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꿇어!
“그리 안 해도 마음만 받겠네.”
허풍도 곡굉이 북리준의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에 푸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믿지 않으시는군요. 왜 형님이 여기 계신 분들과 비교해 꼭 필요한지 말하겠습니다.
첫째, 형님의 그 허풍이 필요합니다. 형님이 초짜 낭인들의 목숨이 헛되이 스러져가는 것이 안타까와 시도 때도 없이 하는 잔소리가 해남검단에서 필요합니다.”
“허풍도의 허풍이 필요하다....”
섬전창이 북리준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해남검단에 속한 사람들은 초짜 낭인보다 못한 무공에 하루 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들에게 왜 살아야 하는지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닌 형님뿐입니다.”
북리준이 해남검단의 이야기에 목이 말라오는 것을 느끼며 잔을 들었다.
“둘째는 형님만이 해남검단의 무사들에게 팔조삼재검진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섬전창, 벽안독검, 독안검, 귀산자는 형님 보다 무공은 높지만 무공이 일천한 사람의 입장에서 팔조삼재검진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내가 이 사람들 보다 나은 점이 하나는 있구만.”
허풍도가 잔을 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 계신 분들은 한 사람의 낭인으로써 제 할 몫을 다하겠지만 형님은 해남검단의 무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검진을 가르쳐야 할 막중한 사명이 있습니다.”
“허허, 허풍도가 우리 보다 낫구만.”
독안검이 대형의 말에 손뼉을 치며 허풍도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펴시고 검단의 하루 하루 말라 비틀어져 가는 생존자에게 삶의 희망을 줄 수 있는 낭인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리 말해 주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구만. 난 수락 하겠네.”
허풍도 곡굉이 술잔을 들어 북리준에게 건배 제의를 한 후 단숨에 들이켰다.
“나머지 분들은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목숨 빚을 진 도조장이 무상으로 도와달라고 해도 할 판인데 돈도 준다니 난 해남으로 향할걸세.”
“친구의 부탁인데 당연히 가야지. 섬전창 형님 말씀대로 돈도 되고...”
벽안독검의 말에 옆에 앉아 술잔을 비우던 귀산자가 독안검을 바라 보았다.
“네 놈은 무조건 이겠지?”
“대형이 아니었으면 난 이 자리에 없었다. 네 놈은 어찌 하려느냐?”
“솔직히 다른 사람의 제안이라면 한번도 가 본적 없는 해남에다 소문에 듣기로 만만치 않은 왜구를 상대한다면 단칼에 거절인데.....
나도 인두겁을 쓴 사람인데 목숨빚은 갚아야지. 나도 가겠네.”
다섯 낭인들이 흔쾌히 수락하자 북리준이 자신의 잔을 높이 들었다.
“해남에서의 무훈을 빌며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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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내 동창의 무인들이 무예를 수련하는 거대한 연무장에 유공공과 곽대인, 북리준이 구석에 놓인 탁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북리어사가 문직경관이었다면 그럭저럭 수하들이 말을 듣는 척이라고 했을 것이오. 문제는 북리어사가 너무 벼락 출세를 한 무직경관이라는 것이지.”
곽대인이 찻잔을 손에 들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북리어사가 요청한 인원들이 곧 이 곳으로 도착할 예정인데 아마도 한 수 보여 줘야 해남에 가서 골머리 썩힐 일이 없을 거로 생각하네.”
동창의 경우 종오품직 집사 열, 정육품직에 군관 열, 금의위의 경우 종오품직의 부천호 열, 종육품직의 백호 열명이라면 웬만한 중소문파는 흔적도 없이 지울 수 있는 무력이었다.
“북리어사가 알아서 하겠지, 뭔 걱정이 그리 많은겐지....”
유공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곽대인을 쏘아 보았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북리어사, 유공공께서 해남검단의 일에 제대로 힘을 실어 주시려나 보오.”
“무슨 말씀이신지?”
“이따 보면 알겠지만 금번 동창과 금의위의 파견 군관들의 수좌가 유공공님의 양아들이라네.”
“쓸데 없는 잡소리!”
“제가 없는 말을 합니까?”
그 때 연무장의 거대한 문 쪽에서 동창과 금의위 복장을 한 무관들이 줄지어 들어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충!”
동창 인원 스물과 금의위 인원 스물이 탁자에 앉아 있는 유공공과 곽대인에게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유공공과 곽대인, 북리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열 종대로 칼같이 서 있는 동창과 금의위의 군관들 앞에 섰다.
“여기 계시는 분이 이번에 황상께서 직접 품계를 내려 주신 호군참령어사시니라.
앞으로 삼년간 너희들의 직속상관으로 남해 바다에 창궐하고 있는 왜구를 소탕 하는 중임을 맡으신 분이시다.”
곽대인의 말에 미동도 하지 않고 허리에 매인 자신들의 검병에 오른손을 얹은 군관들의 눈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쯧쯧, 혈기만 방장한지고...”
유공공이 특히 입가에 비웃음을 한껏 매달고 맨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양아들을 보며 혀를 찼다.
“두 대인분들에게 수고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넌지시 건네는 축객령에 유공공과 곽대인이 서로를 쳐다 보았다.
“도어사! 해남으로 가기 전에 우리하고 술 한잔 꼭 하고 가게.”
“알겠습니다!”
곽대인이 입맛을 다시며 앞서 나가는 유공공의 뒤를 급히 따라나섰다.
‘구경 좀 하면 안되겠습니까?’
‘나가라고 꼭 직접 말해야 알아듣냐? 모자란 놈...’
‘저 콧대 높은 놈들을 어떻게 요리 할지 궁금해서 말이지요...’
전음을 주고 받으며 곽대인이 미련이 한껏 남은 눈으로 뒤를 돌아 보며 종종걸음을 쳤다.
“본 관은 금번에 호군참령어사로 직을 하사받은 도천학이라 한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쏘아보는 군관들의 매서운 눈빛을 받으며 담담히 미소를 짓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제군들의 그 눈빛, 아주 마음에 든다. 앞으로도 그 눈빛을 계속 유지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 때 맨 앞에 서 있던 동창 제복 차림의 군관이 도전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동창과 금의위의 군관 사십을 직접 요청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다.”
“종오품과 정육품의 동창과 금의위 군관을 지휘하실 능력이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유공공의 양아들이자 부천호 중 수장의 위를 차지하고 있는 유검패가 도발적인 눈빛을 쏘아 보냈다.
북리준이 자신을 쏘아 보는 마흔명의 군관들을 찬찬히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나머지 제군들도 같은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우렁찬 구호 소리와 같은 대답이 연무장을 쩌렁 울렸다.
“후후후, 본관을 시험하고 싶다? 좋다.”
북리준이 삼엄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군관들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
“본관은 내기를 좋아한다. 그냥 단순하게 검을 맞대는 것보다 뭔가를 걸고 하면 더 재미있지 않는가?”
“말씀 하시지요!”
유검패가 나머지 군관들을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너희들과 나, 한명씩 일대일 대련을 한다. 단, 누구든 내 검을 다섯합 버티면 본관의 패배를 인정한다. 너희 모두가 다섯합을 못 버티면 본 관의 명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
반대로 너희 중 단 한명이라도 다섯합을 견디면 너희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 해남에 가는 것을 취소해 달라면 기꺼이 명을 취소해 주겠다.”
너무도 광오한 말에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군관들이 서로를 쳐다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무공 수위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은데?”
“열명도 아니고 사십명을 상대 하겠다고? 무슨 차륜전도 아니고...”
그 때 유검패의 뾰족한 목소리가 연무장을 갈라왔다.
“정녕 그리 하시겠소이까?”
너무 과한 객기를 부리는 젊은 어사의 말에 유검패가 재차 확인을 했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다. 유검패라 했나? 자네가 이들의 수장인 듯 하니 비무을 위한 준비를 하게.”
북리준이 자신의 관모와 관복을 벗어 탁자에 올려 놓는 동안 유검패가 사십명의 군관들에게 비무를 위한 너른 공간을 중심으로 원을 그려 앉게 하고 자신도 자리를 잡았다.
북리준이 자신의 검을 들고 원 중앙에 나서자 유검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녕 후회가 없으시겠는지요?”
“말이 많구나. 누구부터 인지 나서거라!”
유검패가 눈짓을 하자 자신의 정면에 앉은 동창 군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관등성명은 필요없다. 오직 검으로 이야기 하라.”
북리준의 말에 무거운 걸음으로 원 중앙에 나선 군관이 서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다섯합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
발검을 하지 않은 채 유유자적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어사의 목을 향해 일격필살의 검을 내질렀다.
‘퍼어억’ 자신의 검이 어사의 목을 꿰뚫으려는 찰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을 본 순간 사정없이 내리쳐진 검집에 머리를 내어 주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네 자리로 가서 꿇어라!”
단 일수에 자신의 머리를 내어준 군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무릎을 꿇었다.
“다음!”
이번에는 금의위 복장의 군관이 자리에 일어서 검을 뽑아 들었다.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역습을 당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틈을 봐야겠다.’
뒷짐을 진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어사의 주위를 서서히 돌려 하던 금의위의 눈에 갑자기 어사의 신형이 공간을 접으며 순식간에 눈 앞에 서 있었다.
“커허어억”
어느새 뻗어낸 검집에 가슴을 격타당한 금의위 군관이 쿠당탕 땅을 굴렀다.
“꿇어, 다음!”
단 일수를 못 버티고 모든 군관들이 땅을 구른 후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에 유검패가 자신의 애검을 뽑아 들었다.
“자네가 마지막 인가?”
꿇어 앉은 군관들을 휘이 둘러보고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유공공의 양아들을 바라 보았다.
“너는 본관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아앗”
시간을 끌던 바로 공격을 하던 단 일수를 받아 내지 못하는 동료들을 보며 바로 땅을 박차고 일도양단의 기세로 검을 찍어 눌렀다.
‘까아앙’ 검집에 가로 막힌 검이 허공을 유영하며 어사의 목을 향해 비행을 시작했다.
‘카가가각’ 여지없이 내민 검집에 막힌 유검패의 검이 검집을 미끄러내리는 힘 그대로 어사의 몸을 양단하기 위해 아래에서 위로 그어올려졌다.
‘후우우웅’ 기음과 함께 자신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것을 느끼며 수비 자세를 취하는 중에 무엇인가가 톡톡 머리를 두드렸다.
“세 수까지 버틴 자는 네가 처음이군.”
어느새 뒤에 자리를 잡은 어사의 검이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는 느낌에 들고 있던 검을 떨어 뜨렸다.
“꿇어!”
자신을 중심으로 원을 만들어 무릎을 꿇고 있던 군관들을 일별 한 후 북리준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아직까지 승복을 못하겠다는 눈빛이군.”
유검패는 한번 더 한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손을 들려는 찰나 어사의 말이 떨어져 내렸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동창에 속한 군관 스물. 금의위에 속한 군관 스물을 대상으로 두 번의 기회를 주겠다.
검진을 형성하던 떼로 덤비던 내 몸에 상처나 베인 자국 하나만 남긴다면 너희들이 이긴 것으로 해주겠다.”
참령어사의 광오하다 못해 미친 제안에 유검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번에도 우리가 진다면 진정으로 승복하겠나이다.”
유검패가 동창의 군관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시작했다.
“팔절쇄천진을 펼친다. 단 한번의 칼질만 성공하면 된다.”
북리준이 뒷짐을 진 채 동창의 군관들이 자신을 두 개의 원으로 둘러싸는 모습을 바라 보고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유검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북리준을 둘러싼 두 개의 원이 반대 방향으로 회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