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그리운 이름
“웬 가면?”
해남으로 가는 도중 야영을 위해 동창과 금의위 군관들이 쳐준 천막 안에서 철로 된 눈 부위를 가리는 가면을 꺼내들었다.
“해남검문측에서 혹여 나를 알아 보는 자가 있을까 준비했지요.”
허풍도 곡굉이 자신의 천막인 양 구석 간이 탁자에 앉아 술병을 기울였다.
“나 여기서 자도 되지?”
“편하실대로 하세요. 저는 잠깐 세가쪽에 갔다 올께요.”
“그러시든지!”
천막을 나선 북리준의 뒷모습을 일별한 후 휘이 천막안을 둘러본 곡굉이 혀를 찼다.
“동창과 금의위 얘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할줄 알았더니 제법이네.”
북리준이 극구 개인 천막을 필요없다고 했는데 유검패가 자신들의 상전인 검단의 검단주가 노숙을 하는 것은 아니라며 순식간에 만든 천막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저녁은?”
“다 먹었지. 그 가면 괜찮네!”
“가면 쓴 얼굴에 모두 익숙해 질 때 까지 쓰고 다니려고.”
제갈청하가 팽무강 외 친구들과 함께 차를 즐기다 가면을 쓰고 다가 오는 북리준을 반갑게 맞이했다.
“철면신산대협,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요?”
제갈청하의 옆에 앉아 차를 즐기던 철면신산 제갈성이 웃음을 지었다.
“어사님이 신경 써 주셔서 아주 편안하오.”
다들 북리준이 남해검문과의 불편한 관계로 도천학이라는 이름과 가면을 써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어 고개를 주억 거렸다.
“철면신산님과 청하에게 부탁 드릴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 뵈었습니다.”
“말씀 하시게.”
제갈청하가 자신에게 부탁 한다는 말에 면사 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구상하는 해남검단을 만들기 위해 전략을 짜 주실 분이 필요합니다. 그리 크지 않은 조직에 군사라는 직함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철면신산님을 군사로, 청하를 부군사로 초빙하고 싶습니다.”
신기제갈이라 불리우는 제갈가의 사람을 군사로 초청할 수 있다면 북리준은 자신의 구상을 막힘없이 밀고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왜구를 소탕하기 위한 삼년간이라면 그리 어려울 것이 없네. 질녀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
“왜 우리 가문이 신기제갈이라 불리우는지 직접 보여 줄게.”
“두 분께 감사합니다. 남해로 향하는 틈틈이 제 생각을 두 분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갈가의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하후상이 슬쩍 끼어들었다.
“나도 감투 하나 주라.”
“네 머리로 뭘 할 수 있겠냐? 아서라....”
모용민이 피식 웃으며 하후상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렇지 않아도 상이에게도 부탁 할 일이 있어.”
“거봐!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니까.”
하후상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해남검단에 도착하면 하후세가의 기본 창술을 가르쳐 줘. 상이 네가 창을 다루기에 적합한 검단원을 백명 정도 뽑아 하후세가의 인원들과 함께 기본 창술을 전수해 줘.”
북리준이 전장에서 창의 유용함을 몸소 체험한 후 왜구와의 싸움에 창을 다룰 수 있는 무인이 있다면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기본창술이라면 문제없지. 그런데, 우리 세가의 기본 창술이라도 많이 힘들텐데.... 검단원들이 따라 올 수 있을까?”
“내가 따라 가게 만들거야. 자신들의 친인들을 영문도 모르고 왜구의 칼에 잃었는데 자신의 목숨마저 시궁창에 처박게 할 수는 없지.”
북리준의 비장한 말에 하후상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맡겨줘! 왜구놈들을 일수에 꿰뚫을 수 있는 창대를 만들어 줄게.”
“저 놈이 조금 모자라지만 창에 관한 것은 인정해 줄만 하지.”
제갈청하의 말에 하후상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내가 저 미친년 한테 칭찬 들은 거 맞지?”
“아주 매를 버는구나, 쯧쯧!”
모용민이 제갈청하의 눈이 좌우로 길게 찢어지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요?”
“어사님, 말씀 낮추셔도 됩니다.”
섬전창과 낭인들이 야영을 하는 곳에 간 북리준을 낭인들이 엉거주춤 일어서 맞이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리 하겠습니다.”
“동창의 유부천호와 협의 하여 세가와 황궁, 저희 낭인들이 번갈아 번을 서기로 하였습니다.”
“하시라도 불편한 점이나 제게 조언을 주실 것이 있으시면 주저 마시고 말씀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동창과 금의위 군관들이 질서정연하게 야영을 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충!”
유검패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자 사십명의 군관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편히 쉬게.”
북리준의 말에 다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유부천호!”
“하명하소서.”
“본관은 자네들이 우리가 가는 곳에서 큰 역할을 해 줄 것이라 믿네. 부천호가 보았을 때 내가 뭔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조언을 부탁하네.”
“알겠사옵니다.”
무인이라면 누구도 존경받을 높은 무공에 벼락 출세를 하였으나 항상 겸양을 취하는 어사의 매력에 유검패는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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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인계 준비는?”
“뭐가 있어야 인계를 하지.”
삼년 전 기존 해남검단의 단주 였던 생사검 이벽이 낙향한 후 현 남해검문주 뒤에 줄을 섰던 기린대주 목대관이 검단의 단주가 되어 남해검문과의 연줄을 이어왔다.
“잘된 거지. 이 지긋지긋한 검단을 벗어날 수 있으니까.”
남해검문주의 전령으로 온 전 주작대주 막가령이 품 속에서 밀봉된 서신을 건네었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나은 법이야. 줄 잘 못 섰다 목이 잘린 백호대주와 현무대주 생각을 해.”
“너야 재주가 좋아 문주님의 측근에 설 수 있었지만 난 이 꼴이 뭔지....”
“이번에 검문에 들어오면 제대로 공을 세워 봐. 내가 잘 말씀 드릴테니까.”
막가령이 건넨 서신을 뜯어 읽어본 목대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조정에서 내려준 군자금에 맞추어 장부를 만들라고? 젠장....”
“시키는 대로 해. 불만이 있어도!”
“매월 내려오는 은자 오백냥 중 이 곳에 오는 게 이백냥이라고. 아무리 뻥 튀기를 해도 두 배 넘게 숫자에 손을 대야 하는데 이걸 믿어 줄꺼라 생각하는거야?”
목대관이 입이 댓발 튀어 나온 채 옆 탁자에 놓인 술병을 입에 물었다.
“어차피 조정에서 이 곳으로 왜구토벌을 위해 내려오는 관리라면 거의 징벌 수준일 거라 판단하고 있어. 여기 은자 이백냥으로 잘 구슬러 보라구.”
막가령이 은자 백냥짜리 전표 두장을 목대관의 손에 쥐어주었다.
“하아, 어찌되었건 남해검문에 들어가면 잘 부탁해. 우리는 그래도 같은 전장에서 싸운 전우잖아.”
“일단 여기서 다른 말 안 나오게 마무리나 잘 하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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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 개새끼들 좀 보소....”
왕일이 저녁으로 나온 고깃국을 보고 걸쭉하게 욕을 내뱉었다.
“형님은 고깃국을 줘도 지랄이우?”
“병신아, 우리가 언제 검단에서 준 고깃국을 먹어 봤냐? 조정에서 관리가 내려온다니까 눈 가리고 아웅하려는 꼬락서니가 눈에 시어서 그렇다.”
하승진이 비계가 둥둥 떠 있는 고깃국물을 맛있게 삼키고는 히죽 웃음을 지었다.
“뭐 이렇게 한 이틀 먹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물론 그 이후에 다시 멀건 죽이겠지만....”
“대주, 새 옷이우!”
청룡대원 중 막내가 그나마 잘 빨아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청룡대복을 두 벌 들이밀고는 바삐 사라져갔다.
“아이구, 아주 지랄도 풍년일세.”
“이건 뭐.... 청조에서 가끔 이렇게 대가리를 바꾸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
투덜대는 왕일을 뒤로 하고 낡았지만 새로 빤 전투복을 가슴에 안고는 하승진이 코를 파묻었다.
“좋네! 맨날 피와 땀에 절은 옷을 직접 빨다 남이 빨아준 옷을 받을 날이 오니까.”
“내일인가?”
왕일이 구석에 놓인 곰방대에 불을 붙이고는 국물이 담긴 그릇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니까 오늘 이 지랄병을 하는 거지요.”
“이번에 오는 놈은 그나마 덜 해쳐먹고 갔으면 좋겠다.”
“그런 기대는 애초에 접어두슈,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있잖수, 크크크!”
“네놈말이 맞다. 내가 이 곳에서 뭔 기대를 하겠냐?”
그 때 검단주의 전령이 왕일와 승진이 있는 천막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검단주님이 각 대주님과 부대주를 소집 하셨소이다.”
“끄응, 그려! 왜 안 부르나 했다....”
왕일과 하승진이 어슬렁 거리는 걸음으로 검단주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검단주의 집무실에 들어서니 기린, 백호, 현무, 주작 대주와 부대주들이 쾡한 눈으로 들어서는 왕일과 승진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들 모였나?”
검단주인 목대관이 자신의 휘하 다섯 개 대주와 부대주를 일별했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다들 알거라 생각한다. 청조에서 왜구들과의 전쟁을 직접 관장하겠다고 관리를 파견했고 그래서 남해검문이 내일 부로 검단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지랄, 언제 검문에서 우리 신경을 쓰기나 했나?’
승진이 속으로 투덜대며 자신과 같은 표정을 짓는 동료들을 흘낏 쳐다 보았다.
“언제 다시 검단이 남해검문으로 돌아 갈지 알수는 없지만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잠시 조정의 관리 하에 있다가 다시 검문으로 넘어갈터이니 괜히 남해검문에 대한 책잡힐 말이나 행동은 안 하리라 믿는다.”
목대관 단주가 자신이 할 말을 다 한 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주와 부대주들을 일별하고는 손을 내저었다.
“할 말 없으면 나가서 내일 신임 단주를 맞이할 준비나 해라.”
우르르 일어나 인사도 없이 밖으로 향하는 대주와 부대주들의 뒷모습을 향해 나직하게 욕을 내뱉었다.
“패잔병같은 놈들....”
밖으로 나와 자신들의 막사로 향하는 왕일과 승진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저 새끼는 같은 검단 출신끼리 조금 위해 줄 생각은 안 하고 어떡하든 검문으로 넘어가려고 안간힘이나 쓰는 모습이 보기 딱합니다 그려.”
“그나마 줄을 잘 서서 저렇게 버티고 있는 거지.... 준이가 있었으면 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을텐데....”
“말해 뭐해요? 당연히 준이가 있었으면 저런 새끼들 숨도 못 쉬고 있었을텐데요.”
괜한 이름을 들먹이다 둘 다 침울해진 채 천막에 들어섰다.
“잘 자거라!”
“꿈 속에서라도 준이를 보고 올께요.”
“미친놈, 준이 좀 그만 괴롭혀라...”
왕일이 침상에 몸을 눕히는 승진을 보고는 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자고 어디가요?”
“잠이 안 온다. 바람 좀 잠깐 쐬고 올테니 먼저 자라.”
천막을 나선 왕일이 별빛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며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겼다.
“네 놈의 복수를 꿈도 꾸지 못하는 이 우형을 용서하지 마라.”
긴 한숨과 함께 낡디 낡은 천들이 헤진 사이로 시린 바람이 들이치는 청룡대원들의 천막 사이를 휘적거리는 걸음으로 왕일이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씨이.... 형님만 준이에게 미안한 거 아니우. 남해검문주와 마사히로 놈의 협잡질에 걸려 스러져 간 친구의 복수를 엄두도 못 내는 나도 마음이 쓰리단 말이오.”
승진이 넝마와 같은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 쓰고는 굵은 눈물을 흘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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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이군....”
북리준이 저 멀리 보이는 해남검단의 성채를 보며 감회에 젖었다.
“뭐야, 거의 개방 총단 저리가란데?”
허풍도 곡굉이 곧 쓰러질 것 같은 목책으로 둘러싸인 을씨년스런 풍경에 혀를 찼다.
“저기를 변화시켜야지요, 형님하고 우리들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