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그 입 다물라!
“엥, 뭐래?”
“남해검문에서 우리 벽라도하고 금사도를 먹겠대.”
“갑자기 왜?”
다시 어수선한 분위기로 흘러가자 중앙에 앉아 있던 요불위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끝까지 좀 듣고 씨부려라!”
다시금 요추광이 조심스럽게 남해검문이 호시탐탐 금사도와 벽라도를 노리고 있다는 배경 설명과 함께 자신들이 누명을 쓴 이야기부터 해남검단의 단주인 어사의 구함을 받은 이야기 까지 차근 차근 설명을 했다.
“너 설마 정말 왜구놈들과 손 잡은 것은 아니지?”
요불위의 의심스런 눈초리에 요추광이 두 손을 내저었다.
“제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오히려 남해검문과 왜구놈들이 결탁한 정황을 잡으려고 여기 계신 호군참령어사대인께 협조하고 있다구요.”
“처음 뵙겠습니다. 해남검단주인 도천학이라고 합니다. 벽라도주님의 말씀대로 벽라도주와 금사도주가 왜구와 결탁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북리준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멀쩡하게 잘 생겼네.”
“우리 벽라도 사람 인가?”
“조정에서 내려 왔다잖아? 좀 제대로 들어.”
“호군...머시기는 높은 건감?”
“호군참령어사는 정삼품의 아주 높은 관리야.”
요불위가 자리에서 일어서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불초한 자식놈을 구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어사대인! 일단 저희 도 내의 일을 먼저 파악 할 동안 잠시 쉬고 계시지요.”
요불위가 누군가를 부르자 그나마 이 곳에서 제일 나이가 어려 보이는 노인이 부리나케 뛰어와 북리준과 독고우를 공터 한 켠 탁자로 안내했다.
“이쪽은 저와 함께 누명을 쓴 현 금사도주입니다. 이쪽과 일을 같이 풀어 나가야 합니다.”
금사도주가 정중하게 전대 벽라도주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함께 했다.
저 편에서 갑론을박 논의가 진행 되는 가운데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구경을 하던 독고우가 입을 열었다.
“무공이 고강해 보이는 자는 안 보이던데....”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저런 늙은이들이 도움이 될까? 괜히 송장만 더 치우는 것 아닌지 몰라.”
“뭔가 수가 있겠지요. 앞으로 한 달 뒤 대계를 위해 벽라도와 금사도의 군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희가 도울 방안을 나름 찾아봐야겠습니다.”
시끌벅적 시장통 같은 분위기에서 논의가 끝나고 노인들이 주섬 주섬 일어서 각자 자신들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야기는 다 잘 되었습니다.”
요추광이 웃음을 띈 얼굴로 북리준과 독고우에게 다가왔다.
“무력이 더 필요하시면 저희가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북리준의 말에 요추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럼 저희가 부탁 드릴 때 남해검문에서 파견을 나온 무사들만 제압해 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약 반시진 후 각자 집에서 제대로 된 벽라도문의 무복과 각자의 무기를 챙겨 든 노인들이 공터로 모여 들었다.
“다들 모였으면 마차에 올라. 가 보자구.”
공터에 말 한 마리가 끄는 대여섯명 정도 탈 수 있는 수레 다섯 대가 대기 하고 있었고 그 위에 노인들이 힘겹게 몸을 실었다.
“좀 잡아봐....”
“어이구, 삭신이야. 이게 얼마만에 외출인고?”
“애새끼들은 잘 있나 몰러...”
천천히 마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벽라도주와 금사도주가 요불위와 한 마차에 올라 고개를 숙였다.
마을에서 준비해 준 말 두 필에 몸을 실은 북리준과 독고우가 앞서 나가는 마차를 천천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감이 안 잡히네...”
독고우가 마차에 퍼져 앉아 고개를 처 박고 코를 골며 잠을 자거나 삼삼오오 모여 히히덕 거리는 노인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이 있겠지요...”
북리준 또한 이 노인들이 벽라도는 되찾는데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차가 서서히 벽라도문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성 내에 진입하자 벽라도 주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마차로 달려왔다.
“어르신! 잘 지내셨지요?”
“장로님, 저 태삼이에요. 어쩐 일로 성에 오셨어요? 정말 반갑습니다.”
“엄마 엄마! 지지할아버지다. 맨날 나 보고 지지라고 땅에 떨어진 것 절대 먹지 말라던 할아버지야.”
성 내로 진입한 마차 다섯 대에 벽라도 주민들이 달라 붙어 연신 대화를 주고 받으며 벽라도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흘흘, 아직도 땅에 떨어 진 거 주워먹냐? 절대 지지다.”
“지난 해 불나서 홀라당 집을 날려 먹었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사노?”
“네 놈 안사람 몸을 풀었나? 여덟째인가 아홉째인가... 하여간 사람이 아니여....”
처음에 하나 둘 붙어 움직이던 벽라도 주민들이 벽라도문의 정문에 다다를 무렵 수백명으로 불어나 주고 받는 이야기에 시끌벅적한 소음이 도문 안으로 퍼져 들어갔다.
“도, 도주님! 크, 큰일 났습니다.”
임시 금사도주인 왕보당이 금사도 내 일처리를 위해 떠난 후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요문원의 눈이 샐쭉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웬 호들갑이냐?”
“전 벽라도주와 금사도주가 수면리 분들과 함께 정문 앞에 도착해 있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새벽에 남해검문으로 넘겼는데....”
“확실하게 제가 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왔습니다.”
“이런 제기랄....”
그때 머리에 흑건과 백건을 두른 흑건질풍대와 백건폭풍대원 스물이 요문원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벽라도주! 무슨 일이오?”
흑건질풍대 부대주인 파랑일검이 앞으로 나섰다.
“좀 도와 주시오.”
“앞장 서시오.”
남해검문에서 유사시를 대비하여 남겨둔 무력대와 함께 요문원이 급히 벽라도문의 정문 광장으로 나아갔다.
“무슨 일이래?”
벽라도문의 무사가 급히 뛰어 나가는 임시 도주와 남해검문의 무사들을 보며 옆에 서 있던 동료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구와 결탁해서 남해검문에 조사를 위해 넘겼다는 전 도주가 수면리 어르신들과 함께 정문에 왔대.”
“그래? 한번 가 보자. 도주가 왜구와 결탁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는데 확인해 보자구.”
벽라도문 내 무인들도 덩달아 치달려 나가는 임시도주의 뒤를 따라 그 인원들이 눈덩이 불어나듯 늘어났다.
“이게 무슨 개수작이야?”
요문원이 정문 광장에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허, 이 무슨 개망신인고.... 문원이 네 이놈!”
광장에 오열 종대 나이 순서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노인들 중 앞에 앉아 있던 요불위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하, 할아버지.....”
“어디 누가 네 할아비란 말이냐? 그 더러운 입 썩 다물라!”
주춤 거리며 뒤걸음질 치던 요문원이 누군가의 몸에 부딪쳤다.
“도주, 정신을 차리시오.”
흑건질풍대 부대주인 파랑일검의 차디찬 음성이 당황하던 요문원의 정신을 일깨웠다.
“내, 내가 지금 이 벽라도의 도주요. 모두 물러서시오.”
그 때 요문원의 아비이자 쫓겨난 벽라도주인 요추광이 앞으로 나섰다.
“네 놈이 아무리 도주 자리가 탐이 난다고 해서 남해검문과 손을 잡고 왜구와 내가 결탁했다는 말도 안되는 누명을 씌운 것을 벽라도문의 문인들이 제대로 알고 있는지 묻고 싶구나.”
요추광의 말에 요문원의 뒤에 서 있던 벽라도문의 무사들이 술렁거렸다.
“맞아! 도주가 왜구와 결탁 했다는 말은 순전히 소도주의 말 뿐이잖아.”
“증거라고는 편지 몇 장이더구만.”
“그리고, 남해검문의 흑건질풍대와 백건폭풍대가 언제부터 왜구의 일에 이리 나서기 시작한거지?”
술렁거리는 벽라도문 무인들의 말소리에 요문원의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네 놈과 남해검문의 시커먼 속내를 나 혼자 밝히기가 어려워 부득이 수면리에 칩거해 계신 어르신들을 모셨다.
네 놈 말대로 나와 금사도주가 왜구와 결탁 했다는 것을 어르신들에게 설명하여 납득 시킨다면 내 이 자리에서 자결하겠다.”
오추광의 결의에 찬 말에 광장을 둘러싸고 있던 수백의 도민들이 고개를 주억 거렸다.
“도주 말이 맞네. 어이, 도주가 왜구와 손 잡고 짝짜쿵 했다는 증거를 대 보쇼.”
“맞아. 증거를 대 봐.”
이에 요문원이 자신의 품 속에 있던 증거를 꺼내어 손에 들고 흔들었다.
“여, 여기 증거가 있다. 요추광 전 도주가 왜구의 수장인 마사히로와 결탁하고 모의한 편지가 있단 말이다.”
“그 증거, 내가 볼 수 있겠소?”
앞으로 나서는 해남검단주를 보며 요문원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외인은 빠지시오. 벽라도문 내의 일은 벽라도문에서 해결하겠소이다.”
“왜구와 관련된 일은 본관의 소임이오. 만일 왜구의 문제가 아닌 벽라도 내의 문제 뿐이라면 본관이 나설 일은 없을 것이오.”
“누구지?”
뒤에 서 있던 한 무사가 동료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내가 예전에 한 번 본적이 있어. 해남검단의 검단주라더군. 도주가 어사대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어.”
‘네 까짓 놈이 이 편지가 가짜라는 것을 어찌 증명하겠느냐?’
검단주가 절대 편지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확신에 요문원이 편지를 내주었다.
“누가 지필묵을 가져다 주시겠소?”
북리준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무사 하나가 지필묵을 준비해 주었다.
“요도주는 앞으로 나서시오.”
북리준의 말에 요추광이 영문을 모른 채 북리준의 옆에 섰다.
“이 내용대로 두 어 줄만 써 주셨으면 하오.”
북리준이 말과 함께 건넨 편지를 받아 펴고는 받아든 지필묵으로 글을 써 내려 갔다.
“죄송하지만 요불위 전 도주께서 이 두 편지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요불위가 자리에서 일어나 편지 두 장을 받아 들고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두 편지의 필체가 다르오. 어이, 공서기! 좀 나와 봐라.”
전에 요불위가 귀 먹은 난쟁이 똥자루라 불리운 노인이 옆에 앉은 노인이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자 눈을 부릅뜨고 노려 보았다.
“너 나오래!”
“나?”
엉거주춤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앞으로 나서자 요불위가 공서기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 편지 필체 좀 봐라. 같은 사람이 썼는지 확인해 봐.”
두 번이나 큰 소리로 이야기 해서 내용을 이해한 공서기라는 노인인 편지 두 장을 손에 들자 눈빛이 일변했다.
“에잉, 누가 봐도 다른 사람이 썼네. 이 삐침과 내림의 각도가 이리 다른데 어디서 개사기를 쳐?”
“여기 있는 공서기는 벽라도문에서 문서 관련한 일만 사십년을 한 사람이다. 공서기가 아니라면 아닌거지.”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거, 거기 벽라도주의 지, 직인이 찍혀 있잖소?”
요문원의 떨리는 말에 북리준이 요추광을 바라 보았다.
“요도주! 평소 직인을 어찌 보관 하시는 지요?”
“내 집무실 안 금고에 넣어 보관 하고 있고 그 번호는 나와 저 소도주란 놈이 알고 있소.”
순간 술렁거리는 장 내 분위기에 요문원의 안색이 변했다.
“이, 이건 반역이오. 부대주, 저 반역자들을 당장 처단하시오.”
요문원이 이성을 잃고 손가락질을 하며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자 흑건질풍대 부대주인 파랑일검이 음산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도주의 명을 받듭니다.”
이어 뒤에 서 있던 스무명의 남해검문의 무사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이 곳은 우리 벽라도문의 땅이다. 어디 감히 해남도의 떨거지들이 이리 설치는가?”
요추광이 칠파검사라는 자신의 별호를 가져다 준 칠파검을 빼들고 결연히 외쳤다.
“여봐라! 어르신들을 뒤로 모셔라.”
요추광의 말에 요문원의 뒤에 서 있던 벽라도문의 무인들이 분분히 앞으로 나서려 했다.
“앞으로 나서는 새끼들은 적으로 간주한다. 무조건 참하라.”
파랑일검의 말에 흑건질풍대와 백건폭풍대 무사들의 일부가 검을 뒤로 돌렸다.
“남해검문의 새끼들은 해남도로 돌아가라.”
“우우, 어디 남의 땅에 들어와서 주인 행세냐? 당장 꺼져라.”
광장을 둘러싼 벽라도민들의 야유 소리가 점차 커지는 와중에 파랑일검의 얼굴에 잔인한 한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 죽여라.”
주변에 둘러서 있던 도민들이 힘겹게 신형을 일으키려는 노인들을 부축해서 뒤로 물리려는 찰나 파랑일검의 검이 맨 앞에 앉아 일어서려는 노인의 목을 노리고 떨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