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암행어사
“북리어사가 저리 간곡히 바라는 바이니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태자의 말에 유공공과 금대인의 얼굴에 낙담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두 분께서 북리어사가 무림인의 신분으로 돌아가더라도 우리 청조에 연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닙니다, 전하! 지금까지 받은 은혜가 하늘인데 어찌 다른 것을 바라오리까?”
북리준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황태자를 바라 보았다.
“자자, 북리어사는 두 분이 머리를 짜내는 동안 나와 술이나 마시세. 자, 이리로!”
황태자가 자신의 옆 자리를 손으로 치며 부르고 유공공과 금대인이 옆 방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
“의부님, 저도....”
“그래라. 따라 오너라!”
황태자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연신 북리준의 잔을 채우며 흡족한 술자리를 이어 나가는 것을 보고는 세 사람이 작은 다탁에 머리를 맞대었다.
“무림인으로 활동을 할 수 있는 청조의 관직이 뭐가 있을까요?”
“자칫 하여 관무불침의 불문율이 깨지는 날에는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야.”
유공공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금대인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과거 청태조께서 명나라의 잔존세력과 불손한 무림세력과의 결탁을 감시 하기 위해 운용하신 관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청태조께서.... 계속 말해보시게.”
“황제폐하의 직속으로 무림의 동태를 파악하여 수시로 보고를 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기에 일신의 무공이 출중하고 인망이 있는 무림인을 골라 정삼품 일등시위로 봉하고 암행어사의 패를 주어 평소에는 무림인으로 활동하다 유사시에 관리로 복귀하여 군을 운용할 수 있게 하셨지요.”
“으흠, 정삼품 일등시위의 암행어사라....”
유공공이 금대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태자 전하의 말씀대로 북리어사가 무림인으로 돌아가더라도 조정과의 연이 이어지게 하라는 명에 부합되는 자리가 맞겠구만.”
“거기에 정삼품 일등시위의 관직에 따르는 혜택들이 북리어사의 무림행에 도움이 되기도 할 것이고요.”
유공공과 금대인이 서로 말을 주고 받는 중에 유검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의부님, 금대인! 혹시 태조께서 무림에 암행어사를 파견 하실 때 조정의 인물이 함께 하여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었는지요?”
유검패의 말에 유공공이 대뜸 인상을 찌푸렸다.
“이년 동안 남해에서 경험하고 겪은 일들로 충분하다. 이제 부터는 동창 안에서 네 놈의 자리를 잡아야지.”
유공공의 자신의 양자가 다시 자금성 밖으로 돌려고 하자 대뜸 만류를 했다.
“유공공님 말씀대로 검패 네 자리를 이 곳 황궁에서 잡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네가 유공공님의 양자라 하더라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절대 유익하지 않다.”
“하지만 말입니다....”
“되었다! 황태자 전하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유공공의 서릿발같은 어조에 유검패가 고개를 떨구었다.
“하하하, 오, 두 분 오시었소? 북리어사의 무용담을 듣고 있으니 절로 호연지기기 치밀어 오르는구려.”
“나중에 우리에게도 꼭 들려 주어야 하네.”
“시간이 된다면 꼭 함께 하겠습니다.”
유공공과 금대인, 유검패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자 황태자가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두 분 대인께서 좋은 안을 생각해 내셨겠지요?”
황태자의 말에 유공공과 금대인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금대인이 아주 좋은 안을 내었습니다.”
유공공이 슬쩍 금대인을 띄우자 황태자가 환한 얼굴로 재촉을 했다.
“오오, 말씀해 주시구려.”
금대인이 옆방에서 나눈 청태조께서 운용하셨던 정삼품 일등시위 암행어사라는 관직의 성격과 방향에 대해 설명을 했다.
“아주 흡족한 방안이군.”
황태자가 만족한 표정을 짓자 같이 듣고 있던 북리준이 정중하게 사양하는 의견을 내었다.
“그리 안 해주셔도 됩니다. 황태자 전하와 두 분 대인의 마음만 받겠습니다.”
“허허, 이것은 꼭 북리어사에게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세.
정마대전이 발발하게 된다면 우리 조정이 저 무림 안에서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한정 될 수 밖에 없다네.
이는 우리 조정에도 크나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말일세.”
금대인의 말에 유공공도 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북리어사! 우리와의 연이 이리 쉽게 끊어질 연이라 생각했는가? 과유불급이네, 너무 사양 하지 마시게!”
자신을 생각해서 저리 말을 해 주는 세 사람을 보며 북리준이 포권을 취하고 허리를 숙였다.
“부족하지만 저를 믿어 주시는 만큼 기대에 부응토록 노력 하겠습니다.”
“지금 같이만 하면 된다. 더 이상도 바라지 않노라.”
“황공하옵니다!”
“하하, 좋구나. 아, 그리고 말일세... 북리암행어사가 무림을 종횡 할 때 우리 조정에 연락을 전해 줄 사람을 같이 파견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황태자의 느닷없는 말에 유검패의 얼굴에 희색이 떠오르고 유공공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함께한 유공공의 양자가 함께 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것이 말입니다....”
“유공공이 저어 하는 바는 내가 알겠네. 유검패의 직위를 동창의 종오품 집사에서 종사품 첨형관으로 품계를 올려 파견하겠네. 그만하면 되겠는가?”
황태자가 유공공이 염려 하는 바를 짐작하여 미리 선수를 치자 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드옵니다.”
“유검패 첨형관은 이 시간 이후로 북리 암행어사의 그림자가 되어 무림과 조정을 잇는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한다.”
“충!”
유검패가 기꺼운 마음으로 허리를 숙였다.
“자, 이제 북리어사의 거취는 결정되었고 지난 번 이야기 했던 해남검단의 해산에 대해 금대인이 설명을 해 주시오.”
황태자의 명에 금대인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논의 되었던 해남검단의 해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시작 했다.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북리준의 말에 금대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말해 보시게!”
“말씀 하신대로 해남검단원들의 공을 치하 하여 포상을 한 후 그들의 거취는 스스로 선택 할 수 있는 것인지요?”
“당연하지 않겠소? 포상을 한 후 검단이 해체 되면 그들은 야인의 신분이 되어 어디로 가든 스스로의 선택에 달린것이지요.”
북리준의 말에 뭔가 뜻하는 바가 있음을 감지한 황태자가 넌지시 북리준을 바라 보았다.
“해산된 검단원을 거두려는 것인가?”
“네, 전하! 그들은 저와 이년을 넘게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이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왜구에 의해 친인들을 잃고 난 후 올곧이 검단에 속해 여지껏 생활해 온 사람들이기에 포상을 하고 검단을 해산하다면 갈 곳을 정하지 못할 단원들이 태반일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이에 저와 뜻을 같이하기를 원하는 검단원들만 선별하여 제가 속한 문파에 문인으로 편입코자 합니다.”
북리준의 말에 유공공과 금대인이 가타부타 의견 표명을 하지 않자 유검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불민한 제가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라!”
황태자의 명이 떨어지자 유검패가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어갔다.
“북리어사의 말에 저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도 북리어사와 해남검단에서 이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들과 살을 부대끼며 생사를 넘나드는 중에 그들처럼 이 세상에 아무런 연이 남아 있지 않는 자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절대 원하지 않은 생이별을 왜구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당한 단원들은 오직 왜구들에게 가족과 친인의 복수만이 지상 최대 과제였습니다.
황태자 전하와 두 분 대인의 결정하신대로 검단을 해제하신다면 이들은 생의 목표를 갑자기 상실한 채 어찌 할 바를 모를 사람이 태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북리어사의 말대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세워 주는 것이 타당 할 것이라 저는 생각했습니다.”
유검패가 잔잔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말을 마치자 유공공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녀석, 북리어사와 있는 동안 성장을 했구나...’
“두 분 대인! 북리어사와 검패의 말대로 진행해도 문제는 없겠소이까?”
“크흠, 큼! 북리어사와 검패의 말대로 하기 위해서는 순서가 중요한 사항입니다.”
“순서?”
유공공이 이년만에 훌쩍 커 온 양자의 모습에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 먼저 해남검단의 완전한 해산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어설프게 해남검단이 무림인의 신분이 된다면 나중에 구설에 휘말릴 위험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일단 저희 조정과 완전한 결별이 이루어 진 후 무림 문파에 자율적으로 가더라도 저희의 책임 소재는 없게 되는 것이지요.”
금대인이 유공공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흠! 알겠소이다. 그럼 이 건에 관련하여 두 분 대인께서 잘 처결해 주시길 원합니다.”
“알겠습니다. 심려 마시옵소서!”
****
“소문 들었지?”
기린대주 범량이 네 명의 해남검단 대주들과의 술자리에서 불쑥 말을 꺼냈다.
“대강...”
청룡대주 왕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검단이 해체 되면 갈 곳이 있는 사람 손!”
범량의 말에 유일하게 백호대주 봉필이 눈치를 보며 슬며시 손을 들었다.
“개자식! 잘 먹고 잘 살아라. 광동성에 그 처자... 많이 곱더라. 부디 평안하게 살아라.”
범량이 욕을 섞었지만 진정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봉필의 앞날에 축복을 해주었다.
“저 개자식 빼고 다들 갈 데 없지?”
“새꺄! 너무 윽박지르듯이 이야기 하지 마. 각자 갈 길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잖아.”
청룡대주 왕일의 말에 범량이 고개를 주억 거렸다.
“그건 왕가놈 말이 맞다. 그냥 내 생각만 이야기 하겠다. 나랏님이 우리의 공을 치하해서 포상을 해 주신다고 해도 난 그 뒤에 검단주님을 따라 갈거야. 같이 내려오신 동창 군관님께 넌지시 물으니까 검단주님도 벼슬을 내려 놓고 무림인의 신분으로 돌아 가신다더라.”
“나도 범가놈의 생각에 한 표다!”
왕일의 말에 현무대주 사검평도 동의를 표하고 주작대주 상수인을 바라 보았다.
“난 선택의 여지가 없어. 곡가가께서 죽어도 검단주님 옆에서 죽겠다고 하시니 나도 따를밖에...”
곡굉과 곧 있을 혼례에 검단주가 주례를 봐주기로 했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거취를 확실히 밝힌 곡굉을 따르기로 상수인은 마음을 먹었다.
“그럼 우리 대주 중에는 봉필이 빼고는 다...”
“자, 잠깐....”
봉필이 주뼛대며 손을 들고 말을 이어갔다.
“내자 될 사람과 논의를 했어. 나도 검단주님을 따라 갈 거야, 물론 내자와 함께....”
당연히 백호대주는 혼례와 동시에 검단을 떠날 줄 알았던 동료들의 얼굴에 만족스런 웃음이 떠올랐다.
“저 봉가놈 말이야.... 의리 하나 빼면 시체였지 아마?”
“네 놈 보다 백배는 난 놈이지.”
“이런 개자식! 저 새끼 나 보다 인물이 잘 난 것도 아니고 무공이 뛰어 난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가 잘나서 그리 고운 처자가 넘어 왔는지 두고 두고 그 비법을 기필코 배우고야 말겠어.”
범량이 킁킁 거리며 봉필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모습을 보며 나머지 대주들이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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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군요!”
북리준과 유검패가 해남검단에 도착한 천산무관의 무인들 백여명와 천산파의 문주 도경명, 대 사저인 도교교와 뾰료통한 얼굴의 도기룡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