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61화 (61/167)

61. 다 썩었소.

“내일부터 인시정(새벽4~5시)에 검단 전체가 기상이라고?”

“그 꼭두새벽에 왜 일어나는데?”

“본격적인 무공 수련을 위한 체력을 단련한다던데?”

청룡대주와 부대주가 아직 도착 하지 않은 대주회의에 나머지 대주들이 수군덕거리고 있었다.

“왕일이가 오면 뭔 일인지 알려 주겠지.”

“그려, 갑자기 왠 호강인가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백호대주 봉필의 말에 나머지 네 개 대주와 부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왔어, 어... 누구신지?”

천막 안으로 들어서는 왕일과 승진을 보며 기린대주 범량이 반가운 얼굴로 손을 들었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청조 군관 복장의 염소수염 사내를 보고 손을 급히 내렸다.

“소개들 하지. 검단주님의 명으로 우리에게 검진을 가르치실 곡굉 대협이시네.”

“아, 대협 아니라니까! 어찌 되었건 회의를 시작 하자구.”

척 봐도 제일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사내의 말에 다른 인물들이 자리에 앉았다.

“청룡대주가 진행하게.”

곡굉의 말에 왕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어서 알겠지만 앞으로 검단의 체질을 대대적으로 개선할거야.”

“뭘 어떻게 한다는 건지 설명 좀 해 주쇼. 밥 잘 주고 옷 주고 천막 고쳐주는 것은 고마운데 이러고 나서 웃으면서 우리를 사지로 몰아 넣는거 아닌지 걱정이오.”

현무대주 사검평의 말에 좌중의 인물들이 동의한다는 듯 불안한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의심병은.... 절대 그럴일은 없수다.”

청룡대주 옆에 앉아있던 곡굉이 왕일에게 허락을 받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네 검단을 한 이주 정도 지켜보았는데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더이다. 거기 어디 대주라고?”

“현무대주 사검평입니다.”

“한달 동안 순찰을 나갔다가 왜구들과 조우하는 경우는 며칠인가?”

“한 열흘 정도 됩니다.”

“열번 정도 붙어서 몇 명이나 죽어 나가는가?”

곡굉의 질문에 사검평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잠시 셈을 해보고 입을 열었다.

“적게는 열다섯, 많으면 스물이 못 돌아옵니다.”

“다른 대도 비슷하겠지?”

그 때 유일한 여자인 주작대주 상수인이 손을 들었다.

“주작대의 경우 순찰이 아닌 정보 수집과 왜구의 동태 파악이 주임무이기에 말한 인원의 반 정도로 보면 됩니다.”

거친 바닷바람에 상할 대로 상한 피부에 생존을 위한 결기가 느껴지는 상수인을 보며 곡굉이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이야기 하지. 내가 여기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듯 하니 말을 놓겠네. 난 군인이 아니라네.”

군관복을 입은 사내의 입에서 자신이 군인이 아니라는 말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난 낭인이네. 무공도 그다지 높지 못하지만 운이 좋아 전장에서 십년을 넘게 굴러 다녔다네. 그래서 어떤 낭인은 나를 운수도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자는 허풍도라고 칭하기도 하네.”

곡굉의 잔잔한 어조의 말에 좌중의 인물들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어갔다.

“우리 검단주님을 난 전장에서 처음 만났네. 내가 검단주님을 못 만났으면 아마 여기서 자네들을 못 봤을 확률이 십할이지...”

“검단주님이 전쟁에 직접 참가 하셨소이까?”

백호대주 봉필이 참령어사라는 높은 직위의 관원이 직접 전쟁에 참여 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에 입을 열었다.

“물론이네. 삼년 넘게 오삼계군과 검을 맞대어 우리를 살리셨네.”

신임검단주가 단순이 붓만 놀리며 입만 산 관원이 아니라는 말에 묘한 호감이 피어올랐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알기로는 그 전에도 오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살아 남은 분이시지.”

곡굉이 목이 마른지 마실 것을 찾아 두리번 거리자 승진이 찻물을 따라 내밀었다.

“이런 이야기는 술 한잔 하면서 해야 제 격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리를 함께 하세나.”

찻물을 한 모금 마신 곡굉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좌중의 인물들을 일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까 백호대주라고 했나?”

“봉필이오.”

“자네가 던진 질문에 답을 주지. 솔직히 자네들에게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잘 곳도 마련해 주는 이유를 물었지? 답은 하나네. 이 곳 남해바다에서 왜구의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으려는 것이네.”

“그게 가능합니까? 솔직히 왜구의 문제는 명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해결 못한 난제인데 그게 되냐구요?”

기린대주 범량이 불쑥 손을 들고 말을 던졌다.

“되게 하려는 거지. 자네 검단원들을 지켜 보면서 느낀 점은 단 하나였네.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것!”

곡굉의 도전적인 말에 대주들과 부대주들이 인상을 구겼다.

“말이 심하시오.”

봉필의 말에 곡굉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 싫겠지만 그게 현실이네. 자네들 하루 하루 죽지 못해 살아온 것을 피부로 느끼겠더군. 부실한 식사에 비위생적인 숙소와 의복, 더러운 물을 마시고 녹봉도 없는.... 도대체 누구랑 싸워 이기겠는가?”

곡굉의 담담한 말에 다들 심정적으로 동의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 순찰을 나갈때면 두렵겠지. ‘이따 이 곳에 다시 돌아 올 수 있을까? 오늘 보는 해가 마지막 해가 아닐까?’ 이런 생각에 마지 못해 나서는 대원들이 저 왜구들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느냐 말일세.”

평소 자신들이 품은 생각을 정곡으로 찔러 들어오는 곡굉의 말에 다들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검단주는 기본으로 돌아가서 자네들의 썩어빠진 생각을 다 뜯어 고치려는 걸세. 물론 몸도 포함되지.”

“어떻게 고치려는지 알려 주십시오.”

주작대주 상수인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이제부터 청룡대주가 알려 줄걸세.”

곡굉이 고개를 끄덕여 왕일을 바라 보았다.

‘하아, 말 몇 마디로 저 불만덩어리들을 잠잠하게 했네. 왜 준이가 곡굉 형님과 같이 가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네.’

자리에 앉아 찻잔을 홀짝 거리는 곡굉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고는 왕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아침부터 전 검단원들은 인시정(새벽 4~5시)에 기상을 한다. 기초 체력을 다지기 위해 매일 한 시진 모래사장 구보를 한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신임검단주님도 참여 하신다. 어느 정도 체력이 올라오면 모래 주머니를 지급 하고 오후에는 검진을 수련한다.”

“그럼 순찰은 누가 나가?”

범량의 말에 다들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왕일을 바라 보았다.

“각 대를 반으로 나눠 한 조는 무조건 체력 단련 및 무공수련, 다른 한조는 순찰을 나선다.”

“야, 반만 나간다고? 그러다 왜구들을 만나면 다 개죽음을 당하는데?”

봉필이 흥분한 얼굴로 삿대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혈질이구만.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의견을 말하게.”

곡굉의 나직한 말에 봉필이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백호대주의 말이 맞다. 인원을 반만 운용하면 지금의 사상자 수 보다 더 많은 인원이 나오겠지. 그래서 검단주님과 함께 오신 황실과 무림고수분들이 순찰 시 항상 동행을 하실 것이다.

우리가 제 몫을 다할 때까지 일년이고 이년이고 함께 왜구들과 검을 맞대실 예정이다.”

“하루 이틀 그러다 말 거라면 아예 하지 말지?”

기린대주 범량의 말에 곡굉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범량이라고 했나? 자네 말대로 하루이틀 하다 말지 일년 이년이 갈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다. 내일부터는 어제의 쓰레기 같은 생활과 이별하는 것이다. 자신의 휘하 검대원들에게 이 점을 분명히 숙지시키기 바란다.”

****

같은 시각 북리준이 자신과 함께 검단에 도착한 전 인원을 검단원의 연무장에 소집했다.

“대인, 다 모였습니다.”

유검패가 동창과 금의위, 무림세가, 낭인들을 도열 시킨 후 보고를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도착 한 지 벌써 이주가 흘렀습니다. 각자 느껴지는 바가 있으시겠지요. 검패, 자네부터 이야기 해 보게.”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검단은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군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림집단도 아니고 의지도 체력도 무공도 아무것도 없는 무지렁이 같은 자들이 모여 하루 하루 죽어가는.... 죄송합니다!”

자신의 상관이 이곳을 거쳐 살아남았고 또한 이곳의 새로운 수장임에 죄송스런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아니다. 솔직한 것이 좋다. 하후상 소협, 말씀해 보시지요.”

자신의 애창을 오른손에 들고 주위를 둘러 본 후 하후상이 입을 열었다.

“킁, 나도 솔직히 말하리다. 여기는 다 썩었소. 부천호말대로 이런 자들을 데리고 왜구를 소탕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소이다.”

북리준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두 분의 말씀, 다 옳소이다. 다 썩은 것이 맞소이다.”

좌중의 인물들이 자신들의 앞에 굳건히 서 있는 검단주의 말에 집중했다.

“한 사람이 동상에 걸렸다 칩시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발가락 손가락부터 썩어 가고 있소. 그런데 이 사람을 치료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자가 나타났소.”

눈빛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 보고 있는 제갈청하와 눈을 맞추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손도 발도 썩어 가니 이 자를 그냥 죽여야 겠다? 이게 답일까요? 손가락과 발가락이 회복 불능이고 붙어 있어 봐야 다른 부위에 전염된다면 잘라 내야겠지요. 살릴 수 있다면 손과 발을 소독하고 좋은 음식과 약을 먹여 회복을 시킬 수 있다면 최상이겠고.”

무거운 침묵이 연무장을 짓누르는 가운데 검단주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본관은 자신이 있습니다. 회복 불능일지 가능일지 일단 시도를 해 보려 합니다. 이에 여기 계신 분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어떻게 도움을 주면 되겠소이까?”

팽무강의 질문에 북리준이 고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제부터 부군사이신 제갈청하 여협이 설명을 할 것입니다.”

북리준이 뒤로 물러 나고 면사와 경장 차림의 제갈청하가 앞으로 나섰다.

“검단의 체질 개선을 위한 행동들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바닥난 체력과 기력을 회복 하기 위해 내일부터 전 검단원들의 구보가 시작됩니다. 그 이후 다섯 개대의 인원을 둘로 나눠 한 조는 하루종일 삼재검진과 무공수련을, 다른 한조는 왜구 토벌을 위한 마을 순찰을 돌 예정입니다.”

제갈청하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주시하는 군웅들을 일별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 순찰조에 여러분들을 분산 배치 합니다. 검단주님의 의지는 조우하는 왜구들을 단 한명의 생존자도 없이 다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순찰하는 해남검단과 만나면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각인 시킬 때 까지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말고 왜구를 쳐 없애야 합니다.”

그 때 유검패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청했다.

“유부천호님 말씀 하시지요!”

“어떻게 인원을 분산 하실지 계획을 알고 싶습니다.”

“총 열 개의 해남검단원들의 순찰대에 검단주님과 기 협의한 고수님들을 배치할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검단주님이 직접 각 조에 참여 하여 순찰을 하실 예정입니다.”

회합이 파한 후 북리준이 하후상과 곡굉을 따로 불러내었다.

“상이 너는 내일 해남검단원 전체를 소집해 줄테니 하후세가의 인원들과 함께 창술을 배울 검단원들을 백명 정도 뽑아내 줘.

그 인원들은 하후세가의 창술만 훈련시켜 각 대에 창병으로 분산 배치할 거야.”

“알겠어. 맡겨줘!”

이어 곡굉을 향해 북리준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형님은 전 대원들이 구보를 하는 동안 연무장에 팔조삼재검진을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세요.”

“알겠네.”

그 때 청룡대주 왕일이 조심스럽게 북리준에게 다가왔다.

“검단주님,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손님?”

제갈청하가 난데없이 찾아온 손님이라는 말에 북리준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천산에서 오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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