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남검귀-85화 (85/167)

85. 암전(暗戰)

북리준이 오랜만에 금아를 만나기 위해 제갈청하와 함께 검단을 나서고 있었다.

“오늘도 멋진 석양을 보여 주는 거지?”

제갈청하가 들뜬 얼굴로 북리준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앞으로 이런 여유를 가질 시간이 없을 거야.”

북리준이 내민 손을 수줍게 잡으며 금아가 기다리고 있을 해변을 가기 위해 가로질러야 할 숲의 초입에 다다랐다.

“지금쯤 출발을 했겠네.”

“그러겠지. 이번 일의 최대 관건은 시간을 맞추는 거야. 금사도와 벽라도는?”

“네 덕에 빼앗길 뻔한 섬을 찾았는데 당연히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고 있지. 문제 없을 거야.”

천천히 숲 속에 난 오솔길을 따라 손을 잡고 걷던 북리준이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왜?”

“잠깐만....”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짓함에 기감을 퍼뜨려 주위를 살폈으나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왜 그러는데?”

제갈청하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며 북리준의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보통 놈이 아니군.’

풍마류의 최고 은신법인 무영인자술을 펼쳐 목표와 여자 하나가 내려다 보이는 나무와 하나가 된 신이치가 더욱더 기를 죽여 나갔다.

“내가 잘못 느꼈나?”

북리준이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다시 제갈청하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나 놀리려고 그러는 거지?”

“하하, 왜 일부러 그러겠어?”

신이치가 우거진 숲 나무와 나무 사이의 그림자에 미끄러지듯 신형을 녹여 나가다 최적의 습격 장소를 발견했다.

‘저 곳에서 네 놈의 명줄을 끊어주마!’

신이치가 숲이 거의 끝나가는 길이 급격이 좁아지는 지점 위에 먼저 도착 하여 두 목표를 기다렸다.

환하게 웃는 제갈청하의 얼굴을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던 북리준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며 갑자기 청하를 안고 땅을 굴렀다.

“무, 무슨.... 어헉, 준아!”

자신을 안고 땅을 구른 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낮게 자세를 잡고 있는 북리준의 등에서 피가 솟아 나왔다.

‘치잇, 얕았다....’

완벽한 시점에 자신의 일도류를 단 일점의 살기 하나 흘리지 않으며 내리그었으나 목표의 살갗을 찢는 정도의 성과밖에 내지 못하자 신이치의 신형이 다시 숲과 하나가 되었다.

“살수야?”

제갈청하가 북리준의 등에서 솟아나는 피를 보며 자신의 옷을 찢었다.

“괜찮아... 가만히.....”

북리준의 자세를 낮춘 채 제갈청하를 자신의 등 뒤에 두고는 전신의 기감을 퍼뜨렸다.

‘못 찾겠어.... 풍마류의 수장인가?’

도무지 어디에 은신해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한 북리준의 표정이 어두워져 갔다.

‘혼자라면 어떻게 수를 내겠는데 청하가 있으니....’

‘까아앙’

공간을 비집고 제갈청하의 목을 노리고 날아온 왜도를 겨우 걷어낸 북리준의 왼쪽 어깨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제갈청하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북리준의 몸에 다시 피가 솟구치자 전음을 날렸다.

‘어디 있는지 알겠어?’

제갈청하의 전음에 북리준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이대로는 우리가 당해! 준아, 내가 기회를 줄테니까 놈을 잡아.’

‘안돼! 네가 너무 위험해.’

‘이대로 라면 네가 나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둘 다 죽어.’

제갈청하가 자신들이 앉아 있는 숲 주위에 내려 앉은 자욱한 죽음의 기운에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어차피 놈의 목표는 나다. 단 한번만 놈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다면 청하가 이 숲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 이후에는 놈과 나와의 싸움으로 만들 수 있다.’

‘쉬이익 까앙’

불쑥 어둠 속에서 뛰쳐나온 슈리켄이 청하의 머리를 향해 날아 오르자 힘겹게 쳐낸 일월신검의 궤적 사이로 중도가 비집고 들어와 북리준의 옆구리 피를 게걸스럽게 탐하고 숨어들었다.

‘잘 들어! 어둠 속에 있는 놈의 목표는 나야. 내가 신호를 하면 저 숲이 끝나는 곳으로 최대한 신법을 전개해서 이 곳을 벗어나야 돼. 숲을 벗어나게 되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금아가 있는 해변으로 가서 나를 기다려 줘.’

‘괜찮겠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 군데 자상을 입은 북리준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 보았다.

‘놈이 너를 노리고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어. 놈의 목표는 너가 아닌 나이니까. 만일 너를 노리고 모습을 드러내면 내가 놈의 목을 먼저 자를거야. 날 믿어줘!’

‘믿어! 신호를 줘.’

두 사람이 신형을 바짝 낮추고 주위를 경계하는 모습을 내려다 보던 신이치가 복면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서서히 피를 말려 주마. 내 수하들을 고혼으로 만든 네 놈을 쉬이 죽일 수는 없지...’

“지금!”

순간 북리준의 고함소리와 함께 제갈청하의 발에서 터져 나온 천기신행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숲의 출구로 뻗어 나갔다.

‘나오너라!’

눈을 부릅뜨고 앞서 나가는 제갈청하의 주위를 보며 일월신검을 앞으로 뻗어내었다.

‘쉬이이익’

제갈청하가 나아가는 전방 어둠의 공간이 갈라지며 야행의에 복면을 한 살수의 긴 왜도가 소리없이 내리쳐졌다.

‘카아아앙 카캉’

자신의 심장과 목을 향해 날아오는 암기를 가까스로 쳐낸 신이치가 다시 신형을 어둠에 묻었다.

‘무슨 암기지?’

막아낸 암기가 튕겨져 나간 범위를 훑어 보는 신이치의 예리한 눈에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됐다!’

제갈청하가 숲을 무사히 빠져 나가는 것을 확인한 북리준의 신형이 서서히 그 자리에서 지워져갔다.

‘혼을 떨구고 영을 통과시킨다..... 이름은 그럴싸 한데 간단히 말하면 네 놈이 숨고자 마음 먹으면 그 어느 누구도 너를 찾지 못한다는 말이다.’

천괴의 비급 중 낙백투영이라는 신법이 처음으로 북리준의 몸에서 발현 되었다.

‘없어졌다....’

찰나지간 북리준의 신형을 놓친 신이치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인내심의 싸움이다. 먼저 움직이는 놈이 죽는다!’

풀벌레 우는 소리마저 멈춘 고요함이 가득 내려앉은 숲 속에 두 인영이 서로의 종적을 찾기 위해 기감을 숲 전체에 퍼뜨렸다.

‘놈! 살수의 기예를 익혔는가?’

신이치가 숲이 끝나는 끄트머리 바위와 하나가 된 채 실같이 가느다랗게 만든 기감을 자신의 주위에 깔아 나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 주위 삼장에 들어오는 순간 네 놈은 죽는다!’

북리준은 제갈청하가 신형을 박차고 나아간 곳 바로 옆 거대한 나무에 신형을 녹여 넣은 채 살수의 종적을 찾기 시작했다.

약 한 시진 동안 적막에 싸인 숲에 그 어떤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네 놈이 숨어서 안 나온다면 나올 수 밖에 없게 만들어주마.’

북리준의 늘어뜨린 양 팔목 일월수갑에서 소리 없이 빠져나온 일월쌍륜이 북리준의 세밀한 기의 수발에 의해 뱀처럼 영활한 몸짓으로 땅위를 기어 나가기 시작했다.

북리준의 피를 일년간 머금은 일월쌍륜이 마치 두 마리의 뱀이 된 듯 정반대 방향을 헤집기 시작했다.

‘뱀?’

신이치가 오장 앞 땅에서 꿈틀거리는 무엇인가에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일반적인 뱀의 움직임과 뭔가 다른 몸짓에 신이치의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뱀도 다루는 놈인가....’

적이 다루는 뱀이라면 분명 맹독을 지닌 독사가 분명할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퍼뜨린 기감의 그물에 신경을 집중했다.

‘뱀이 아니다.... 그럼 뭐지....?’

기감의 그물에 방금 들어온 물체의 움직임에 신이치의 평정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잡고 자리를 옮긴다!’

오른손에 소리 없이 잡힌 슈리켄 두 개가 자신의 기감 안에 들어온 무엇인가를 잡으러 공간 찢으며 날아가는 순간 ‘패애앵’ 기음과 함께 무엇인가가 급격히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맹렬하게 회전을 일으키며 자신이 숨어 있던 바위를 직격했다.

‘카라라라랑 카카칵’

간발의 차로 신형을 바위에서 빼낸 신이치가 두 조각으로 갈라진 바위를 일별하고는 다시 어둠에 신형을 녹여 가려는 찰나 다시 예의 기이한 소성과 함께 공간이 갈라지며 자신의 가슴에 날아든 무엇인가를 일도류로 걷어 내었다.

“찾았다!”

일월쌍륜으로 적의 기척을 감지해낸 북리준의 일월신검에서 거친 검의 파도가 일렁이며 거대한 몸집을 일으켰다.

“칙쇼....”

자신의 주위를 초토화 시키며 밀려 드는 거대한 검기의 파도를 향해 한 손에 든 왜도와 중도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파도에 몸을 부딪쳤다.

‘카카가가가가가각 카카캉 카카카칵’

거대한 검기의 파도를 거슬러 오르려는 왜도의 회오리가 격하게 부딪치며 귀가 먹을 듯한 검과 도의 부대낌이 울려 퍼졌다.

‘뚫었다......아.....’

폭풍일도류의 힘으로 파도의 검기를 뚫어낸 신이치의 눈 앞에 번쩍 한 개의 흰선이 벼락치듯 자신을 스쳐가는 느낌에 탄식을 터뜨렸다.

‘파하아아악’

만파에 이은 단섬에 좌상에서 우하로 비스듬히 두 조각으로 갈라져 땅으로 떨어져 내린 살수의 시신을 보며 북리준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어려운 상대였다.....”

등과 어깨,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금창약을 꺼내어 바르고 응급처치를 한 후 살수의 시신을 일별하고는 급히 신형을 날렸다.

“청하가 걱정하겠다!”

왜국 본토의 수위를 다투던 닌자 가문 중 하나인 풍마류가 북리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스러져갔음을 모르는 채 제갈청하가 기다리는 해변으로 땅을 박차 날아가고 있었다.

“준아!”

초조한 얼굴로 금아 옆에 앉아 손톱을 씹고 있던 제갈청하가 저 멀리 날아오는 북리준을 보고 신형을 날렸다.

“크흑.... 정말 걱정 했어....”

북리준을 힘껏 껴안고 그 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청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괜찮아! 그냥 피륙이 긁힌 정도야....”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청하의 얼굴을 소중하게 감싸 안은 북리준이 고개를 숙여 따뜻한 제갈청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

“닷새 후요?”

벽라도와 금사도의 내분을 어느 정도 정리한 후 해남검단주의 요청으로 모인 금사도주와 벽라도주가 반문을 했다.

“네, 닷새 후 해남검단의 전 인원이 금사도와 벽라도의 군선을 타고 훈련을 나갔으면 합니다.”

제갈청하의 갑작스런 훈련 이야기에 금사도주와 벽라도주가 서로를 쳐다 보았다.

“왜구들이 뭍에 올라가 약탈하는 것을 중지 했듯이 해상에서의 약탈도 잠잠합니다. 굳이 이런 시기에 바다에 나가는 것이 어떤 목적이 있으신지....?”

마사히로 왜구들의 노략선이 바다에 나오지 않은 지 한 달이 넘어가는 시점에 굳이 무슨 훈련을 위해 배를 띄우려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실전과 같은 훈련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북리준이 제갈청하와 철면신산을 돌아보며 말을 이어갔다.

“두 분 도주님이 말씀 하신대로 왜구와 조우할 위험이 없으니 이런 시기에 해남검단원들에게 해상에서의 전투 훈련이 필요하다고 판단 하였습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만....”

뭔가 찜찜한 표정을 짓는 두 도주의 얼굴을 보며 제갈청하가 전음을 날렸다.

‘조금 미안하네....’

‘대계의 전모를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성공 확률이 높으니까 할 수 없지. 일단 배를 띄운 후 두 도주에게 사실을 설명 해야지.’

“닷새 후 저희 해남검단원 전원이 이 곳 벽라도로 이동 하겠습니다. 이에 따른 준비를 부탁 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해 준비 하겠습니다.”

****

“해상훈련?”

목철군에게 보고를 하는 목철상의 얼굴에도 어이 없어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해남검단원 전원을 벽라도와 금사도의 배에 태워 실전 같은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톡 톡 톡 톡’ 앉아 있던 태사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일정하게 두드리는 소리만이 회의실을 울렸다.

“방백, 무슨 꿍꿍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