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해후
서서히 말머리를 해남검단의 총채가 있는 곳으로 돌려 가는 북리준의 얼굴에 회한과 기대감이 동시에 어렸다.
‘왕일형님과 승진이는 살아 있는지......’
“저기에 가면 너를 알아볼 사람이 남아 있을까?”
제갈청하가 옆에 말머리를 붙이고 가면을 쓴 채 성채를 바라보는 북리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있다고 보는 것이 현명하겠지.”
“가면 할 일이 산더미네.”
제갈성과 청하와 틈틈이 자신의 구상을 논의하여 실행에 옮길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북리준을 보며 청하가 푸념을 했다.
“미안해. 수고 좀 해 줘!”
“뭐 내가 좋아서 한다고 한 일인데 열심히 해야지.”
저 멀리 백여마리가 넘는 말들 위에 몸을 싣고 다가오는 무리를 확인한 목대관이 옆에 서 있던 부단주에게 지시를 했다.
“반시진 정도면 도착하겠다. 전 검단원들을 연무장에 도열시켜라.”
나무로 만든 성벽에서 뛰어 내려가는 부단주를 보고는 목대관이 중얼거렸다.
“이 지긋지긋한 곳도 곧 이별이군.....”
“각 대의 대주와 부대주들은 대원들을 사열종대로 정렬하라.”
너른 연무장에 해남검단원 전체가 모이자 소란스러움이 극에 달했다.
“제엔장! 언제 전 대원들이 모여 봤어야지. 완전 시장통이 따로 없구만.”
하승진이 오백명이 넘는 해남검단에 속한 검단원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그건 뭐야?”
왕일이 승진의 손에 들린 깃대와 깃발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에 우리 청룡대를 상징하는 깃발이라고 가져다 줍디다. 나 여기 들어 와서 처음 보는 깃발이유, 크크크!”
검은색 옻칠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깃대에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청룡이 아로새겨진 깃발을 펴보고는 왕일이 코웃음을 쳤다.
“정말 지랄도 제대로네....”
“어이, 주작대는 거기가 아니라니까! 현무대는 저쪽이라고 이 개자식들아!”
부단주가 열 제대로 받은 얼굴로 고함을 치며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지휘봉을 휘둘러 대었다.
“아주 해남검단을 새로 창단하는 수준이구만....”
기린대주 범량이 왕일에게 다가오며 걸쭉한 침을 퉤 뱉었다.
“한 이틀 고깃국물에 남이 빨아준 옷 덕을 봤으니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라.”
“아, 예예... 왕고수님은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십쇼...염병!”
왕일과 친우로 틈만 나면 남해검문 욕을 같이 하는 기린대주가 툴툴 거리며 자신의 대 앞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주 개판이구만....”
각 대별로 정렬시키는 중에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부단주를 흘낏 쳐다보고는 청룡대가 정렬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환영합니다. 전 해남검단을 맡고 있는 목대관이라고 합니다.”
맨 앞에 코 윗부분을 다 가리는 가면을 쓰고 단안화령이 달린 군모와 관복이 인상적인 사내 앞에 목대관이 나섰다.
‘목대관.... 네 놈이 검단주가 되었구나....’
대공자 편에 줄을 서 주작대주 막가령과 함께 자신을 회유하던 전 기린대주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환영 감사하오.”
담담한 음성으로 사례를 하는 정삼품 호군참령어사에게 가식적인 함박웃음을 지은 목대관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대 청조의 이런 높으신 분은 처음 뵙습니다그려.”
자신의 너스레에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는 자신의 후임에게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망할새끼, 사람이 이야기 하면 대꾸를 좀 해 주던가...’
마음과 다르게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목대관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를 따르시지요. 성대한 환영연을 준비했습니다.”
후임 관리를 구워 삶기 위해 이름난 숙수를 초빙하고 명주를 구해 놓고 저 멀리 도성에서 이름난 기생들을 데려다 놓은 목대관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환영연은 되었고 검단원들을 먼저 보여주시오.”
“아, 일단 목을 좀 축이시고 나서....”
“본관은 말이 많은 것을 싫어하오.”
냉막한 표정과 목소리로 할 말만 하고 입을 꾹 다무는 어사의 행동에 당황한 목대관이 허둥거렸다.
“아, 예.... 그럼 먼저 검단원을 보고 나서 식사를....”
‘하아, 뭘 얼마나 내 놓으라고 이 지랄인지...’
목대관이 연병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온다 와!”
연무장에서 이제나 저제나 신임 검단주가 오는 것을 기다리던 부단주가 부랴 부랴 목대관 앞으로 뛰어 왔다.
“이리로 오시지요!”
목대관과 함께 연무장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지휘대 위에 오른 북리준의 눈에 축 처진 어깨와 고개를 들어 마지 못해 자신을 쳐다 보는 검단원들이 들어왔다.
“이 분이 이제부터 너희들을 지휘하실 신임 검단주님이시니라.”
여기 저기서 웅성 거리는 소리와 건들거리는 검단원들의 모습에 목대관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구들의 손에 살아남은 생존자들로 구성된 부대라 군기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각 대의 맨 앞에서 지휘대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왕일과 하승진을 발견한 북리준의 눈에 순간 기쁨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살아있었구나..... 다행이다....’
자신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듯한 신임검단주의 모습에 하승진이 왕일을 쳐다 보았다.
“형님, 아는 사람이유?”
“미친놈! 내가 관리를 어떻게 아냐....”
“신임검단주하고 안면이 있다면 앞으로 생활이 편해질텐데..... 형님도 참 인복이 없수.”
“미친놈!”
자신의 옆에서 청룡대 기를 어깨에 걸친 채 이죽거리는 승진을 보며 왕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콰앙!’
목대관이 환영연을 베풀기 위해 큰 돈을 들여 준비한 연회장 문을 냅다 발로 걷어찼다.
“나으리, 시작하오리까?”
반 망사 차림의 짙은 화장을 한 기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망할 새끼! 피곤하니까 처소로 안내해 달라고?”
검단원들을 점검한 신임검단주가 환영연을 사양하며 자신의 처소에 인수인계를 위한 자료를 바로 가져다 달라고 요청한 어이없는 상황에 다시 한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단주님, 어찌할까요?”
뒤에 서 있던 부단주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눈치를 보았다.
“어차피 차려 놓은 거니까 우리끼리 다 먹자. 씨발, 풍악을 울려라!”
****
“완전 개판인데?”
제갈청하가 부단주가 북리준의 처소에 가져다 준 인수인계 서류를 자신의 숙부와 함께 뒤적이다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휴우, 어사가 시중 물가를 아예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건가? 이건 너무 심하군...”
재갈성이 해남검단의 장부를 덮으며 한숨을 내 쉬었다.
“총 얼마의 수입이 있는 것으로 나와 있어?”
“은자 오백냥! 청조에서 내려주는 돈을 다 여기에 썼다고 개구라를 치고 있는거지.”
“실제 해남검단에 쓰여진 비용을 대충 추산해 봐도 월 백오십냥이 안되네. 삼백오십냥이 공중에 뜬거지.”
제갈성의 말에 제갈청하가 해남검단의 인원이 적힌 장부를 뒤적였다.
“총 육백명이 다 되어가는 검단을 월 은자 백오십냥으로 꾸렸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당장 우리 가문에 데려다 써야겠다. 조질거야?”
제갈청하가 청조의 관리에게 거짓장부를 올린 해남검단주를 징계할 것인지 묻는 말에 북리준이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긴 싸움이 될텐데 이런 것으로 꼬투리 잡아봐야 이득이 안돼. 당장 이번 달부터 내려오는 군자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지 계획을 먼저 세우자고. 그리고 모자라는 자금은 이걸로 사용해 줘.”
북리준이 자신의 품에서 꺼내 건네주는 전표뭉치를 받아들고는 제갈청하의 눈이 커다래졌다.
“중원 삼대 전장 중 하나인 금구전장의 전표로 금자 만냥? 와우, 너 엄청 부자구나!”
“우리 어사님이 정말 알부자셨구만, 허허허!”
제갈성도 너무 큰 전표금액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난번 논의 드렸던 대로 검단원들이 무공을 습득하기 위한 기반을 갖추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루 한번 이상은 고기를 공급하고 저 거적대기 같은 군막도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군막으로 새로이 갖추어 주십시오.
각 대를 상징하는 군복과 병장기, 훈련을 위한 제반도구도 새로이 장만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정말 왜구만을 상대하기 위한 진정한 검단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북리준의 말에 제갈청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매월 녹봉을 지급할 수 있게 계획을 짜 주었으면 합니다. 당장은 크지 않더라도 자신이 검단에 속한 군인이라는 소속감을 주어야 합니다.”
“꼭 네 돈을 써가면서 까지 급하게 할 필요가 있어? 조정에서 나오는 군자금으로 먼저 맞추어 보는 것이 낫지 않아?”
제갈청하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었다.
“청하 네 말대로 내려오는 군자금으로 단시간에 검단의 변화를 검단원 들이 체감하게 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봐. 문제는 내가 황태자와 약속한 기한이 삼년이야. 삼년 안에 난 저 바다에 있는 왜구들을 완전히 소탕할 거야. 그러려면 검단원들이 먼저 변해야 해.
돈은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야기 해. 내 돈을 쓰건 조정에 요청을 하던 방법은 내가 찾을께.”
****
허풍도 곡굉이 해남검단원들이 기거하는 천막촌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하아, 여기에 비하면 전장에서 우리 낭인들의 숙소는 궁궐이었구만.”
북리준이 내어준 군관의 복장을 하고 천막사이를 누비는 곡굉을 검단원들이 퀭한 눈으로 한번 보고 신경을 끊었다.
“여기군!”
북리준이 이야기한 청룡의 깃발이 꽂혀 있는 천막 앞에 선 곡굉이 중얼거렸다.
“안에 계시우?”
밖에서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왕일과 승진이 서로를 쳐다 보았다.
“뉘시우?”
하승진이 천막을 나서니 자신의 앞에 청조의 군관 복장을 한 염소수염의 사내가 서 있었다.
“여기가 청룡대주와 부대주가 있는 곳이오?”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일단 안에서 이야기 합시다.”
염소수염의 사내가 다짜고짜 천막 안으로 신형을 밀어 넣자 황당한 표정의 승진이 급히 뒤를 따랐다.
“아이고, 여기서 계속 지내는 거유? 하루 이틀이 아니고?”
“한 오년 지냈소이다. 그런데 누구신지?”
왕일이 처음 보는 군관 사내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분은 나를 따르시오. 신임검단주님의 호출이오.”
자신의 할 말을 마치고 천막 안을 한번 둘러보고는 한숨을 쉬며 사내가 밖으로 나가자 하승진이 목소리를 죽였다.
“각 대주와 부대주를 다 부르나 보네요. 그런데, 왜 군관을 시켰을까? 그냥 검단 내 전령에게 다 모이라 시키면 될텐데....”
“자기는 뭔가 다른 사람이라고 유세하려나 보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갔다 와서 잠이나 자자.”
주섬 주섬 한 벌 뿐인 전투복 겸 생활복을 꿰어 입고 천막을 나서니 군관 복장의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오슈!”
청조 군관 복장의 사내가 행동이나 말이 일반 낭인의 그것과 같다는 생각에 왕일과 승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염소수염의 사내를 따라 해남검단의 접빈각 앞에 도착한 왕일과 승진을 위 아래로 쓰윽 훑어본 사내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이곳으로 들어가 보슈.”
접빈각 안으로 들어서 한 방 앞에 멈춘 사내가 손가락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각 대주와 부대주가 다 모이는 겁니까?”
“무슨 소리?”
“그런데 왜 우리만.....?”
“들어가 보면 알게 될거유!”
사내가 자리를 비켜주며 방문을 열어 주자 왕일과 승진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문턱을 넘어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방안을 둘러 보니 중앙의 탁자에 먹음직스런 오리구이와 화주 다섯병이 놓여 있었고 그 탁자 너머에 낮에 보았던 신임검단주가 뒷짐을 진 채 벽을 보고 서 있었다.
“신임 검단주님을 뵙습니다.”
왕일이 포권을 취하며 승진에게 발길질을 하자 승진도 급히 포권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