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68화 (68/167)

68. 내 것이다.

해남도 포구에 도착한 범선에서 내린 일행들을 백색문사복에 학익선을 손에 든 마흔 초중반 되어 보이는 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저는 남해검문에 군사를 맡고 있는 단천수사 방백이라고 합니다.”

공손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방백의 앞에 제갈풍이 앞으로 나섰다.

“저는 해남검단에 군사직을 맡고 있는 철면신산이라고 하오. 반갑소이다.”

“아, 제갈세가 분이셨군요. 그럼 옆에 계신 소저분은....?”

“숙부님과 함께 해남검단의 부군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제갈청하라고 합니다.”

평소 친우들과의 왈패 같은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조신한 모습에 북리준이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신임검단주님께서는?”

“제가 황실의 명으로 해남검단을 새로 맡게 된 도천학이라고 하오.”

“아, 대인! 반갑습니다.”

검단주가 자신과 대동한 사람들을 간략히 소개를 한 후 준비해 온 마차에 올랐다.

“약 반 시진 정도 이동을 해야 합니다.”

방백이 자신의 말에 올라탄 후 마차 옆에 붙인 채 말을 건넸다.

해남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전각군이 즐비한 남해검문의 위용에 다들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못지 않군...’

제갈풍이 남해검문의 정문에 내려 고개를 들어 산 하나를 깎아 층층이 쌓은 전각들을 보고 내심 혀를 내둘렀다.

“허허, 이거 참....”

독고우가 정문에 들어서자 마자 좌우에 정렬한 약 이백여명의 남해검문인들이 뿜어내는 삼엄한 기세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저희 남해검문의 대표적인 무력 부대인 흑건질풍대와 백건폭풍대입니다. 마침 검문에 들어와 있어 대인께 소개해 드리려고요.”

왼편에 검은색 두건을 두른 백여명의 검수들과 오른편에 백색 두건을 두른 백여명의 도수들이 한껏 위압적인 기세를 숨김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대단한 기세군.”

일반인들이라면 감히 지나갈 수 없을 정도의 살기를 내뿜는 무인들 사이를 지나며 북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이 놈들 우리 보고 겁먹으라는 것 같은데?’

제갈청하의 전음에 북리준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겁먹은 척 해야 하나?’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언제라도 검과 도가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려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살기를 태연하게 받아내며 걸음을 옮기는 호군참령어사를 보며 방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접한 놈은 아니구만....’

유검패는 일개 무림 문파가 자신의 상관인 어사대인에게 살기를 뿜어내는 상황에 화가 치밀어 올라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북리준의 손이 검패의 어깨에 올려졌다.

‘신경 쓰지 말게. 이 정도 시위에 과민 반응할 필요는 없네.’

차분한 북리준의 전음에 유검패가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두 무력 부대가 만든 통로가 거의 끝나갈 무렵 두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이쪽은 해남검단의 신임 검단주로 오신 도천학 대인이시네. 인사들 하게!”

방백의 말에 비취가 박힌 흑색 영웅건을 두른 검수가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흑건질풍대주 탈혼파랑 이라 하오!”

“백건폭풍대주 섬전쾌도라 하오!”

“감히 어사대인께!”

유검패가 자신의 검에 손을 댄 채 하대를 하는 두 대주를 노려 보았다.

“하하, 이해해 주시지요. 두 대주는 오직 저희 남해검문주께만 존대를 합니다.”

“괘념치 않습니다. 길을 여시지요.”

북리준이 두 대주가 자신에게 쏘아 보내는 살기를 무심한 얼굴로 흘려 보내고는 미소를 지었다.

“두 대주께서는 아무에게나 살기를 흘리시나 보오. 저 너른 중원에서 그런 행동을 하다 비명횡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더이다.”

방백과 북리준이 두 대주 사이를 지나쳐 갈 때 뒤에 있던 독고우가 뒷짐을 진 채 툭 말을 뱉고 지나갔다.

“이런 미친....”

흑건질풍대주의 뒤에 서 있던 젊은 검수가 검을 뽑으려 하자 탈혼파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만!”

젊은 검수가 대주의 말에 검에서 손을 떼었다.

저 멀리 검문주가 기거하는 전각을 향해 나아가는 검단주 일행들의 뒷모습을 보며 섬전쾌도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왠 어울리지 않는 가면 놀이?”

“저 놈과 검을 한번 섞어보고 싶군.”

탈혼파랑의 말에 섬전쾌검이 얼굴에 한껏 비웃음을 떠올렸다.

“센 척 하는 관리놈을 너무 높게 보는 거 아냐?”

“절대 우리 밑은 아니다.”

‘海南劍閣(해남검각)’이라 웅혼한 필체로 양각된 현판이 인상적인 전각 앞에 다다르자 그 앞에 뒷짐을 진 채 백의무복에 검은 든 서른 중반 정도의 사내가 일행들을 내려다 보았다.

“남해검문의 문주님이십니다.”

방백의 말에 북리준이 오연히 자신을 내려다 보는 칼 같은 예기를 온 몸에서 발산하는 사내를 무심한 표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드디어 만났구나....’

“어서 오시오. 현 남해검문을 책임지고 있는 목철군이라 하오.”

“반갑소이다. 해남검단의 군사를 맡고 있는 철면신산이라고 하오이다. 이쪽은 호군참령어사의 신분으로 검단주로 내려오신 도천학 대인이십니다.”

코와 눈 전체를 가린 가면을 쓴 젊은 사내를 예리한 눈으로 훑어보던 목철군이 계단을 내려왔다.

“반갑소이다.”

“나도 반갑소!”

서로 포권을 취하며 예를 표하고는 제갈풍이 일행들을 목철군에게 간략하게 소개를 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먼 길을 오시느라 시장 하실텐데 음식과 술을 준비해 놓았소이다.”

전각 안에 들어서 음식이 가득 차려진 방 안에 자리를 잡을 일행들에게 목철군이 건배를 제의했다.

“해남검단의 무궁한 발전과 왜구들의 섬멸을 위하여!”

목철군과 방백, 북리준 일행들이 술잔을 비우고 형식적인 인사말이 오가는 중에 제갈청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군사를 맡고 있는 제갈청하라 합니다.”

“중원에 소문이 자자한 무림삼화 중 한 분을 보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 하오이다.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백봉의 옥용을 볼 수 있을는지....”

“제 얼굴이 중요한 자리가 아니기에 해남검단주님의 요청 사항을 말씀 드리려 합니다.”

완곡하지만 무례하지 않게 거부하고는 말없이 술잔을 비우던 북리준과 눈이 마주친 제갈청하가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애석하지만 다음 기회를 바랄 밖에.... 어떤 요청사항인지 말해 보시오.”

목철군의 얼굴에 어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에 제갈청하가 화를 꾸욱 내리 눌렀다.

“청조정에서 왜구들을 남해 바다에서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 검단주님과 저희들을 파견 하였습니다.

뭍에 올라오는 왜구들은 저희 검단에서 대응이 가능 하나 바다 위에서 약탈을 일삼는 왜구들에 대한 협조를 요청 드리려 합니다.”

목철군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계속 하시오!”

“남해검문의 배와 인원의 지원을 요청 드립니다.”

제갈청하의 말에 목장문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백을 쳐다 보았다.

“하아, 저희 남해검문에서 오년에 한번, 약 육개월간 모든 검문의 선박에 대한 대수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대수리 기간에는 어떠한 군선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 대수리 기간이 언제 끝나는지요?”

“사흘전에 시작 했으니 온전히 육개월 후에나 가능 하겠지요.”

방백의 말에 목철군이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군사의 말대로 시기가 안 좋군요. 대수리 기간에는 모든 선박의 출입을 금하고 있으니 육개월 후에 고려해 보도록 하지요.”

“그건 어사 대인에 대한 예의가....”

제갈청하가 발끈 하여 소리를 치려는 찰나 북리준이 손을 들었다.

“알겠소. 우리가 운이 없군요. 육개월 뒤에 다시 한번 논의키로 합시다.”

북리준의 말에 목철군이 대소를 터뜨렸다.

“어사 대인께서 참으로 화통하십니다.”

“별 말씀을.... 안 되는 일을 제가 억지를 쓴다고 배를 내어주지 않을테니까요.”

“그나 저나 어사대인의 무공이 출중 하다고 소문을 들었소이다.”

“헛소문을 들으셨나 봅니다.”

“하하, 그러지 마시고 우리 남해문인들에게 어사대인의 무공 한 자락을 견식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소이까?”

목철군이 어사의 무공 연원을 캐 보려는 말에 북리준이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술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목장문인의 별호가 낙일검제라고 들었소이다. 감히 검제라는 별호를 가지고 계신 분의 눈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군요.”

“허명뿐인 이름이라 그리 신경쓰지 않소이다. 들리는 소문에 뭍에 상륙한 왜구들이 어사대인의 칼에 추풍낙엽처럼 스러졌다고 하더이다.”

“헛소문일 뿐이지요.”

태연하게 술잔을 드는 해남검단주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목철군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내가 무섭소이까?”

대뜸 도발적인 말에 유검패가 발끈 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엄하오. 일개 무림 문파 장문이 아무리 지고한 위치에 있다고 하나 대청조의 어사대인께 이 무슨 무례한 언사인지....”

“하하, 미안하오. 동창의 부천호시라고...”

방백이 목철군에 귀에 대고 뭐라 소근 거린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쟁쟁한 명성의 현 동창 영반의 양자시라니... 전도가 양양하신 분이시군.”

“두렵소!”

불쑥 북리준이 내뱉은 말에 놀란 유검패의 어깨에 손을 얹어 자리에 앉혔다.

“근 백년래 그 어렵다던 남해칠십이파검을 대성 직전 까지 수련하시고 무림 동도들이 낙일검제라는 화려한 칭호를 주신 분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겠지요.

단, 본관은 여지껏 살아온 날 동안 두려운 것들이 제 앞을 많이 가로막았지요. 그 때 마다 그것들을 철저히 부숴 버리고 본관은 이 자리에 섰소.

장문의 무공이나 남해검문의 힘이 두렵기는 하지만 무서워서 피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오.”

북리준의 말에 철면신산과 제갈청하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하하, 북리봉공의 완승일세!’

독고우가 북리준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하하, 본 장문이 한방 먹었군요. 어사대인의 무공도 그 입만큼이나 날카로웠으면 합니다.”

“본관과 검을 섞을 기회는 오늘이 아니더라도 있을터이니 서로 원하는 바를 이야기 했으니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했으면 하오.”

북리준의 말에 애매한 저녁식사가 끝나고 남해검문도의 안내로 각자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목철군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어사대인과 잠시 독대를 했으면 하오.”

장문인의 말에 방백의 얼굴에 저어하는 빛이 떠오르다 머리를 흔들며 방을 나섰다.

“먼저들 쉬고 계시오. 잠시 장문과 이야기를 나눈 후 들어가겠소.”

북리준이 자리에 다시 앉자 목철군이 자신의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남해검문의 발전을 위해!”

말없이 잔을 들이킨 북리준의 귀에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장문의 말이 들려왔다.

“본 장문은 말이오.... 어릴 때부터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빼앗겼을 때 도무지 그 상황을 참지 못했소. 시간이 얼만큼 걸리더라도 기필코 그 것을 다시 찾아오는 일이 반복되니 선친과 가문의 사람들이 더 이상 내 것을 건드리지 않더이다.”

묵묵히 자신의 잔을 채우고 비우던 북리준의 변함없는 얼굴을 보며 목철군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 것을 건드리려 했던 내 바로 밑 동생이 있었소. 이름이 아마 목철상이었던가....?

오년 전 나와 같이 이 장문의 자리를 다투다 내 손에 목이 달아났소. 한 일주일 정도 그 놈의 잘린 목과 몸을 장대에 걸어 두고 그 놈의 처자식과 처가, 그 놈을 따르던 놈들도 다 목을 쳐서 그 밑에 쌓아 두었지.”

잔잔하지만 그 가운데 타오르는 분노가 확연히 느껴지는 가운데 여전히 북리준은 잔을 비워내었다.

“그 이후 내 것을 건드리는 자는 이 해남도에는 더 이상 없더이다. 한데 말이오..... 해남검단이라는 곳이 내 것이었나 아니었나 조금 헷갈리던 차에 청조정에서 어사대인을 내려 보내고 남해검문은 손을 떼라는 칙명을 받아든 순간 해남검단이 내 것이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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