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첩첩산중 >
북리준의 말에 식사를 하던 좌중의 인물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천마가 왜 피를 뿜으면서 떨어진거지?”
막대광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북리준에게 향했다.
“천무맹주님과 저도 그 부분이 지금도 의아합니다. 저희가 퍼붓는 맹공을 툭툭 손쉽게 걷어내던 천마가 자신의 최고 절기인 파천마강벽을 펼치려다 갑자기 피를 뿜고 쓰러진 것입니다.”
“두 사람의 공격에 경미하게 누적된 피해가 한번에 터진 것은 아닐까?”
막대광의 말에 북리준이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아닐 듯 합니다. 오죽했으면 천무맹주가 함정을 판 것이 아닐까 의심을 했었으니까요.”
“어찌 되었건 천마가 부상을 당해서 우리가 이리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니 다행이라고 할 밖에....”
저녁 식사가 파한 후 효기참령장군의 소집령에 의해 도문주와 북리준이 대표로 정장군의 막사로 향했다.
“어서들 오시오!”
정장군이 핼쓱해진 얼굴로 막사에 들어 서는 도경명과 북리준을 맞이했다.
‘얼굴이 반쪽이군....’
‘십만 군사 중 팔할을 잃었으니 그럴 수 밖에요.’
도문준의 전음에 답을 한 후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천무맹주와 사황련주, 왕석산과 야율제 군사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자, 이제 다 모인 듯 하니 북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듣기로 하겠소.”
정장군의 눈이 사황련주와 병호서생에게 향하자 북궁추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중인들을 일별 했다.
“십만 팔기군의 총사령관이셨던 총병대인이 저희 무림인들을 홀대한 덕에 우리들만 살아남았습니다.”
자신의 상관인 총병이 익히 무림인들을 업신여기는 것을 알고 있던 정장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자세히 설명을 부탁 드리오.”
“일단 그 지옥에 도착 하기 전까지는 야율군사가 설명을 하게.”
사황련주의 말에 야율제가 북로에 들어서 거대한 호리병 지역에서 하루 밤을 보내기 위해 오만 팔기군이 호리병 안에 진을 치고 자신들은 그 안에 들어가기가 협소하여 길에서 야영을 하라는 총병의 전언에 대해 설명을 마쳤다.
“휴우..... 총병대인이 무림인에 대해 가진 부정적인 입장은 익히 알고 있소이다. 총병대인을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소.”
“아니오. 총병대인의 무림인에 대한 그 부정적인 생각이 결과적으로 우리를 살렸으니 말이오.”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 불길한 젊은 사내를 떠올리는 순간 목이 마른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옆구리에 찬 호리병에 손이 가는 것을 급히 멈추었다.
“큼큼, 목이 마르군.”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킨 사황련주가 천천히 기억을 떠올려 설명을 시작했다.
“길가에서 늦은 저녁을 하려던 중 갑자기 땅을 울리는 폭발음과 함께 호리병 지형에 들어서는 입구가 무너져 내렸소.
우리는 적의 습격이 시작 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적의 내습을 방비 하였으나 아무도 공격하지 않더이다.”
사황련주가 적의 내습이 없자 무너진 입구를 기어 올라가 본 광경을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단 한 사람이었소. 검은 무복을 입은 단 한 사람이 천상제의 신법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한 폭의 지옥도를 만들어 내더이다.
하늘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막에 둘러싸여 있고 오만의 팔기군들은 무엇인가에 홀린 듯 서로를 향해 검과 도, 창을 내지르며 상잔을 하고 검은 무복의 사내가 휘두르는 손과 발에 수십 수백의 팔기군들이 터져 나갔소.
이어 뽑아든 검이 한번 휘둘러질때마다 수백의 군사들이 둘로 잘려 가고 그 와중에 죽어가는 병사들이 내뿜는 기이한 안개 같은 것들을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검은 상자들이 쉴새 없이 삼켜내고 있었소.”
다시 한잔의 차를 삼킨 사황련주가 떨리는 눈으로 말을 이어갔다.
“악마였소. 오만의 팔기군들이 서로를 상잔하며 흘러내린 피의 강에 오연히 서서 광소를 터뜨리는 그 자는 사람이 아니었소.....”
사황련주에게 미리 설명을 들었던 야율제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에 고개를 내저었다.
사황련주가 이야기를 끝내고 저도 모르게 호리병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한참을 깊은 침묵에 잠겨 있던 중 천무맹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황련주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오만에 달하는 팔기군이 서로 상잔을 하고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전멸을 했다는 것이 너무 믿기지가 않는군요.
혹시 평소에 드시는 약이나 술에 취하신 상태는 아니셨는지요? 아니면 환각을 보았거나...”
“천무맹주가 그리 의심하는 것도 이해 하오. 하지만 약이나 술에 의해 이지를 상실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소.”
“제가 지근거리에서 련주님을 보필 하였습니다. 련주님의 말씀대로 약이나 술을 가까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저희와 합류한 천무맹 산하 군웅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절벽을 올라 상황을 살피려던 청검장주의 잘린 목이 굴러 떨어져 급히 철군하였다고 합니다.”
사황련주와 야율군사가 설명을 마치자 좌중의 인물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 보았다.
“혹시 북로의 생존자들이 이 곳으로 향할 줄 모르니 여기서 하루 더 묵는 것으로 하겠소이다.”
“생존자는 없소. 전부 다 죽었소이다.”
사황련주가 눈을 감은 채 냉정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강조를 했다.
“정장군!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 저와 사황련주, 천무맹주가 북로로 다시 들어가 사황련주님이 말씀 하신 그 곳을 직접 확인 하고 오겠습니다. 사황련주님의 말씀대로 생존자가 전무하다면 최대한 빨리 이 곳을 벗어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부탁 드리겠소이다.”
정장군의 말에 일행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를 벗어나고 북리준이 사황련주와 천무맹주와 함께 십만대산을 향해 신법을 전개해 나갔다.
“저 곳이오.....”
날이 어슴프레 여명에 의해 밝아져 오는 가운데 사황련주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무너진 절벽을 가리켰다.
‘까아아악 까악 크아아악’
수만마리는 됨직한 까마귀와 독수리 떼 등이 선회하는 무너진 절벽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비린내와 시체가 썩어가는 악취에 천무맹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올라가겠습니다.”
북리준이 앞장을 서 무너진 입구의 절벽을 신법을 전개하여 오르고 그 뒤를 천무맹주와 사황련주가 따라 올랐다.
“이, 이런....”
먼저 절벽 위에 오른 북리준이 눈 앞에 펼쳐진 참상에 말을 잇지 못하고 뒤따라 절벽가에 선 사황련주의 입에서 쌍욕이 절로 터져 나왔다.
“쓰벌.... 내가 이야기 한 대로 잖소....”
술병을 입에 물고 다시 한번 욕지기를 내뱉은 사황련주 옆에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래 펼쳐진 지옥도를 바라 보는 천무맹주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만마리의 까마귀와 독수리떼들이 두 개의 호리병 지형을 가득 메운 팔기군들의 잘리고 터지고 부러진 시신 위에 내려 앉아 마음껏 포식을 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굳지 않은 오만 병사들이 흘린 피의 강을 까마귀들이 찌걱 찌걱 발걸음을 옮기고 연신 기쁨의 울음소리를 내는 참상이 인세에서 다시 못 볼 지옥도 그 자체였다.
“내가 이야기 했잖소? 생존자는 전무하다고....”
그 너른 장소에 엎치고 겹친 시체들의 바다에 넋을 잃고 있던 천무맹주를 향해 북리준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건질 것이 없겠습니다. 돌아가시지요....”
“이, 이 천벌을 받을 놈들이.....”
“그 악마가 오기 전에 빨리 돌아 갑시다. 천마라는 놈 열명이 와도 그 자 하나를 못 당하겠더이다.”
미련없이 신형을 박차고 절벽 아래로 내려 가는 사황련주를 따라 천무맹주가 신법을 전개했다.
“휴우....부디 극락왕생 하소서....”
북리준이 오만 팔기군들의 시체들을 향해 합장을 하고는 사황련주와 천무맹주를 따랐다.
****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효기참령장군의 막사에서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북리준과 정장군이 독대를 하고 있었다.
북리준이 돌아와 사황련주의 말에 틀림이 없음을 확인하고 십만 팔기군 중 생존자는 여기 있는 이만이 다 임을 깨달은 정장군이 말문을 열었다.
“십만 팔기군을 동원하여 총사령관인 총병과 팔할의 군사를 잃었습니다. 이런 대패에 대한 책임을 분명 묻고자 할텐데 난의사 대인이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조촐한 술상을 앞에 놓고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정장군을 향해 북리준이 대답을 했다.
“제가 동창의 유공공과 금대인께 잘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번 패배는 불가항력이었고 정장군께서는 최선을 다하셨다는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부디 부탁 드립니다.”
정장군의 간곡한 읍소를 뒤로 하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북리준을 도문주와 교교, 독고우, 막대광, 제갈청하와 철면신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오만의 군대 중 생존자가 하나도 없다는 거야?”
“네, 사황련주의 말이 맞았습니다.”
“허어.... 오만 대군이 어찌.....”
“문제는 오만 대군의 전멸이 어쩌면 한 사람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설마.... 천마도 그런 일은 못할텐데?”
도문주의 말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오만 대군이 서로 상잔을 하게 한 무엇인가가 있기는 했지만 천마 보다 더한 고수가 마교에 있음은 분명한 듯 합니다.”
북리준의 말에 모두들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첩첩산중이군. 천마라는 존재 하나도 버거운데 그 보다 더한 존재라니....”
철면신산의 중얼거리는 말에 모두들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어떻게 한대?”
제갈청하의 물음에 북리준이 좌중의 인물들을 일별했다.
“정사연합맹은 생존한 이만 팔기군과 함께 일단 천무맹과 사황련으로 돌아가기로 했어. 북경으로 돌아가 자금성에 들어 현 상황을 설명하고 다시금 대군을 일으킨다는 결정이 나면 그에 따라 다시 마교를 칠 준비를 하겠다는 거야.”
“황제가 다시 마교를 치기 위해 군사를 내어 줄까?”
제갈청하의 말에 숙부인 철면신산이 말을 받았다.
“황제가 마음 먹고 보낸 십만 대군이 저 모양이 되었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군대를 보낼 것이다. 이대로 꼬리를 만다면 청조가 마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불명예를 안는 것인데 당금 황제의 성정상 이를 용납지는 않을게다.”
“더구나 마교가 삼왕야와 손잡고 황상과 황후, 황태자, 황태자비의 목숨을 노렸는데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겠지....”
“이렇게 호되게 당했는데 또 군대를 일으킬까요?”
도문주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도교교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왜 관무불침이라는 불문율이 생긴 지 알아야 한다. 개개인의 무림인과 군사와의 무력 차이는 단연코 무림인이 높지.
허나 십만, 이십만, 오십만, 백만 대군이 마음먹고 무림을 쓸어버리려고 한다면 그 또한 막을 수 없음이다. 무림이 관과 불침을 선언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란다.”
독고우의 설명에 철면신산이 첨언을 했다.
“청조의 대군을 끌어 모으면 물경 백만이 훨씬 넘는다고 들었소이다. 십만이라는 숫자가 우리 무림인들에게는 어마어마하지만 청조에서 보았을 때는 일할 정도의 군세일 뿐이지.”
“내일 아침 일찍 북경으로 방향을 잡아 철군하기로 결정 되었으니 우리 천산파도 일단 북경으로 움직이시지요.”
북리준의 말에 좌중의 인물들이 내일 철군을 위해 각자의 처소로 향했다.
< 135. 첩첩산중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