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76화 (76/167)

76. 암영 전투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첫째도 둘째도 몸조심이야.”

“걱정마라. 왜구들 순찰 가는 것도 아니고 작업 가는데 뭔 잔소리가 심하냐?”

왕일과 승진이 다음 날 해남검단원 전체가 남해검문으로 작업 파견을 나가기 전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왕형님이 다른 대주를 잘 다독여서 시키는 대로 후딱 일 마치고 돌아와.”

“나하고 승진이놈이 단주에게 총애를 받는다고 다른 대주들고 부대주들이 우리 앞에서 한 수 접어주고 있어서 일은 편해.”

왕일과 승진과 함께 편한 마음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가운데 승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준이 네가 와서 검단이 정말 환골탈태 수준으로 바뀌었어. 하루 하루 연명하듯 살아가던 단원들이 이제는 내일을 이야기 하고 있어. 정말 고맙다.”

“어차피 다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어찌되었건 두 사람이 검단원들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아 주니까 좋아.”

오랜만의 기분 좋은 술자리가 파하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오니 연무장 한 켠에 막대광이 쏟아내리는 달빛을 안주 삼아 곤오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합석해도 될까요?”

“나야 언제나 감사하지.”

막대광이 히죽 웃으며 곤오가 꺼낸 새로운 잔에 술을 채웠다.

“마음이 공허하신 듯 합니다.”

“하하, 들켰군.”

곤오 또한 막대광의 공허함에 전염이 되었는지 묵묵히 술잔을 비웠다.

“독고숙부님과는 얼마나 알고 지내신 겁니까?”

“후후, 한 삼십년 되었나?”

막대광이 자신의 이십대 초반 겁 없이 강호에 출사를 한 후 독고우를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했다.

“철 모르는 때 겁 없이 무림에 뛰어 들었지. 사부님께서 ‘네 놈의 도는 걱정이 없는데 사람 잘 믿는 성격이 걱정이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네.”

곤오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크게 뜬 채 귀를 기울였다.

“참으로 간교한 자를 친구로 알았지. 무공도 뛰어나고 정의로워 보였고 아주 배운 티가 제대로 나는 놈이었다네.

그 놈이 정말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 줄 알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정도 였는데 알고 보니 천하에 다시 없을 음적에 살인을 즐기는 살귀였지.”

막대광이 회한이 젖은 눈으로 술잔을 비웠다.

“그 때 그 놈에게 자신의 외동딸을 간살 당한 한 많은 아비에 의해 풍령곡에 청부가 들어갔던 모양이었네.”

막대광이 처음 독고우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풍령곡의 살수가 내가 친구라 생각했던 놈을 죽이려 했을 때 난 묵혈도를 들고 그 놈의 편에 섰었지.

풍령곡의 일급살수들 사이에 끼여 살행을 나섰던 독고놈의 눈에 간교한 자의 세 치 혀에 놀아나고 있던 순진한 도객이 안쓰러워 보였던 가 봐.”

막대광의 얼굴에 떠오른 아픈 표정에 북리준이 빈 잔을 다시 채웠다.

“그 간교한 놈의 목이 잘리고 난 풍령곡 살수들에게 둘러싸여 곧 같은 운명이 될 거라 생각을 했었네. 그 때 한 복면인이 앞으로 나서 무어라 뒤에 있는 동료들에게 이야기 하자 살수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비켜줬다네.”

“그 분이 독고숙부셨군요.”

“그래, 그 놈이 도를 빼앗기고 결박 지어 무릎 꿇고 있는 내게 다가 오더니 털썩 내 앞에 앉고는 주절 거리기 시작했어.

자신이 파악하기로 너는 나쁜 놈이 아닌데 저 간교한 놈에게 속아 이 지경에 왔다고 본다. 네가 친구라 생각 했던 놈은 밤마다 높은 무공으로 부녀자를 간살 하고 돈이 있는 자의 집에 들어가 불문곡직 다 죽이고 돈과 재물을 빼앗아 온 악적이라고 하더군.

무림은 한번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가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고 하더라고.”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막대광을 보며 곤오가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밧줄을 풀어 주고 다음에는 이렇게 만나지 말자고 자리를 뜨는 복면인에게 물었지.

나중에 은혜를 갚으려면 풍령곡의 누구를 찾으면 되느냐고.....

그 놈이 풍령곡의 우를 찾으라고 하고는 그 때 헤어졌었지.”

그 후 십년 동안 묵혈도라는 별호를 얻으며 정도를 걷는 낭인 중에 수위를 다투는 무림인으로 살아가는 즈음에 자신의 친우라 생각한 자의 딸이 잔지방도들에게 간살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홀로 잔지방으로 쳐들어갔다가 거기에서 독고우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친우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풍령곡에 청부를 넣었던 모양이었어. 난 그것도 모르고 친구의 원수를 대신 갚으려 잔지방에 쳐들어간거지. 내가 분에 겨워 잔지방도들을 반쯤 도륙했을 때 독고놈이 살행을 하러 그 곳에 온거야.

망할놈의 새끼가 돈을 받아 처먹었으면 돈 값을 해야 하는데 내가 대신 일을 하는 동안 잔지방주와 그 측근들 몇의 목을 따고는 구경만 하더라고. 독고놈이 나를 알아보고는 수하들을 물리고 그 날 저녁 밤새 술을 마시고는 친구가 되었다네.”

이야기를 마친 막대광이 기분 좋은 얼굴로 술잔을 비웠다.

“그 후 놈이 풍령곡을 제자에게 물려 주고는 내 앞에 불쑥 나타나서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여생을 함께 보내자고 해서 천산객잔에 눌러 앉게 된거네.”

“진정 친우를 가지시게 된 것이군요.”

“그럼! 여자도 아닌 사내놈이 여생을 같이 보내자는 그 말이 어찌나 좋던지....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허허허.”

세 사내의 술잔 부딪는 소리와 우렁 우렁한 웃음 소리에 연무장을 가득 채운 달빛이 출렁거렸다.

****

“자네가 직접 살행에 참여할 줄 알았는데?”

마사히로가 자신의 앞에서 술잔을 비우고 있는 신이치를 바라 보았다.

“청나라 황제의 목을 딴다면 모르까 체신머리 없이 청나라 관리 놈 하나 지우는데 내가 나설까?”

“하긴 네 놈 말이 일리가 있군.”

“걱정마라. 풍마류의 특급, 일급살수 전체와 게닌(下忍) 이백이면 중원 놈들이 말하는 구대문파의 장문인 목도 따 올 수 있다.”

“거기다 검단원 오백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니 변수가 있으래야 있을 수가 없겠군.”

“네 놈이 약속한 물자와 배를 준비해 놓아라. 살행 성공 후 부하들이 귀환하면 바로 떠날 것이다.”

“알고 있다. 네 놈이 떠나더라도 우리의 협조 요청이 있으면 지체 없이 도와야 한다는 약조를 잊지 말아라.”

“물론!”

****

남해검문의 기를 단 범선 두 척이 칠흑 같은 밤 바다를 뚫고 해남검단의 요새가 위치한 지근거리에 닻을 내렸다.

이어 자그마한 소선들이 검푸른 바다 위에 내려지고 교교한 달빛 아래 흑색 야행의와 복면을 하고 가지각색의 무기를 든 닌자들이 소선에 몸을 실었다.

“빨리 끝내고 돌아와라. 주군이 살행을 마치고 귀환하는 대로 바로 이동하시기를 원하신다.”

유일하게 복면을 하지 않은 죠닌 아야토의 말에 복면을 하고 황금빛 띠를 머리에 두른 자가 입을 열었다.

“잔소리 좀 그만해라.”

“일호! 주군의 명이다.”

“네 놈이 섬에서는 내 위 일지 모르겠지만 살행의 현장에서는 내 권위를 거스르지 마라. 관리 놈 목 하나 따는데 이런 거추장스러운 짓을 하는지....?”

이백 여명에 이르는 닌자들이 수십대의 소선에 몸을 싣고 뭍으로 나아가는 장관에 일호가 혀를 찼다.

일호의 뒤로 오른팔에 황금빛 띠를 두른 특급살수 아홉과 왼팔에 적색의 띠를 두른 일급살수 아흔명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단 내에 남아 있는 인원이 약 백여명 정도라고 한다. 무위는 중상, 상상 정도! 저 안에 살아 있는 생명체는 다 지운다.”

일호의 명에 일급 살수들이 내려진 소선에 몸을 싣고 마지막으로 일호가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두 시진이면 끝난다. 기다리고 있거라.”

일호와 특급살수 아홉이 몸을 실은 소선이 마지막으로 뭍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는 아야토가 미련 없이 신형을 돌렸다.

수십대의 소선들이 바닷가에 도착 후 조용히 배를 바닷가 모래 위로 올려 놓고 위장을 하려 하자 일호가 손을 들었다.

“두 시진 후 돌아 올테니 배는 그대로 두고 이동한다.”

풍마류 전체 전력의 팔할 정도를 이끌고 나서는 살행에 변수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에 일호의 명에 닌자들이 저 멀리 보이는 해남검단의 요새를 향해 검은 물결이 되어 나아갔다.

“우리들은 뒤에서 천천히 쫓아가겠다.”

일호의 말에 왼팔에 적색띠를 두른 일급살수 중 이십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 일장 정도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목책을 소리 없이 타 넘어 들어가는 닌자들의 물결을 일호와 그 뒤의 특급, 일급 살수들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전에 입수한 정보대로 대부분의 인원이 빠져나간 해남검단 내부는 인기척이 없이 조용히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이십일호의 손짓에 이백여명의 게닌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천막과 전각 안으로 신형을 녹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다 빠져 나간 모양이군.’

게닌 중 하나인 백십칠호와 백십팔호가 검단원들의 숙소로 보이는 천막 안으로 스며 들어 간 후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 없음, 다음....커헉’

천막 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백십칠호가 순식간에 자신의 그림자 안에서 일어선 무엇인가에 목이 잘려 나갔다.

자신의 동료가 잘려진 목에서 피분수를 뿜어내는 모습에 급히 천막을 빠져나가려는 백십팔호의 심장에 날카로운 단도가 틀어박혔다.

‘기, 기습....’

백이십오호부터 백삼십호 오인의 닌자가 해남검단의 초입 남측에 있는 전각 안으로 날아 들었다. 선임의 손짓에 지붕에 둘, 정문에 하나, 측면 창문으로 둘이 동시에 진입하여 들어선 후 소리 없는 공기의 일렁거림이 있는 후 진한 피비린내가 전각 안에서 흘러 나왔다.

해남검단원들이 숙소로 쓰던 군막과 전각들에 신형을 녹여 들어가는 게닌들을 흡족한 미소로 지켜 보던 일급 살수인 이십오호가 자신의 앞에 있던 중급 규모의 천막 안으로 신형을 밀어 넣었다.

손에 든 중도와 슈리켄을 언제든 뻗어낼 준비를 하고 천막 안에 들어선 이십오호의 뒤에 소리 없이 내려선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의 손에 든 검이 이십오호의 정수리를 가르려는 순간 전광석화 같이 뒤로 내뻗어진 왜도에 관통당한 그림자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살수다.’

자신의 도에 관통 당해 즉사한 그림자가 신음소리 한 점 내지 않음에 적의 정체를 간파했다.

‘중원의 살수들인가? 아니면....’

자신들을 쫓아 본토에서 찾아온 이가류의 닌자들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전신을 조여 오는 살기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안력을 집중하여 보니 바로 앞에 목이 잘린 부하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옷 사이로 스며드는 액체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무시한 채 엎드린 자세로 자신의 도에 관통당한 살수에게 다가 가던 이십오호가 전신을 따갑게 내리 누르는 살기에 방향을 틀어 천막의 한 구석 그림자에 신형을 녹여 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당했군.’

어찌 되었건 자신의 상급자인 십일호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소란을 피우기로 마음 먹고 신형을 격하게 일으켜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자신의 눈 앞에 거꾸로 매달려 히죽 웃음을 짓고 있는 누군가의 검이 벌린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머리에 ‘風(풍)’ 이라는 흑색의 글자가 새겨진 머리 띠를 두른 살수가 적의 입을 꿰뚫은 검을 빼내어 목을 자른 후 한 마리의 거미가 되어 다시 천막 위로 기어 올라갔다.

수많은 천막과 전각 안에 게닌들이 들어 간 후 퍼져나오는 피내음에 뒤에서 느긋하게 움직이던 일호가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바로 놈의 목을 따러 간다.”

일호와 십호까지의 특급 살수. 십일호부터 이십호까지의 일급살수들이 처음부터 숙지한 검단주의 처소를 향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검단원들의 천막과 수 많은 전각들 안에서 벌어지는 소리 없는 전투의 승자들이 더 이상 내습하는 적이 없자 그 자리에서 신형을 일으켜 어둠에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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