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침입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 놓은 북리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장문을 쳐다 보았다.
“혼잣말을 많이 하시는 편이시군. 벽에 대고 이야기 하다 지쳐 본관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오?”
북리준의 고저 없는 말에 목철군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본 장문 앞에서 그리 말하는 사람을 너무 오랜만에 보오.”
“본관이 듣기로는 해남검단이 단 한시도 남해검문에 소유로 들었던 적은 없었소이다. 해남검단의 출범 자체도 청조정의 의지였고 그에 따른 제반 비용도 청조에서 다 부담 하였소.
북경과 이 곳에 지리적 거리가 있어 부득이 남해검문에 유지를 부탁한 상황으로 파악 하고 있소이다.
해남검단이 남해검문도 아니고 그 장문인의 소유라는 말을 어불성설이고 유쾌하지 않은 농담이군.”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단조로운 어조로 입을 여는 신임검단주를 향해 이글거리는 눈을 치켜뜬 목철군이 이를 꾸욱 깨물었다.
“얼마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소이까?”
“그건 내 의지지요. 목장문과 함께 논의할 문제는 아닌 듯 하오.”
칼 같은 살기를 전신에서 뿜어내 신임검단주에게 쏟아내었으나 단 한 번의 찡그림도 없는 담담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고 목철군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모처럼 강단이 있으신 분이 내려오셨구려. 모쪼록 대인 말대로 무탈하게 있다 영전 하셨으면 하오이다.”
북리준이 방을 나서고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문도의 뒤를 따라 처소로 이동을 시작 하자 구석 그림자 안에 묻혀 있던 방백이 신형을 일으켜 방안으로 들어섰다.
“부러질지언정 꺾일 놈은 아니다. 방백! 놈의 초상화를 그려 ‘섬’에 들여 보내라.”
“존명!”
“그 거슬리는 가면은 왜 쓴거지?”
“아마 검상이나 화상을 당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보기에 좋지 않으니 가린 것이겠지요.”
“어찌 되었건 그 놈 면상을 빨리 안 봤으면 좋겠다고 ‘섬’에 압력을 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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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돌아오니 일행들이 북리준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었다.
“뭘 그리 걱정을 하고 계시는 거요?”
제갈청하가 무사히 방 안으로 들어서는 북리준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장문이 검단주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 않는 모습이 걱정 되었지.”
“목장문의 무공이 높다고 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으니까 걱정 하지마!”
“어사대인의 무공을 그 건방진 놈이 봐야 입이 떡 벌어질 것인데....”
유검패가 아까 목장문이 검을 섞자는 제안을 북리준이 받아 들였으면 내심 바라던 서운한 마음을 내비쳤다.
“괜히 나에 대한 경각심을 심을 필요는 없다.”
“왜 독대를 원했는데?”
제갈청하의 물음에 일행들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이 시원찮았다고 실토하더라고. 어릴 때부터 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빼앗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 왔다나 뭐라나.... 그리고 자신의 동생이 자신의 자리인 장문위를 넘보기에 목을 자르고 그 처자식과 처가, 식솔들을 다 죽여 장대에 걸어 놓은 동생의 시신 밑에 쌓았다나.... 별로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주절 거리더라.”
“웬 뜬금없는 내 것?”
“해남검단이 자기 것인지 헷갈렸는데 내가 오고 나서 자기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대. 아마 다시 가져 가겠다고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던 거겠지.”
“완전 미친 놈이었구만!”
제갈청하의 말에 독고우가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미친놈은 맞는데 위험한 미친놈인 것 같더군.”
“저도 독고대협과 같은 생각입니다. 자신의 원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위험한 자로 보였습니다.”
철면신산이 독고우에 말에 동의를 했다.
“어찌되었건 우리가 왔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 했군요. 남해검문에서 왜구들을 소탕하기 위한 배와 인원을 안 줄거라는 사실을 확인 했으니까요.”
유검패의 말에 제갈청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군사는 검패와 함께 검단에 돌아가면 남해검문의 눈과 귀를 차단할 방법을 강구해 주었으면 해.”
북리준의 말에 제갈청하와 유검패가 서로를 쳐다 보았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남해검문에서 알게 되는 것은 스스로 우리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것이니까. 알겠어! 돌아가서 옥석을 가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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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용모파기가 도착했소이다.”
신이치 앞에 선 야키토가 신임 해남검단주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초상화를 내밀었다.
옆에 서 있던 죠닌 아야토가 초상화를 받아 품에 넣었다.
“저 쪽에서는 하루빨리 의뢰를 완수 했으면 합니다. 언제쯤 출행 하실 예정이신지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묵묵부답인 신이치를 대신해서 아야토가 입을 열었다.
“이틀 후 출행할 예정입니다. 길을 잡아줄 자 둘과 의뢰 완료 후 퇴각로를 안내 해 줄 자 둘을 부탁 드리오.”
“출행 인원은?”
“총 열이오.”
“알겠소이다. 이틀 후 열명! 차질없이 준비 해 두겠소.”
자신이 와서 나가는 동안 감았던 눈을 한번도 뜨지 않는 신이치의 모습에 속으로 쌍욕을 내뱉은 야키토가 방을 나섰다.
“준비는?”
“이십호에서 이십오호, 백십호에서 백십오호까지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사히로 놈의 건방진 얼굴에 던질 놈의 머리를 잘라 오너라.”
“기껏해야 오합지졸 모임인 해남검단의 청조 관리 하나입니다. 놈과 함께 내려온 고수들만 조심한다면 하하나 하상정도의 임무입니다.”
“방심하지마라. 마사히로 놈이 우리에게 처음 하는 의뢰이니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다.”
“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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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검단에 돌아와 검단회의를 주최한 북리준이 좌중의 인물을 둘러보았다.
“요새 왜구들은 어떠한가?”
“잠잠합니다. 열흘 동안 뭍에 오른 삼백명이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겁을 집어 먹은 듯 합니다.”
청룡대주 왕일의 말에 다른 대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심하지 말아야 하오. 놈들이 뭔가 야료를 부리기 위한 시간을 버는 것일 수도 있소.”
“검단의 반은 빠짐없이 순찰을 나가고 있으니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될 듯 합니다.”
모용민의 말에 옆에 앉은 언철진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곡교관!”
“말씀하시오.”
왕일과 상수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던 허풍도가 손을 들었다.
“팔조삼재검진의 진척 사항을 보고해 주시오.”
북리준의 말에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곡굉이 입을 열었다.
“일단 전 검단원들이 팔조삼재검진을 한번씩은 경험해 본 정도입니다. 그들이 왜구들과 조우 했을 때 효과를 발휘하려면 육개월 이상 잡아야 될 듯 합니다.”
“시간이 더 걸려도 좋소. 그들이 왜구들과 조우했을 때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소.”
“알겠습니다.”
“하후교관!”
“말씀하십시오.”
“해남창대의 진척 사항을 보고해 주시오.”
“일단 하후세가에서 함께한 가솔들과 창에 적합한 검단원 백을 뽑아 창술을 익히기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훈련에 돌입 하였습니다.
단주님의 말대로 이들이 홀로 왜구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지는 요원하기에 두 명이 함께 움직이는 창진을 훈련시킬 예정입니다.”
“현장에 투입하려면 얼마나 걸리겠소?”
“저도 육개월 정도는 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합니다.”
“상대주!”
이번에는 주작대주를 호명하자 화들짝 놀란 상수인이 벌떡 일어섰다.
“네, 네!”
“제갈 부군사와 함께 주작대를 보강할 방안을 찾으시오. 자금은 충분하니 인원 뿐 아니라 인맥망을 확충하시오. 마사히로의 왜구 뿐 아니라 남해검문에 대한 탐문을 새로 시작 하시오.
왜구와 남해검문에 대한 정보 수집은 동급이오. 이 회의가 파하는 대로 제갈부군사와 함께 논의를 시작 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상수인이 짧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자 곡굉이 손을 들었다.
“곡교관, 말씀 하시오!”
“주작대의 보강에 관해 조언할 것이 있을 듯 하니 제가 참석해도 될런지요?”
“곡교관이?”
‘저 귀찮은 것은 죽어라 도망다니는 형님이 왠일이래?’
북리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 보는 곡굉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오. 곡교관이 도움을 주신다니 주작대주가 한 시름 덜겠군요.”
“감사합니다!”
상수인이 옆에 앉은 곡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회의를 파하고 북리준이 자신의 집무실 겸 처소로 향하려는 찰나 독고우과 막대광, 곤오가 북리준에게 다가왔다.
“두 분 숙부님께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독고놈이 뭐라고 했는데 그 말이 그럴 듯 해서 말이야.”
막대광이 독고우의 어깨에 손을 척하니 올렸다.
“무겁다! 다른 것이 아니라 북리봉공의 처소가 너무 외지고 해서 우리 셋이 그 옆으로 옮기려고 하네.”
자신의 처소에서 해남검단에 대한 구상과 개인적인 무공수련을 위해 일부러 외진 구석에 연무장을 갖춘 곳을 마련해서 기거하고 있었다.
“무슨 연유로 그러시는지요?”
“지금 이 해남검단의 구심점이 누구인가? 바로 자네 아닌가? 이 점은 우리만이 아는 게 아닐거라는 것이지. 왜구놈들도 자네만 없어진다면 자신들을 위협하는 검단이 지리멸렬할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을 것이네.”
독고우의 말에 막대광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쳤다.
“뭘 그리 뺑뺑 돌려 말해? 독고놈의 말은 자네를 해치기 위해 자객이 들 수도 있다는 거야. 듣자하니 왜구놈들 중에 자객집단도 있다매?
여기 이 놈과 곤오놈이 중원을 대표하는 풍령곡의 전대곡주고 제자이니 아무래도 대비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거지.”
“막가 놈 말이 맞네. 물론 북리봉공의 무공이 빼어나 그리 걱정할 것은 없겠지만 살수라는 존재가 자신보다 무공이 높은 자도 해할 수 있다는 거네.”
곤오가 자신의 스승의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분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저는 괜찮지만 세 분이 그리 말씀 하시니 처소를 제 옆으로 옮기시지요. 단, 새벽에 제 개인 수련때 조금 소음이 날 수도 있으니 그 점은 양지 바랍니다.”
“하하, 우리 같은 늙은이는 새벽잠이 없다네. 자네가 수련할 때 우리도 칼 좀 휘두르지 뭐!”
막대광의 격의 없는 웃음에 북리준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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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놈들이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카이토의 명으로 해남검단으로 향하는 길잡이를 맡게 된 무사가 숨 쉬는 소리도 내지 않고 오는 내내 미동도 하지 않는 열명의 칼잡이들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호루루루루 호로로로”
해남검단이 지척인 숲에 도착한 무사가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새소리를 내자 잠시 후 검단에서 누군가 복면을 한 채 뭔가 보퉁이를 하나 등에 진 채 숲으로 들어섰다.
“갈아입으시지요!”
유창한 왜어로 말하는 자가 주작대의 표시가 선명한 단복을 내어주자 입고 있던 옷 위에 두른 닌자 열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이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소이다. 의뢰가 완료되면 이 곳으로 오시면 되오이다.”
“돈은?”
복면을 한 자가 손을 내밀자 인솔해온 무사가 품에서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올려놓았다.
“난 검단주의 처소까지만 안내해 주면 끝이오.”
“알겠다. 잔소리 말고 길을 열어라.”
얼음장같이 찬 목소리가 복면 뒤에서 울려 나오자 검단에서 나온 첩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따, 따르시오!”
해남검단의 정문을 피해 돌아 나무로 만든 목책 사이에 나무판자를 세심히 두드리던 간자가 판자 하나를 들어올리자 사람 하나가 지나다닐 구멍이 보였다.
소리없이 해남검단 안으로 스며든 십일인의 그림자가 어느 외진 한 지점에서 멈추어섰다.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는 자그마한 전각을 보고 따라온 십인의 닌자가 눈을 빛냈다.
“커헉”
미련 없이 신형을 돌려 오늘의 횡재를 기뻐하던 간자의 입이 거친 손에 가려지고 등을 뚫고 들어온 단도가 심장을 가르는 느낌에 눈 앞이 암전 되었다.
품속을 뒤져 묵직한 주머니를 챙긴 닌자가 저 앞에 어둠 속에 신형을 녹여 나가는 동료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