을 선택하건 금의위를 선택하건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겠네.”

황태자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유공공과 곽대인이 서로를 경쟁적인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하해와 같으신 은혜, 일단 감사드립니다!”

황태자의 눈에서 도조장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두 분이 제안해 주신 자리, 제게 너무 분에 넘치는 자리이옵니다.”

“받을 만한 사람이기에 주려는 것이니 너무 겸양하지 마시게.”

곽대인의 말에 유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창과 금의위에서 청조정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것입니다. 한데 꼭 그 방법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응?”

“어어?”

당연히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에 고민을 할 줄 알았던 도천학이라는 낭인이 두 자리를 완곡하게 거절하는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허허, 우리 도조장이 다른 바라는 것이 있었구나. 말해 보거라.”

황태자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억지로 숨기며 유공공과 곽대인이 서로를 바라 보았다.

“혹시 왜구에 대한 근심이 조정에 있지 않으신지요?”

“왜구?”

난데없이 튀어나온 단어에 유공공이 반문을 했다.

“남해 바다에 창궐하고 있는 왜구들로 인해 광동, 광서, 해남 지역의 민초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 청조의 골칫거리인 왜구를 퇴치하는 선봉에 서기를 원하나이다.”

“웬 뜬금없이 왜구가 거기서 나오는가?”

곽대인도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북리준을 바라 보았다.

“제 본명은 도천학이 아닙니다. 정식으로 황태자 전하께 인사 드리겠습니다. 천민은 해남검단 청룡대주 였던 북리준이라 하옵니다.”

“북리준이었구나. 그런데 공공, 해남검단이 무엇이오?”

갑작스런 황태자의 질문에 당황스런 표정을 짓던 유공공을 대신하여 북리준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공공께서는 알지 못하시는 저 멀리 남해에서 왜구만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검단의 이름이옵니다.”

북리준이 해남검단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자신이 열다섯에 왜구들의 습격에 고아가 된 이야기, 해남검단에서의 오 년 동안의 사투, 마사히로라는 왜구의 대장과 맞붙어 치명상을 입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기연을 만난 일을 적당히 한 식경에 걸쳐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한식경에 걸친 기나긴 이야기를 넋을 잃고 듣고 있던 황태자가 탄식을 내뱉었다.

“허어, 북리조장이 고생이 많았구나.”

“왜구들에게 원수를 갚으려면 실전이 절실히 필요하여 전장에 몸을 담게 되었습니다.”

“그 결심이 우리를 이리 계속 볼 수 있게 한 것이구나.”

북리준의 살아온 이야기에 가슴 한켠이 묵직해진 곽대인이 입을 열었다.

“그럼 도조, 아니군, 북리조장이 원하는 바는 무엇이오?”

“해남검단을 제게 주시면 대 청조에서 손 대기 힘들어 하시는 왜구들을 남해 바다에서 거둬 내겠습니다.”

황태자도 남해바다의 왜구 창궐이 청조에 아주 곤란한 일 중 하나임을 익히 아는지라 북리준의 제안이 아주 기꺼웠다.

“두 분 생각은 어떠신지요? 동창과 금의위에 몸 담고 청조를 위해 일하는 것도 좋지만 내 생각으로 북리조장의 제안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황태자의 말에 난데없는 북리준의 제안을 곱씹던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맞추었다.

“북리조장의 제안, 저희 대 청조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작금 삼번의 난을 겨우 진압한 상태에서 왜구 문제는 솔직히 손을 댈 엄두를 못 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유공공의 말을 금의위장이 바로 받았다.

“북리조장이 왜구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이는 황실의 홍복이며 민초들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북리준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데 말이오. 그 해남검단이 왜구의 살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제대로 된 훈련도 못 받고 칼받이로 나서는 형편이라면 북리조장에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예리한 황태자의 질문에 유공공과 곽대인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북리조장, 자네의 생각을 말해 보시게.”

유공공의 말에 북리준이 고개를 들어 대답을 했다.

“현재 해남검단은 남해검문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청조에서 왜구를 막는 조건으로 군자금이 지급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네, 무림 세력인 남해검문의 지리적 위치가 왜구의 활동범위와 맞닿아 있기에 그리 운용하고 있다네.”

곽대인의 부연 설명에 북리준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해남검단을 남해검문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독립된 군대로 인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남해검문에 내려지던 군자금도 해남검단에 직접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건 문제가 없을 듯 합니다. 그 정도로 되겠는가?”

곽대인이 유공공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재차 질문을 던졌다.

“동창과 금의위의 고수분들을 일정기간 파견 해 주십사 요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북리준의 말에 유공공과 곽대인이 서로 눈을 다시 마주쳤다.

“일정기간이라면 어느 정도이며 얼마 정도의 지원을 이야기 함인가?”

유공공의 질문에 북리준이 거침없이 대답을 했다.

“해남검단이 독립 한 후 삼년 안에 왜구들을 없애려고 합니다. 동창의 경우 종오품직에 집사 열, 정육품직에 군관 열, 금의위의 경우 종오품직의 부천호 열, 종육품직의 백호 열명 정도를 요청 드립니다.”

“다른 것은 없는가?”

황태자의 말에 북리준이 잠시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어제 하북팽가, 진주언가, 모용세가, 하후세가, 제갈세가의 후기지수들과 회합을 가졌습니다. 이 다섯 가문의 지원도 요청 드립니다.”

“어떻게 생각 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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