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미묘한 움직임
밖에서 잠시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던 도경명의 얼굴에 쓴웃음이 피어 올랐다.
‘너무 상심마시지요. 함께 하기 싫으시면 내치면 됩니다.’
북리준의 전음에 도문주가 고개를 주억 거렸다.
‘아버지....’
도교교가 실망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다! 지금 이런 상황도 오년 전만 해도 감지덕지하지...’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사랑스런 딸의 손을 토닥이던 도문주가 북리준을 바라 보았다.
“드시지요!”
북리준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냉랭한 분위기의 두 무리들이 일제히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환영합니다. 저는 천산파의 문주를 맡고 있는 도경명이라 합니다. 이쪽은 군사인 제 딸이고 여기 계신 분은 무사부이신 북리봉공이십니다.”
도경명이 상석 자리에 서서 자신과 같이 들어온 두 사람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복건에서 태천문이라는 작은 문파를 운용하고 있는 섭송인이라 합니다. 무림 동도들이 류비도라는 과분한 별호를 주셨지요.”
백발백염의 촌로차림의 선한 인상의 무인이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자신을 소개 했다.
“같은 복건에서 왔수다. 흑천각주 소벽이요. 별호는 혈전갈이외다.”
검은색 무복에 호리호리한 체구의 여자가 매서운 눈길로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큼, 복건성에서 왔습니다. 남해무문이라는 문파의 장문으로 낙일검 손복전이라고 합니다. 전설의 천산파 분들을 뵙게 되어 일생의 영광입니다.”
이어 좌우에 나누어 앉은 이십여명의 사람들이 각자 소개를 마쳤다.
“이리 마교와의 싸움에 분연히 몸을 일으켜 주신 의혈협사분들게 먼저 감사 드립니다. 저희 천산파가 백 년 전 이차 마교 발호 시 멸문지경에 처했다가 최근에 이리 천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이 곳 광동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교와의 전쟁이 끝나는 날, 다시 천산으로 돌아 가려 합니다.”
도문주가 목이 마름을 느끼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물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직 저희 천산파가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했지만 저희 천산의 이름을 믿고 마교와의 전쟁에 동참하시려는 여러 무림 동도분들의 뜻에 감복 했습니다.
앞으로 두 달 후 벌어질 정사마대전에 저희와 함께 이동 하시려는지 묻고 싶습니다.”
도문주의 말에 남해무문의 손문주가 ‘케헴’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연히 천산파와 함께 전쟁터에 입성을 같이 해야 지요. 그전에 말씀입니다.....”
“말씀하시지요!”
“앞으로 한달이라는 시간 동안 저희 남해무문의 이름으로 천산파와 마교와의 전쟁에 동참할 문파를 모으고 뜻을 같이하는 동도분들께 연판장을 받았으면 합니다.
물론 천산파 문주님의 허락하에서 말이지요.”
“흥! 왜 네 놈의 남해무문 이름으로 연판장을 돌려? 천산파의 이름으로 돌려야지.”
혈전갈 소벽의 쏘아 붙이는 말에 낙일검이 인상을 있는대로 구겼다.
“그 입 다물어라. 천산파의 고수분들은 마교와의 전쟁에 대비해서 하실 일이 산더미 같으실텐데 이런 사소한 일은 우리 같은 문파에서 맡는 것이 당연하지.”
“그래, 그럼 우리 흑천각의 이름으로 하자구. 대 남해무문 문주님도 하실 일이 많으실텐데 할 일 없는 내가 해야겠구만.”
“어디 족보도 없는 사파 나부랭이가 연판장을 돌린다고 서명해 줄 문파는 있고?”
“네 놈 보다는 더 많이 받을 자신 있다.”
“허허, 자고로 앉아서 소변을 보는 족속들과 말을 섞는 것이 아닌데... 쯧쯧쯧.”
“네 놈이 앉아서 피똥을 제대로 싸고 싶은 모양이구나.”
정도와 사파로 나뉘어 서로 날을 세우는 한심한 모습에 태천문의 섭노야가 나직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의 문파에 와서 이 무슨 추태요? 자중들 하시오.”
정사지간 문파인 태천문 섭노야의 작지만 힘있는 일갈에 흑천각주와 남해무문주가 서로를 쏘아 보며 입을 닫았다.
“제가 여기 있는 문파를 대표 할 수는 없지만 너무 도가 지나친 듯 하여 언성이 높았습니다. 죄송 합니다.”
섭송인의 말에 도경명이 기꺼운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허허, 연배로 따지면 대표로 말씀 하셔도 무방할 듯 합니다. 괜찮습니다.”
그 때 북리준이 정파와 사파로 나누어져 으르렁 거리는 두 패거리를 보며 섭노야를 바라 보았다.
“섭노야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여기 계신 남해무문주님의 말씀에 대해 어찌 생각 하시는 지요?”
북리봉공이라고 소개한 천산파의 무사부 말에 섭송인이 겸연쩍은 얼굴로 자신의 의견을 내 놓았다.
“저 같은 경우는 거창하게 연판장을 돌리고 서명을 해서 힘을 모아 천무맹이나 사황련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마교의 발호에 맞서 천산파와 함께 싸울 수만 있다면 하는 작은 바램으로 이 곳에 온 것이지요. 남해무문주님과 흑천각주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고..... 저는 그저 천산파와 같이 서는 것 만으로 만족합니다.”
섭송인의 할아버지가 마교 이차 발호 때 천산파와 함께 마교와 죽기를 무릅쓰고 싸운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섭노야는 그저 천산파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섭노야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천산파의 위명을 듣고 이 곳으로 와 힘을 합치려는 문파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이 기회에 천무맹과 사황련 두 곳에 소속되지 않은 중소문파의 힘을 모아 천산맹을 만들어 대등한 위치에서 마교와 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왜 굳이 맹이니 련이니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저 마교와 싸울 수 있다면 된 거 아냐?”
흑천각주가 남해무문주의 흑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것을 온 몸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허허, 이 세상이 너처럼 단순하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무림군웅들이 모이게 되면 체계와 질서가 필요하고 그에 따른 제반 비용의 운용이나 기타 여러 가지 일들이 반드시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왜 그런 중요한 일들을 네 놈이 하려고 하냐는 거야? 차라리 섭노야가 하신다면 나도 적극 나서서 돕겠다. 넌 아니라는 말이지.”
“네 년이 사사건건 달려드는 것을 보니 숨쉬기가 싫은 모양이구나.”
“숨 잘 쉬어 지거든? 만일 네 놈이 계속 설레발을 친다면 난 사황련 쪽으로 가련다. 솔직히 천무맹과 사황련 두 곳에 소속 되지 못한 중소문파들이 천산파를 중심으로 작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수 있으며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왔지만 네 놈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이 곳도 곧 썩어나겠다.”
“이런 개 썅....”
“어디 사파년이 나서고 지랄이야?”
“사파? 정파나부랭이들이 아주 기가 살았구만. 아주 여기서 사생결단을 내 볼까, 엉?”
흑천각주를 중심으로 한 사파 문파와 남해무문주를 중심으로한 정파 문파가 서로 고성을 내지르며 싸우는 모습을 태천문을 중심으로 한 중도 문파들이 한심한 눈으로 바라 보았다.
“자중하시오!”
도문주의 내공이 그득 실린 목소리에 옥신각신하던 두 무리가 놀란 눈으로 천산파의 문주를 바라 보았다.
‘뭐, 뭐야.... 내공이 장난 아니잖아?’
‘누가 천산파를 날로 먹을 수 있다고 했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곤무극신공의 기운에 태천문 섭노야의 눈에 기쁨의 빛이 흘러 넘쳤다.
‘진정한 천산의 힘이 이어졌음이야....’
“더 이상의 논쟁이나 싸움은 용납하지 않겠소. 우리 천산파는 말씀 하셨던 두 거대 맹에 대항하여 중소문파의 목소리를 대변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이다.
오직 마교의 발호에 대항하여 천산파의 전력을 쏟아낼 뿐입니다.”
“그래도....”
남해무문주가 다시 끼어 들려 하자 이번에는 북리준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 문주님이 천산파의 의지를 확실히 말씀 하셨습니다.”
조금 전 도문주와 전음으로 어느 정도 의견을 나눈 북리준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희 천산파와 함께 마교와 대적할 문파는 언제든지 환영 합니다. 현 천산파의 옆 평원에 저희와 함께 하실 분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한 달 후 출정 할 때 저희와 함께 할 분들은 그곳에서 기거 하실 수 있게 편의를 봐 드리겠습니다.”
“그럼 말씀하신 공간에 모인 문파를 대표하여 제가.....”
남해무문주가 다시 끼어 들려 하자 북리준이 다시 말을 잘라내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태천문의 섭노야하고만 대화를 하겠습니다. 이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문파는 죄송하지만 천무맹이나 사황련으로 떠나시기 바랍니다.”
“이보시오! 제안은 내가 했고 여기 모인....으윽!”
남해무문주가 발끈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삿대질을 하려는 순간 자신만을 목표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살기에 침음성과 함께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다리에 힘도 풀렸냐?”
남해무문주에게 쏘아진 살기를 못 느낀 흑천각주가 비아냥 거렸다.
준엄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살기를 쏘아 보낸 북리봉공의 눈을 피하며 남해무문주가 고개를 숙였다.
“난 찬성입니다. 저희 문파의 문도들과 뜻을 같이할 사파의 중소문파들을 모아 이 곳으로 오겠습니다. 물론 태천문 섭노야가 우리를 대표하는 것도 받아 들이겠습니다.”
“우, 우리도 바, 받아 들이겠소이다.”
남해무문주가 정말 죽기 일보 직전까지 압박 하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짐을 느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시간 이후 저희와 함께 할 분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드리겠으니 태천문의 섭노야만 남으시고 나머지 분들은 각 문파의 문도들과 함께 이 곳으로 와 주셨으면 합니다.”
북리봉공이 축객령에 섭송인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남고 나머지 문파의 수장들이 방을 나섰다.
“도문주님! 저는 이런 일을 감당한 자격이 없습니다. 다른 문파를 찾아 보시지요. 저는 그저 천산파의 그늘에서 함께 싸우는 것만으로 만족 합니다.”
“어렵게 생각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저희와 함께할 문파의 의견을 전달만 해 주시면 됩니다. 섭노야와 같으신 분이 그런 역할을 맡아 주셔야 저희도 편안합니다.”
도경명의 말에 태천문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만 도문주님의 기대에 부응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군요.”
“여기 있는 제 딸과 북리봉공이 수시로 섭노야와 대화를 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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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금대인의 전음에 유공공의 눈이 샐쭉해졌다.
‘무슨?’
‘통상적인 훈련에 따른 움직임과 미묘하게 다른 움직임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봐. 미묘하게 뭐가 다르다는 거지?’
유공공의 전음에 금대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삼왕야의 왕부에 무림인들의 출입이 잦아 졌다는 보고는 한 번 드린 바가 있었지요?’
‘원체 무림인들과의 교류를 즐기시는 왕야의 성품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요새 황태자 전하를 뵈온지가 꽤 되었습니다.”
“자네 말을 들어 보니 그렇군.”
‘다릅니다. 결이 완전히.....’
‘구체적으로.’
‘삼왕야의 친위부대가 무림인들과 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대인의 얼굴을 보며 유공공이 인상을 찌푸렸다.
‘친위부대?’
‘북경성 내에 주둔하는 금려팔기 전체입니다.’
“오랜만에 황태자 전하와 술 한잔 해야 겠습니다. 그 동안 많이 소원했습니다.”
“말 나온 김에 오늘 저녁에 시간을 여쭈어 봐야겠습니다.”
입 밖으로는 신변잡기의 의미 없는 말들을 건네며 전음으로 계속 말을 주고 받았다.
‘내 집무실도 안전하지 못하다?’
‘삼왕야의 주위에 저희가 알지 못하는 무림 고수들이 즐비합니다. 특히 삼왕야과 관련된 이야기는 당분간 전음으로 나누었으면 합니다.’
‘황실 친위대는?’
‘황상의 명만 받드는 친위대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금려팔기들이 훈련 명목으로 움직이는 모양새가 조금 불안합니다.
금려팔기의 훈련에 무림인들이 가세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유공공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차를 삼켰다.
‘설마 삼왕야께서.....?’
‘일단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헤아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교가 발호한 시점에 맞물려 삼왕야의 왕부에 무림인들의 출입이 빈번해지고 금려팔기의 움직임이 상례를 벗어난 점이 걸립니다.’
‘동창과 금의위의 군관들을 조심스럽게 파견 보내는 방법은?’
유공공의 말에 금대인이 고개를 내 저었다.
‘저희 동창과 금의위가 금려팔기의 훈련에 가세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리고, 섣불리 움직이다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도 있구요.’
‘구체적인 물증이 없기에 황태자 전하나 황상께 보고 드릴 수는 없다. 하물며 그 대상이 삼왕야시니....’
‘북리어사를 통해 마교의 동향을 파악해 역으로 조사해 보는 것도 방법일 듯 합니다.’
금대인의 말에 유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패에게 밀지를 보내야겠군. 자네는 삼왕야님의 왕부와 금려팔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해 주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