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60화 (60/167)

60. 반갑다!

“일단 앉으시게.”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무엇을 보고 있는지 벽 쪽을 보고 있는 검단주의 말에 조심스럽게 왕일과 승진이 자리를 잡았다.

천천히 신형을 돌린 검단주가 예의 가면을 쓴 채 자신들이 앉은 탁자로 다가왔다.

“그대들이 청룡대주와 부대주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저희들만....?”

주위를 연신 두리번 거리는 왕일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 술 한잔 씩 받게.”

화주병을 들어 왕일과 승진의 잔을 채운 검단주가 자신의 잔도 채웠다.

“건배!”

가타부타 말도 없이 뜬금없는 건배 제의에 왕일과 승진이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단숨에 들이켰다.

“이름이...?”

“청룡 대주 왕일이라고 합니다.”

“부대주 하승진입니다.”

다시 화주병을 들어 잔을 채워주는 신임검단주에게 찍소리고 못하고 연거푸 다섯잔을 받아 마신 후 왕일과 하승진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거지?’

연신 눈을 뒤룩거리며 도대체 뭘 잘못한건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왕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낮에 사열 하실 때 저희가 뭘 잘못 했습니까?”

승진이 청룡대 기를 삐딱하게 자신의 오른어깨에 기대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한 왕일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연신 화주잔을 비우며 자신들에게 부담스럽게 정감 어린 눈길을 보내는 신임검단주를 보며 승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많이 보던 눈빛인데....?’

“팔년 전 그대들이 왜구들의 수장과 대적 했을 때 생환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엥? 그 이야기가 왜 여기서 나와? 도대체 누가 그 때 이야기를 이 놈에게 한 건데?’

연신 화주잔을 비워 술이 은근히 오른 왕일이 회한에 젖은 눈으로 그때 이야기를 꺼내었다.

“당시 청룡대주였던 동생이 우리를 살리려고 왜구의 대장 놈을 유인해서 우리만 겨우 살았습니다....”

“함정...”

“닥치거라.”

하승진이 술이 취해 진실을 이야기 하려는 것을 왕일이 틀어 막았다.

“함정?”

“아, 아닙니다. 술이 약한 놈이 과음을 한 모양입니다. 다른 일이 없으시면 저희는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왕일의 매서운 눈빛에 거북이처럼 목을 푹 집어 넣은 하승진이 잔을 비웠다.

무거운 침묵이 다시 방안을 짓누르고 왕일이 다시 한번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려는 찰나 신임검단주의 입이 열렸다.

“형님, 승진아....”

평소에 꿈에서만 듣던 목소리가 들려오자 승진의 고개가 패액 들렸고 왕일도 환청을 들었는가 연신 머리를 흔들었다.

“커허억 커헉.... 내가 취했나 봐요. 준이 목소리가 들려....”

연신 흐느끼는 목소리에 굵은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승진의 모습을 보고 신임검단주의 손에 가면이 잡혔다.

“형님, 승진아! 나야.... 준이....”

승진이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북리준의 모습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벌린 입을 두 손으로 틀어 막았다.

“꾸, 꿈이야..... 이건 꿈이라구...”

왕일도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사무치도록 그리워한 동생의 모습에 연신 자신의 눈을 두 손으로 부벼대었다.

“크허어어어엉”

승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북리준에게 다가가 무릎을 잡고 목 놓아 통곡을 하고 왕일도 자신의 손을 뻗어 북리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이거.... 꿈이 아니지..... 우리 준이 맞지?”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어. 살아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자신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연신 훔쳐내는 왕일의 손길에 북리준이 웃음을 지었다.

세 사내가 서로 부둥켜 안고 오열을 한 지 약 일다경 정도 되었을까?

약간은 멋쩍은 표정으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대충 닦아내고는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네가 신임검단주가 된 거야?”

하승진이 기쁨에 겨운 표정으로 화주병을 잡아 북리준의 잔을 채웠다.

“지금부터 천천히 설명할게.”

북리준이 마사히로의 검을 맞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기연을 만난 이야기와 그 후 살검과 전검을 습득하기 위해 전장에서 시작한 낭인 생활 이야기, 그 와중에 황태자와 동창, 금의위의 수장들과의 인연 등등을 한 시진에 걸쳐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딱이네....”

왕일의 말에 승진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를 꽉 깨물었다.

“복수하러 온 거지? 우리를 이렇게 만든 놈들 한테?”

“당연하지! 우리 셋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팔년을 준비해 왔어. 두 사람이 도와줘야해.”

“말만 해! 무엇을 하면 되는지....”

왕일이 북리준의 손을 꼭 붙잡고 힘을 주었다.

“일단 아까 형님과 승진이를 데려온 분과 전체 검단원들에게 검진을 가르쳐 줘.”

밤이 새도록 북리준과 왕일, 하승진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모처럼 활짝 웃는 낯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

“목단주가 찾아왔어.”

장부를 들여다 보고 있던 북리준의 귀에 곡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여 보내세요.”

잠시 후 목대관이 술이 안 깨 벌개진 얼굴로 방안으로 들어섰다.

“앉으시오!”

“아니, 그리 긴 말을 할 것이 없소. 내가 인수인계할 서류는 다 넘겼고 난 오늘 남해검문으로 복귀할 예정이오. 애써 준비한 환영연도 거부하는 것을 보니 대쪽같은 분이 이번에 오신 것 같소.”

북리준이 보고 있던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자 빈정이 상한 목대관이 품에서 꺼낸 것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이것도 안 받으실 것 같지만 명을 받았으니 일단 건네는 드리겠소. 남해검문주님이 새로 출발하는 검문에 보태시라고 보내오신 전표요.”

은자 백냥 짜리 두 장의 전표를 힐끗 쳐다본 북리준이 다시 장부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잘 쓰겠다고 전해 주게. 조만간 남해검문을 방문 하겠다는 말도 같이....”

“하, 돈은 받으시겠다? 내가 미처 몰랐소이다. 차라리 환영연도 돈으로 드려야 되는 것을 말이오.”

목대관이 신형을 팩 돌려 방을 나서자 잠시 후 제갈청하가 들어왔다.

“왜 씩씩 거리며 나가는데?”

“환영연에 내가 안 가서 빈정이 상한거지. 아, 그리고 이거 군자금에 보태.”

은자 이백냥을 건네는 북리준을 보며 제갈청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 이거 떼부자 되겠네...”

“혹시 이따 저녁 식사 후에 한 두시진 정도 자리를 비우려는데 문제 없겠지?”

“두 시진이나? 어디 애인 만나러 가나?”

“비슷해.”

“진짜야?”

“농담이고 옛 친우를 보러 가려구. 일단 너만 알고 있어.”

“알겠다. 조심해서 잘 갔다 와!”

집무실에서 대강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검은색 야행의에 복면을 쓴 북리준의 신형이 야조처럼 검단을 빠져나왔다.

‘비천신보의 성취가 천유신보를 수련하면서 칠성 경지에 이르렀네.’

마치 축지를 하듯 쑤욱 쑤욱 땅 위를 비행하는 듯 치고 나가는 북리준의 눈에 익숙한 정경이 들어왔다.

‘콰콰콰콰콰쾅 쿠르르릉 쿠릉’

연신 굉음을 내며 맹렬하게 회전하는 광룡소의 광폭한 회오리를 보며 북리준이 웃음을 지었다.

“금아를 볼 수 있으려나?”

천산쌍괴의 무덤 앞에 놓을 음식 몇 가지를 수어피에 꽁꽁 싼 후 품 속에 넣고는 넘실 거리는 바다를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바다 속으로 입수한 북리준의 머리 위에 광폭한 회오리가 요동을 치고 저 앞에 쌍괴동으로 들어서는 수중 동굴이 보였다.

‘푸화아아아아학’

약 한식경 정도 숨을 참고 쌍괴동 안에 들어선 북리준의 눈 앞에 정겨운 막힌 절벽이 나타났다.

“아직 진법이 유효하구나. 지괴님의 진법은 정말 명불허전이구나.”

지괴의 환환미진을 뚫고 안으로 들어서니 자신이 오년간 생활했던 공간이 반가이 북리준을 맞이했다.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동굴을 지나 저 너머에 연무장 한 켠 자신이 만들어 안치한 천산쌍괴의 돌무덤 앞에 섰다.

품속에서 꺼낸 수어피 뭉치를 풀어 말린 고기와 과일, 초를 꺼내 간단히 제사상을 차렸다.

“쌍괴님! 두 분의 유지를 받들어 천산파를 찾아 도움을 주고 왔습니다. 시간이 되어 천산파가 완전히 재건되면 두 분을 천산에 모시겠습니다.”

정중히 재배를 하고 가져온 술을 돌무덤 주위에 뿌려내었다.

“응?”

그 때 저 동굴 입구에 황금빛의 무엇인가가 어른 거리더니 ‘꾸오오오오오오오 꾸아앙’ 정겨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아야!”

북리준이 한달음에 동굴 입구로 나가니 황금빛 서기가 찬란한 금아가 연신 고개를 주억 거리며 북리준을 바라 보았다.

‘꾸오오오오오오’

기쁨에 찬 울음소리와 함께 북리준의 팔에 안긴 금아의 혀가 연신 북리준의 얼굴을 햝았다.

“그래, 나도 정말 보고 싶었다.”

북리준이 쌍괴동을 떠난 삼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루도 안 빼고 쌍괴동에 들른 금아의 눈에 기쁨의 빛이 넘쳐 흘렀다.

북리준의 품 안에서 기쁨의 머리짓을 하던 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자주 올 거야. 여기에서 할 일이 있어서 너를 떠날 일은 없을거야.”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며 백령해왕삼과 천년자패, 쌍괴동의 기연을 이어준 금아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는 쌍괴동을 나섰다.

****

“이거 미친 거 아냐?”

“누구?”

“신임검단주 말이야...”

“나도 동감이다.”

기린대주 범량과 현무대주 사검평이 저녁으로 나온 구운 고깃덩이를 연신 흡입하고 있는 대원들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한테 환심을 사서 뭐하려는 거지?”

“뭐가 아쉬워서 우리한테 환심을 사겠냐? 며칠 갈 지는 모르겠지만 즐기자구.”

범량의 말에 사검평이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식단 뿐이 아니잖아. 지금 각 대에 대원들의 천막 새로 짓기 시작 하는 거 봤어? 한 겨울에도 끄덕 없겠더라구. 그 뿐이야? 한 해를 단벌로 버텼는데 벌써 일인당 세 벌의 새 옷이 지급 되었잖아.”

“네 말대로 이게 단기간에 끝나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다시 한번 주위를 휘이 살핀 사검평이 범량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왕일이하고 부대주 승진이 있잖아?”

“청룡대주? 왜?”

“연신 신임 검단주와 회합을 갖는 모양이더라구. 예전에 알던 사이였나?”

“왕일이나 승진이 놈이 어떻게 어사랑 안면이 있겠냐? 그런데, 네 놈 말대로 어떤 사이지?”

“나 보다는 네 놈이 왕일이하고 더 친하잖아? 한번 넌지시 물어봐봐. 지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말이야.”

“원숭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온다!”

사검평이 손으로 연신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왕일과 승진을 가리켰다.

“어이, 나 좀 봐!”

범량이 손을 들고 고함을 치자 왕일이 승진과 함께 다가왔다.

“밥은 잘 먹었냐?”

“평소 안 먹던 고기를 먹어서 탈난 놈들이 꽤 있지만 난 괜찮다. 그나 저나 뭐 좀 물어보자.”

범량과 사검평이 얼굴에 궁금하다는 표정을 한 가득 담은 채 왕일을 바라 보았다.

“도대체 신임검단주 말이야.... 무슨 생각이래? 네 놈과 승진이 놈이 검단주하고 자주 보는 것 같던데....”

“식단에 숙소에 의복에 무기에..... 왜 이리 갑자기 우리한테 잘해 주는 건데?”

사검평이 자신이 입고 있는 새 옷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기대해라. 우리 해남검단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할테니까.”

“그러니까 왜?”

“우리 검단의 목적이 뭐야?”

왕일의 뜬금없는 질문에 범량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 개소리래? 당연히 왜구 박멸이지...”

“맞아, 네 놈 말대로 우리 검단이 왜구를 박멸 하기 위해 체질을 개선하고 있는 중이라고만 알아둬. 앞으로 더 많은 변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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