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복수의 시간이다.
자신의 수하 다섯이 피분수를 뿌리며 순식간에 동강이 난 것을 본 카이토가 적들과 자신들의 사이로 걸어 나오는 한 인물을 주시했다.
“하, 한명?”
그 인물의 뒤를 따라 나오는 조력자가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한 카이토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모두들 수고 많았어. 이제부터 쉬어도 좋아.”
북리준의 말에 한 놈이라도 더 끌고 가려 억지로 신형을 일으켰던 일행들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갔다.
“고작 네 놈 혼자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건가?”
카이토의 말에 북리준의 입에서 유창한 왜어가 흘러 나왔다.
“물론!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호오, 왜어를 배운 놈이군. 네 놈은 단칼에 숨을 끊는 호사를 누리게 해주마.”
북리준이 일월신검을 늘어 뜨린 채 자신의 전면에 서 있는 열다섯의 적들을 향해 왼손을 들어 손짓을 했다.
“오라!”
“이런 건방진....”
전면에 서 있던 다섯의 사무라이들이 왜도를 치켜 들고는 땅을 박차고 자신들을 도발하는 건방진 중원인을 갈라 버리기 위해 달려 들었다.
마치 용의 울부짖음과 흡사한 공간을 가르는 기음과 함께 일월신검이 꿈틀 하며 터져 나온 흉폭한 용의 몸부림에 감싸인 다섯의 사무라이들이 그 자리에서 조각 조각 떨어져 내렸다.
‘미친 용의 몸부림을 보았는가? 보았다면 그것은 죽음일 뿐이니....’
무극칠절 중 현세한 광룡에 아키토와 사무라이들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 질 줄 몰랐다.
“왜 충분한지 알겠지?”
“쳐라!”
아키토의 고함소리에 정신을 차린 열명의 사무라이들이 이를 악 다문채 자신들의 왜도를 뻗어내었다.
순간 일월신검을 자신의 발 앞에 힘있게 꽂아 넣은 북리준의 두 팔이 힘차게 떨쳐지자 수갑 안에 고이 쉬고 있던 일월쌍륜이 뛰쳐 나와 허공을 피로 수 놓기 시작했다.
‘카카캉 퍼버벅 시이이이잉 사아아아악’
자신을 노리고 날아 오는 암기를 걷어 내기 위해 뻗은 왜도가 두 조각으로 갈리며 그 기세 그대로 머리를 가르고 일월쌍륜이 지나간 후 허공을 잘라내는 천잠사에 걸린 사무라이의 팔다리가 공중으로 비산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아키토가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북리준의 두 손이 마치 지휘를 하는 듯 한 움직임에 열 명의 사무라이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는 듯 하더니 ‘푸화아악’ 피를 분수처럼 쏟아내면 조각 조각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미, 미친....”
아키토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한 폭의 지옥도를 보며 후둘거리는 팔과 다리와 풀려 가는 눈에 힘을 주었다.
“나, 난 마사히로 쇼군님의 수제자인 카이토다. 나, 난 네 놈 따위가 두렵지 않다. 크아아아악!”
두 손으로 굳게 잡은 왜도를 머리 위로 치켜 든 채 힘차게 내리 그은 일도가 어느새 집어든 적의 검에 막혔다.
“누구에게 죽었는지 알고는 가거라. 난 해남검귀라고 한다!”
북리준의 오른발에 복부를 얻어 맞고 주춤 뒤로 물러난 카이토의 도가 기쾌한 속도로 북리준을 가르기 위해 비행을 하려는 찰나 ‘번쩍’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번개를 온 몸으로 느끼며 머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두 조각으로 나뉘어 갔다.
“휴우...”
휘청거리는 북리준이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긴 한숨을 내쉬자 어느새 다가온 제갈청하가 등 뒤에서 안아 주었다.
“수고 했고.... 고마워....”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 주는 제갈청하의 손을 다독 거리며 북리준이 웃음을 지었다.
그 때 ‘콰쾅 콰아앙 콰쾅’ 대포 소리가 천지를 진동 하자 일행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 올랐다.
“왔군....”
****
“빨리 빨리 준비하라.”
마사히로의 다섯째 제자인 유키토의 재촉에 서방 포대에 그나마 멀쩡 하게 남은 포 두 대를 저 앞 바다를 까맣게 메우고 달려 오는 청조의 해군 군선을 향해 조준했다.
“발사하라.”
“발사!”
왜병이 포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본 유키토가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물었다.
“두 문이지만 아주 따뜻하게 대접해 주마.”
‘치이이익’ 포의 심지가 타 들어 가는 것을 보고 있던 유키토와 포대에 속한 왜병들이 ‘콰아아아앙’ 순식간에 폭발하는 두 문의 포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북리준이 일월쌍륜으로 포신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모른 유키토는 자신이 왜 폭사 했는지 그 영문을 모른 채 이승을 하직했다.
****
“전군 사격 준비!”
해군 총병인 금대인의 명에 백이십여척의 군선에 달린 포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 오는 왜선들에게 포문을 돌렸다.
“포격하라!”
“발사!”
금대인의 명에 백이십여척에 달린 수백의 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콰아아앙 콰앙 크아아아악 카아악’
연이어 불을 뿜어대는 포에 직격당한 왜선이 그대로 바다 밑으로 가라 앉고 포격에 갈가리 찢긴 왜구들의 시체가 바다 위를 메우기 시작했다.
“후, 후퇴... 후퇴하라! 육지에서 백병전을 준비하라.”
압도적인 화력 차에 왜선에서 쏘아낸 포가 적에게 경미한 피해만을 입히는 것을 본 왜장들이 급히 후퇴를 명했다.
급히 선수를 틀어 무극도로 달려 들어 가는 왜구들의 군선을 향해 쉼 없이 포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전원 상륙 준비!”
총병의 명에 수기를 든 군병의 팔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참령어사가 포대를 무력화 하는데 성공한 모양입니다.”
자신의 옆에 선 최측근 군관의 말에 금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힘든 일을 해내었구나.”
적의 육지에 진설된 포의 공격은 청조의 수군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음을 황태자 앞에서 강조했던 자신을 향해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당찬 표정의 젊은 어사를 떠올렸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만이 남았다. 왜구들을 우리 바다에서 몰아내자.”
무극도에 다가가며 청조의 군선에서 뿜어지던 포의 비가 항만 시설과 정박하려 하는 왜선들에 떨어지며 무수한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적들이 상륙을 시작했습니다.”
마사히로가 급박한 어조로 보고를 하는 두 번째 제자인 켄지를 내려다 보았다.
“쇼군, 사형은 연락이 끊겼습니다!”
“전 병력을 궁까지 물려라.”
“하이!”
마사히로가 흰색 사무라이 장군복을 정갈하게 입고 장도와 중도, 단도를 허리춤에 차례로 꽂아 넣기 시작했다.
“가자.”
마사히로가 신형을 일으켜 궁을 나서자 마사히로의 친위대 오십이 일제히 그 뒤를 따라 나섰다.
“놈들이 후퇴를 하는데?”
숲 속 가장 높은 나무에 오른 독고우가 아래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썰물처럼 마사히로가 있는 궁을 향해 물러 나는 왜구들의 뒤로 청조의 군선에서 내린 해군들이 일사분란하게 포구 쪽에 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궁 앞에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 하려는 거군.”
철면신산의 말에 북리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들 이제 이 곳을 벗어 나시지요.”
다리를 다친 막대광을 곤오가 부축하고 등에 심한 자상을 입은 하후상을 팽무강이 업고 서로가 서로를 부축 하며 숲을 벗어 났다.
“어, 저기 저기.... 검단주님이다!”
배에서 내린 벽사도주와 금사도주, 해남검단원들이 정비를 하는 도중 숲 속에서 부축을 하며 업고 힘겹게 내려 오는 일행들을 발견한 왕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서 빨리 도와 주시오.”
금사도주와 벽라도주가 날 듯이 신형을 날리며 달려 나가자 청조에 속한 군의관들이 그 뒤를 따랐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전신에 피칠갑을 한 일행들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 지자 군의관들이 급히 응급조치를 시행했다.
“두 분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북리준의 말에 금사도주와 벽라도주가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가 뭐 한 일이 있다고요....”
“마지막으로 말씀 드린 것도 부탁 드립니다.”
그 때 낯이 익은 청조의 군관이 북리준에게 다가와 군례를 취했다.
“총병 대인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북리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형을 일으켰다.
“군사께서 부상자들을 잘 돌봐 주세요. 잠시 다녀 오겠습니다.”
군관의 뒤를 따라 청조의 정예 해군들이 집결 하는 장소에 다다르자 바삐 명령을 내리는 총병 대인이 눈에 들어왔다.
“오오, 왔는가? 정말 수고가 많았소. 혹여 다친 곳이라도?”
왜구들이 뿜어낸 피에 범벅이 된 북리준의 전신을 살피며 금대인이 격하게 북리준을 맞이했다.
“탈진한 것 빼고는 다른 부상은 없습니다.”
“이제부터 내게 맡기고 쉬시게. 내가 참령어사의 업적은 황태자 전하께 그대로 고하겠네.”
그 때 금대인 휘하 군관이 달려와 보고를 했다.
“총병 대인! 전군 진군 준비를 마쳤나이다.”
“알겠다. 같이 가시게.”
북리준과 함께 청조의 정예 해군 일만과 해남검단원 오백이 진군 준비를 마치고 끓어 오르는 투기를 다독이고 있었다.
전군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선 금대인과 북리준이 벅찬 가슴으로 서로를 바라 보았다.
“왜구들을 우리 바다에서 몰아 내자. 출벼엉!”
금대인의 출병 명령에 일만 해군이 ‘충(忠)’이라는 기합성과 함께 왜구들이 구축해 놓은 전선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장관이군요.”
하늘을 찌를 듯 충천한 사기에 고무된 군대가 일사불란하게 진군을 시작 하는 모습에 북리준이 감탄을 터뜨렸다.
“이것이 다 자네 덕분이네. 왜구들의 근거지를 알아 오고 우리 군에 치명적 위협인 포대를 무력화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거지. 다시 한번 자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제 부터는 본관에게 일임하고 자네는 축난 몸을 보하시게.”
뒤에 대기하고 있던 군관 이십과 함께 언덕을 내려 가는 금대인의 모습을 보고는 북리준이 몸을 돌려 치료 하고 있는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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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 불리 합니다....”
약 이천이 조금 넘는 왜병들이 구축해 놓은 방어선 너머 구름같이 몰려 오는 청조의 군대를 보며 마사히로의 친위대장인 류가 입을 열었다.
“쇼군! 옥체를 보중하시고 다음을 기약 하시지요.”
류의 말에 마사히로가 차가운 미소를 입에 베어 물었다.
“류! 이 곳의 기반을 닦는데 십년이 걸렸다. 이 곳을 잃고 다음을 기약 할 수 있을까? 난 없다고 본다.”
“쇼군, 오천의 사무라이들이 다음 달에 넘어 옵니다. 그들의 힘이라면 얼마든지 재기가 가능 합니다.”
자신의 아들이자 친위대 대장인 류를 바라보는 마사히로의 눈에 언뜻 미안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넌 너의 친위대를 데리고 궁 뒤편의 군선에 몸을 싣거라. 네게는 다음을 기약 할 기회가 있다. 그 곳에 있는 배에 앞으로 쓰일 군자금과 제반 물품을 다 실어 놓았다. 지금 당장 이동을 명한다.”
“전 안갑니다.”
“빠가야로! 이건 명령이다. 부대주, 대주를 끌고 배에 몸을 실어라.”
“하이!”
“저, 전 안 갑니다.... 아버지.....”
부대주와 친위대에 억지로 끌려 나가는 아들의 모습을 일별 하고는 마사히로가 중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적의 수장 하나는 잡고 가야지. 그게 마사히로의 사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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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청하에게 부탁 하여 왜구들의 천막 하나를 잡아 운기조식을 하며 기력을 회복 하고 있던 북리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사히로, 네 놈은 내가 직접 잡는다.”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하고 북리준이 들어간 막사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제갈청하가 막사를 나서는 북리준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 보았다.
“꼭 가야 돼? 청나라 군인들에게 맡겨도 되잖아?”
“아니, 마사히로놈은 내 손으로 직접 잡아야 돼. 이건 내 개인적인 복수야.”
북리준의 굳은 눈빛에 자신이 말릴 수 없음을 깨달은 제갈청하가 북리준의 가슴에 몸을 맡겼다.
“무탈하게 꼭 돌아 와야 돼!”
“걱정하지마. 금방 올테니까 쉬고 있어.”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제갈청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한참 포갠 후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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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군 전투 준비!”
저 뒤편 거대한 궁 바로 앞에 약 이천여명의 왜구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것을 본 군관의 입에서 명령이 터져 나왔다.
“모두들 알지? 삼재검진이야. 창병은 각 검진에 한 명씩 붙어서 사인 일조로 왜구들을 잡는 거야. 지금까지 죽도록 훈련한 이유가 바로 오늘을 위함이었어.”
왕일이 자신의 대인 청룡대원들 앞에서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고함을 치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어무이 아부이 누이 아우들의 피맺힌 한을 풀 때가 왔다. 혼자만의 객기로 동료들을 위험하게 하지 말고 삼재검진과 창병으로 구성된 진용을 흩트리지 마라.”
“삼재검진이다. 삼재검진! 개별적으로 싸우면 개죽음 당한다.”
“두 말 안 한다. 복수의 시간이다. 훈련한대로만 움직이면 원수를 갚을 수 있다.”
기린대주 범량과 백호대주 봉필, 현무대주 사검평 등이 자신들 휘하 대원들에게 전투 전 주의 사항을 주지 시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