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이상한 년
검단주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에 자신이 너무 많이 나갔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혀, 협박이 아니라 요청입니다, 요청...”
“요새는 요청을 그런 방법으로 하는 것이 유행인가 보군요.”
제갈청하가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자 목철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오해이시오.”
“그런데 후환 운운하신 내용은 누가 들어도 명백한 협박인데 말입니다.”
정삼품의 어사대인이며 해남검단주의 단주인 자신의 상관에게 막 대하는 목철우를 향해 유검패가 살기를 피워 올렸다.
후둘 거리는 다리를 애써 부여 잡고 이리 저리 불안한 눈을 굴리는 목철우를 보며 북리준이 손을 내저었다.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무엇을 원하는지 설명을 해 주시오.”
엉거주춤 자리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댄 후 목철우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배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 우리가 이해 할 수 있게 설명을 해 보시오.”
“벽라도에 저희 남해검문의 배 두 척이 해남검단의 이름으로 입항했다는 정보를 입수 했습니다.”
“무슨 말씀 인지 모르겠군요. 지금 남해검문의 모든 군선은 대수리 기간이라 해남도에 전부 정박 중이지 않나요?”
제갈청하의 말에 목철우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 저희가 왜구에게 빼앗겼던 배로 추정 하고 있습니다.”
“추정이라.... 이보시오, 부문주! 남해검문 정도 되는 대문파에서 조정에서 운용하는 검단에 무엇인가를 요청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니겠소?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그래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해 주시오.”
철면신산의 말에 목철우가 엉켜가는 머릿속을 애써 정리해 가며 입을 열었다.
“대, 대략 사오년 전 왜구들이 저희 배를 습격 하여 끌고 간 배입니다. 어떻게 그 배들을 검단에서 입수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저희가 잃었던 배가 틀림 없습니다.”
목철우의 말에 북리준이 철면신산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최근 오년 동안 남해검문의 배를 왜구들이 습격한 일은 전무 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배들을 검단에서 어떻게 입수 했는지 모르겠다? 그럼 제가 설명을 하지요.”
철면신산이 일주일 전 남해검문의 요청으로 검단원 오백을 차출 당한 후 왜구의 닌자 이백명이 검단을 습격한 이야기와 왜구 닌자들을 도륙한 후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끌고 온 일을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그래서 그 배는 분명 왜구들이 타고 온 배이며 이미 조정에 왜구들의 배 두 척을 입수 했다고 보고가 들어간 상황이오. 이제와서 남해검문이 예전 어디선가에서 빼앗겼던 배니까 돌려달라? 허허,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지 않소?”
철면신산의 말을 제갈청하가 받아 말을 이어갔다.
“남해검문의 이름으로 정식 공문 접수를 해 주시지요. 자세한 내용과 경위를 포함 하여 공문으로 주시면 조정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그 두 배는 저희 검단의 사적인 물건이 아닌 조정에 속한 배이니 조정에서 내 주라 하면 당연히 내드려야지요.”
자신의 형이며 장문인 목철군이 마사히로에게 스스로 내어준 배를 어떻게 잃어 버린 배로 공문을 만들어야 하나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목철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소이다. 내 돌아가서 장문인과 군사와 협의 하여 공문을 접수시키도록 하겠소이다.”
유검패가 벌개진 얼굴을 한 남해검문 부문주를 안내 하여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제갈청하가 웃음을 지었다.
“맨날 목철군한테 깨진다고 하던데 이유를 알 것 같군. 진짜 공문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던데....”
“고작 배 두 척 때문에 왜구와 결탁한 사실이 알려 지는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 않겠지.”
철면신산의 말에 제갈청하가 고개를 주억 거렸다.
“다시 차후 해야할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보시지요. 여기에 저희가 내려 온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시점에 마사히로의 운신의 폭을 많이 좁힌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제갈청하의 설명에 북리준과 철면신산이 주의를 기울였다.
“손발을 쳐 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마사히로가 저 남해 바다 어딘가에 자신만의 은신처를 마련해 놓고 왜국에서 밀려 나오는 난민을 받아 내는 한 악순환의 연속이지요.”
“부군사의 말에 동감합니다. 이제 마사히로의 목을 칠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철면신산이 질녀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문제는 마사히로의 근거지를 파악 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사히로의 근거지를 알 수 있다는 가정하에 어떻게 그 곳을 공략 할지 두 분께서는 계획을 짜 주세요.”
“알 방법이 있어?”
제갈청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반문을 했다. 그 때 밖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리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주작대주, 검단주님이 부르셔서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주작대주 상수인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서고는 제갈청하가 권해준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지난 번 왜국 닌자들의 습격을 알려준 주작대원에게 기별을 넣어 주시오. 마사히로의 부하놈이 항구를 떠날 때와 타고 갈 배가 어떤 배인지 파악해서 보고해 주시오.”
“네, 바로 알아 보겠습니다!”
상대주가 방을 나서고 제갈청하가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려고? 그 배에 잠입하려는 거야? 돌아 올 때는 어떻게 하려고?”
제갈청하가 걱정스런 얼굴로 질문을 퍼붓자 철면신산이 웃음을 지었다.
“하나씩만 묻거라. 단주가 생각이 있겠지!”
“간단해! 내가 수영을 좀 하거든. 배를 쫓아 갔다가 마사히로놈의 근거지를 확인하고 다시 돌아 올 거야.”
“미쳤어? 강물도 아니고 바다를? 하루가 걸릴지 이틀이 걸릴지 모르는 곳을 수영을 해서 간다고? 난 결사 반대야!”
“혼자 가는 것이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말라구. 나중에 소개해 줄게.”
****
오랜만에 쌍괴동을 찾은 북리준이 쌍괴의 무덤을 돌보고 수련을 시작 한 지 한 시진 정도 되었을까? 입구에 어느새 금아가 반가운 표정으로 북리준을 바라 보고 있었다.
“금아야! 오랜만이다. 자주 못 와서 미안해.”
자신의 얼굴을 연신 핥으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금아의 목을 감싸 안은 북리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금아야, 나랑 어디 좀 갔다 오자!”
뜬금없는 북리준의 말에 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고개를 주억거렸다.
금아와 함께 쌍괴동을 벗어나 근처의 해안가로 나아가니 제갈청하가 초조한 모습으로 북리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온거야?”
“내 친구를 소개 시켜 주려고. 금아야!”
북리준이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부르자 어두운 바닷물 속에서 찬연한 금빛의 무엇인가가 엉금 거리며 해변으로 올라왔다.
“거, 거북이?”
장정 두 명 정도가 올라 타도 될 정도의 금빛 거북이를 보며 제갈청하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금아라고 해. 내 친구이고. 금아야, 여기도 내 친구 청하야.”
커다란 금빛 거북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하는 듯 하자 제갈청하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만년금구.....”
제갈청하가 어느 책에서 읽었던 영수 중 바닷속에서 사는 만년금구를 떠올렸다.
“한번 타 볼래? 물론 금아가 허락을 해야겠지만.”
북리준의 말에 금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갈청하가 설레는 표정으로 금아의 등에 올랐다.
석양이 지는 바다를 향해 북리준과 제갈청하를 태운 금아가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아, 아름다워....”
제갈청하가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저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 가는 모습에 감탄을 터뜨렸다.
금아의 등으로 들이치는 물결에 제갈청하가 기겁을 하며 북리준에게 안겼다.
“나 수영 못해....”
제갈청하가 무서움 반 설레임 반의 표정으로 북리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걱정마! 금아가 우리를 물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고 빠져도 내가 한 수영 하거든.”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제갈청하의 사랑스런 모습에 북리준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저 멀리 붉은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북리준의 입술이 제갈청하의 앵두같은 입술을 덮어 버렸다.
“꾸우우우”
금아가 대견하다는 듯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속도를 내자 제갈청하의 섬섬옥수가 북리준의 목을 감아갔다.
****
“조심해서 다녀와!”
제갈청하가 먼길을 떠나는 북리준을 배웅하며 수줍게 입을 열었다.
“걱정마! 나 혼자 가는 것도 아닌데 뭘.”
바다 위 석양에서의 긴 입맞춤 후 한결 가까워진 둘의 모습을 보며 곡굉이 묘한 눈빛을 보냈다.
“커험, 큼! 뭐 좋은 일이 있나 보네....”
“무슨 일요? 아무 일도 없어요!”
제갈청하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곡굉이 오른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아니면 말고지 뭐!”
제갈청하가 숙부와의 회의를 위해 방을 나서자 곡굉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되고 있남?”
“그냥 좋은 사이에요. 남 말하지 말고 형님은 상대주하고 잘 되고 있어요?”
“큼,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려 주마.”
“호오, 미리 축하 드려요.”
곡굉이 진즉에 상대주를 좋아하는 마음을 안 북리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좋은 결실을 맺게 된 것이 너무 좋았다.
“몸 조심하고 낌새가 이상하면 냅다 튀는 거 알지?”
“내 한 몸 빼내는 것은 일도 아니에요.”
수어피와 벽곡단, 호리병등을 챙겨든 북리준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검단을 벗어났다.
****
‘미친년이 이상한 년이 되었다.’
모처럼 친우들과의 술자리에 함께한 하후상이 팽무강에게 전음을 날렸다.
‘내 앞에서 해실 해실 웃다가 피식 거리고 아주 지랄을 한다....’
모용민과 언철진도 이상하게 변한 제갈청하를 보며 한껏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난 안다, 저 년이 왜 저러는지...’
순간 들려온 모용민의 전음에 하후상이 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왜 저 지랄인데?’
‘사랑에 빠졌어, 저 년!’
‘사랑? 어떤 미친 놈이 저런 미친 년 하고.... 아니 맞네. 미친 놈이랑 미친 년이 만나는 것이.’
푸슬 푸슬 혼자 자작을 하며 웃음을 짓던 제갈청하가 자신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 보는 친우들을 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눈깔을 확 파버릴까 보다. 눈 안 깔아?”
‘역시 미친 년이었어.....’
하후상의 전음에 팽무강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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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입니다!”
변장을 한 북리준이 광동 포구 으슥한 골목에 들어서자 면사를 한 상대주가 손을 들었다.
“반 시진 후 포구를 떠난다고 합니다.”
“수고 하셨소. 바로 검단으로 복귀 하시고 내가 여기 온 것은 비밀로 부탁 드리오.”
“검단 내에서도 말씀 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 하세요.”
상수인의 걱정스런 표정을 보며 곡굉의 시큼털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곡형님..... 좋은 분 입니다!”
“네? 아...네......”
바닷가의 거친 햇살에 시커매진 피부에 놀랄 정도의 홍조가 떠오르며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저는 곧 돌아 옵니다. 돌아 와서 거창하게 두 분의 인연을 축복해 드리겠습니다.”
싱긋 웃음을 짓고는 골목을 벗어나 포구 쪽으로 나아가는 검단주를 보며 상수인이 중얼 거렸다.
“정말 곡가가 말씀대로 좋은 분이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