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64화 (64/167)

64. 무효야

저 앞에 삼십이 족히 넘어 보이는 왜구들이 약탈과 강간에 대한 열망으로 번들거리는 광기에 절은 눈을 치켜 뜬 채 뛰어 오는 모습을 태연자약하게 쳐다 보는 세 사람을 보며 범량의 다리가 후둘거리기 시작했다.

‘씨풀, 이거 좇되었네.... 노망난 늙은이 뒷 수발 하다 황천가게 생겼네.’

“이봐, 부탁이 있어!”

거대한 묵도를 등에서 손으로 옮긴 노인의 말에 범량이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유언을 남기는 거야 뭐야. 씨팔...’

“말해 보슈!”

남들 보다 빠른 두 발을 믿고 냅다 뒤로 튈 준비를 하고는 범량이 입을 열었다.

“우리 셋 중 어떤 놈이 가장 먼저 열 명을 베어내는지 셈을 해 주게. 그리고 난 후 어떤 놈이 더 추가로 저 놈들의 목을 베는 지 확인해 주게. 아주 아주 중요한 일이네.”

“이런 미, 미친 노인네가....”

범량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막대광이 ‘와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거도를 손에 든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허, 이놈의 자식.... 반칙이다!”

‘콰지지직 콰직 콱 콰직’

막대광의 묵도의 궤적에 걸린 검이며 도며 사람이며 두 조각으로 쩌억 갈라지는 모습에 범량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크에에에엑 쾌액 커억 컥컥”

단 일도에 자신이 내 뻗은 무기와 함께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단말마의 비명도 못 내지른 채 육편이 되어 가는 왜구들이 순간 불쌍해 보였다.

‘피윳 피피피핑 핏 피핏’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양단해 내는 무지막지한 도세 옆에 간결한 움직임으로 달려드는 왜구의 목만 똑똑 따내는 노인의 검무에 범량의 벌린 입이 더 벌어졌다.

삭도란 무엇인가? 본래 중들이 머리를 빡빡 밀어 제낄 때 쓰는 도를 주방 숙수들이 요리할 때 편리하여 가져다 쓴 말 그대로 주방도구였다.

그런데, 범량의 앞에 두 개의 삭도를 든 채 왜구들의 팔다리를 발라내는 삭도는 더 이상 주방 도구가 아닌 세상에 둘도 없는 살인도구였다.

‘파바바바바박 파파바박 파바박’

보이지 않은 경쾌한 삭도의 몸놀림에 달려든 왜구들의 살점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삭도가 지나간 자리에 목이며 팔이며 살 한점 없는 뼈만 남은 왜구들이 그대로 스러져갔다.

“미, 미쳤네.....”

범량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 손으로 부여 잡고 겨우 서서 고개를 드니 어느새 삼십명이 넘는 왜구들 중 단 한명도 서 있는 자가 없었다.

“난 열 다섯!”

“미친놈, 죽은 놈에게 칼질하는 것은 무효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곤오를 향해 막대광이 자신의 주먹을 치켜들었다.

“죽을래?”

곤오의 목이 쑥 들어가고 독고우가 자신의 검을 수납한 채 혀를 찼다.

“넌 열 하나, 내가 아홉, 곤오는 열넷!”

“시불 삼십이 넘었잖아!”

“네 놈 입으로 삼십이라 했으니 이 내기는 무효다.”

미련없이 신형을 돌린 독고우의 앞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범량이 눈에 들어 왔다.

“자네, 기초체력을 강화해야겠네.”

“젊은놈이 식은 땀은... 쯧쯧!”

지옥의 사신 같은 신위를 보인 노인네 뒤를 순박한 얼굴의 청년이 웃으면서 따랐다.

“내, 내가 미쳤나 보다.... 저런 고수들에게 늙은이라고 했으니.... 으으으.”

여전히 후둘거리는 다리로 전방에 육편이 되어 버린 왜구들을 일별하고는 신형을 돌려 떨리는 다리로 노인고수님들을 따랐다.

****

마을 순찰을 마친 대주 다섯이 매번 순찰을 다녀 온 후 만나 저녁식사 겸 술 한잔 하는 자리에 모여 앉았다.

다들 멍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술잔에 손도 안대는 모습에 오늘 영 내에 머물렀던 주작대주가 영문을 모른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이, 정신들 차려! 어디다 정신머리를 놔 두고 다니는 거야?”

상수인의 버럭 소리에 눈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한 대주들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는 벌컥 거리며 단숨에 들이켰다.

“아, 진짜....”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려는 주작대주를 옆에 앉은 왕일이 손을 들어 말렸다.

“조금만 기다려 봐. 오늘 왜구들과 조우한 충격에서 빠져나오게....”

“도대체 오늘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단체로 멍 때리는 거야?”

“어마 어마한 것을 봤지....”

기린대주 범량이 자신의 기린대와 함께 나선 두 노인과 그의 제자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오늘 내가 본 것을 못 믿을 거다. 네 놈들은 한 열명씩 고수들을 대동했는데 난 늙다리 둘에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촌놈을 데리고 나가라고 했을 때 재수 똥 밟았다고 생각했다.”

범량이 다시 목이 타는지 술잔을 들어 단숨에 털어 넣었다.

“촌장하고 이야기 하는데 갑자기 늙다리 하나가 나를 부르더니 밖에 왜구가 왔으니 나오지 말라는 말에 아주 노망이 제대로 난 줄 알았다. 뭐라고 했더라....자기들이 해결 할테니 혹시 흘린 놈들이 마을로 들어오면 처리 하라나.....

휘적거리며 마을 입구로 나서는 세 사람을 잡으러 뛰어 가는 중에 삼십이 넘는 왜구놈들이 기세등등하게 마을로 들어오려는 모습을 보고 엿 되었다는 생각에 도망가야 하나 망설이는 중에 두 노인네와 젊은놈이 내기를 하더라. 누가 더 많이 죽이는지 말이다.”

범량의 말에 다른 대주들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거대한 묵도를 든 노인이 도를 내리치니 칼과 함께 왜구들이 두쪽이 나고 쇠꼬챙이 같은 노인의 칼이 감나무에 감을 따듯 똑똑 왜구들의 목을 따는 옆에 두 자루 삭도를 팽이처럼 돌려 대며 왜구들의 손이며 목이며 살을 발라내는 촌놈의 모습에 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삼십이 넘는 왜구놈들이 육편으로 땅에 널부러 지는데 일각 정도 밖에 안 걸렸다. 난 앞으로 그 고수분들을 하늘 같이 모시기로 했다.”

범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호대주 봉필이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난... 창을 배울거야!”

“웬 뜬금없이 창?”

상수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평소 실없는 말을 자주 하는 봉필을 쳐다 보았다.

“우리 백호대는 하후세가의 고수들과 같이 순찰을 나섰다가 마을을 습격하러 이동하는 왜구무리들을 만났다.”

봉필이 자신의 눈 앞에 아직도 선연한 전투장면을 되뇌이며 입을 열었다.

“하후세가의 고수 열이 전면으로 나서더니 우리 보고 잘 보라고 하더라. 난 솔직히 왜구새끼들이 얼마나 독한지 경험 못 해본 풋내기들이 뜨거운 맛을 보겠다고 생각했다.”

봉필의 말에 다른 대주들이 그럴 것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일렬로 널찍하게 서서는 달려오는 왜구들을 향해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씨익 웃음을 짓고는 ‘거창’ 하고 툭 말을 내뱉더라.

순간 열 개의 창이 전면을 향하는 듯 하더니 ‘패애앵’ 묵색의 창이 튀어 나간다고 생각 했을 때 벌써 한 놈의 가슴이 뻥 뚫렸더라.

내지르는 창에 꿰이고 휘둘러지는 창대에 검이고 팔이고 닿는 족족 부러져 터져 나가고 팽이처럼 돌아가는 창의 궤적에 걸린 왜구들이 수수깡 마냥 부러져 나가는 모습에 우리는 숨도 못 쉬었다.”

봉필도 목이 타는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뒤쪽에서 자신의 편들이 허무하게 꿰이고 부러져 나가는 것을 본 왜구 십여명이 신형을 돌려 냅다 도망 가는 모습을 보고 하후세가의 수장되는 자가 나직하게 한 마디 하더라, 투창이라고...그 후에 그들의 손을 떠난 창들이 죽어라 달려나가는 왜구들의 등판에 정확하게 틀어 박히며 그 힘에 못 이겨 십여보를 더 뛰어가다 풀썩 다 쓰러지더라.”

봉필의 말에 좌중의 일행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순식간에 왜구들을 박살 낸 하후세가의 수장이 우리를 돌아 보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전장에서는 창이 제일이라고! 누구든 원하면 창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황홀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는 봉필을 보고 혀를 찬 주작대주가 왕일에게 눈길을 돌렸다.

“너는 신임검단주와 함께 간 거 아니었어? 검단주의 무공은 어때?”

상수인의 물음에 왕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해우촌에서 신호탄이 터져 오르자 검단주가 냅다 날아 가고 그 뒤를 동창 고수들이 쫒아가길래 발에 불이 나게 뛰어 갔더니 벌써 다 끝났더군. 삼십명이 넘는 왜구들이 다 죽어 넘어져 있고 겨우 살아 남아 도망치려는 놈 세 놈만 조졌다.

솔직히 검단주님의 무위는 보지도 못했다. 동창 고수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보니 검단주가 혼자 스무명의 왜구를 썰었다고 하더라구.”

주작대주가 말없이 술잔을 채우고 비우던 현무대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희는 누구하고 나갔지?”

“금의위...,, 아, 팽가 무사 하나.”

“할 말 없어?”

“뭔 할 말이 있겠냐? 금빛이 번쩍 거릴 때 마다 왜구들 목이 공중에 떠오르고 검이며 권이며 각이며 걸리는 족족 터지고 부러져 나가는 모습에 정말 다른 세상 사람 같더라. 아, 그 중에 팽가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뭔 놈의 도가 그리 무지막지한지.... 왜구들이 검을 내밀면 그 사각을 파고 들어 단칼에 목이고 몸통이고 걸리는 족족 둘로 갈라버리더라.

금의위놈들도 대단했지만 그 팽가의 도가 난 더 무섭다....”

현무대주 사검평이 입을 닫고 술잔을 들이키자 주작대주가 왕일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말 왜구들을 이번 기회에 다 쓸어낼 수 있을까?”

“될 것이다. 신임검단주가 황제의 명으로 저런 고수들을 대동하고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뭔가 다를 것이다.”

****

“왜어를 배워야 겠어!”

처음 왜구들과 조우한 일행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북리준이 불쑥 말을 꺼냈다.

“왜 갑자기?”

옆에 앉아 술잔을 들어 홀짝 거리던 제갈청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삼년 동안 왜구 놈들을 쫓아내려면 내가 대화가 되어야 할 것 같아. 언제까지 통역할 사람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잖아?”

자리에 둘러앉은 독고우, 막대광, 곤오를 위시하여 하후승, 팽무강, 모용민, 언철진, 유검패, 제갈청하, 제갈풍 등이 북리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검단주, 주작대주가 왔소!”

곡굉의 목소리에 일행들이 일제히 북리준에게 시선을 옮겼다.

“왜구 놈들의 근황에 대해 알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들어오시오.”

곡굉의 안내로 주작대주 상수인이 조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검패, 자리를 내 주게!”

“이리로.”

안내한 자리에 상수인이 앉자 검패가 자리 뒤 벽에 말아 두었던 남해 전도를 펼쳐 내었다.

“주작대주, 식사는 하셨소이까?”

“네, 단주!”

“두 가지 용건이 있어 주작대주를 불렀소이다. 너무 긴장 하지 않았으면 하오이다.”

‘너 같으면 긴장 안되겠냐? 방금 까지 여기 있는 자들이 삼두육비의 괴물이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왔는데....’

상수인의 눈에 시시덕 거리며 연신 농을 주고 받는 두 노인과 그 옆의 촌놈같이 생긴 젊은이를 보며 범량의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묵창을 뒤에 세워 놓은 우락부락한 하후세가의 수장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던 봉필이 떠올랐다.

“첫째로 본관이 왜어를 배웠으면 하오. 적당한 사람을 붙여 주었으면 좋겠소.”

주작대의 성격상 염탐, 침투, 정보 수집이 주업이어서 오십여명의 주작대원 중 반 수 이상이 왜어에 능통했다.

“문제 없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직접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주작대주가 하시는 일이 많은데 그리 수고를 끼칠 수는 없지요. 일단 알아서 해 주시고...”

북리준이 심하게 경직된 자세로 굳어 있는 상수인을 보며 자신의 잔을 들었다.

“먼저 한잔 하시고 나서 편하게 현재 왜구들의 상황를 이 곳에 계신 분들에게 설명 부탁하오.”

유검패가 잔 하나 가득 술을 채운 후 상수인에게 가져다 주자 단숨에 잔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재 마사히로, 자칭 쇼군 마사히로와 그의 신민이라는 자들의 근황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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