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종루지기 >
“어디로 가는 거야?”
금아의 등에 올라타 편안한 표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북리준이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눈에 담았다.
쌍괴동을 벗어나 하루 밤낮을 푸른 파도를 헤쳐 나가는 금아의 등 위에서 건곤무극검륜삼절을 참오 하고 남해무극칠절과 일월천뢰륜법을 심상으로 완벽하게 다듬은 북리준의 눈에 수십 여개의 작은 섬들이 다닥 다닥 붙어 있는 군도가 들어 왔다.
“이곳이 목적지인 것이냐?”
“꾸오오옹”
저 멀리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섬들 중앙에 위치한 개중에 가장 큰 곳으로 미끄러지듯 물살을 갈랐다.
바다의 파도에 갈리고 갈려 마모될 대로 마모된 커다란 바위 위에 낡은 삿갓을 쓰고 기다란 낚시대를 드리운 채 꾸벅 거리고 졸고 있던 촌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오오, 금구공이 오셨구려!”
섬을 둘러 보겠다며 먼저 뭍에 북리준을 내려주고 온 금아를 보며 노인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스스스슷’
바위 위에서 졸고 있던 촌노의 신형이 바닷바람에 쓸려 사라지고 어느새 바위 밑 금아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금구공! 이 얼마만입니까? 무탈 하셨지요?”
바닷 바람에 거칠어진 손을 들어 금아의 등을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꾸어어 꾸엉 꾸우우웡”
“손님이요?”
금아와 대화가 통하는 정광 어린 눈길의 촌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때 촌로의 등 뒤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북리준이라고 합니다.”
‘언제....? 본 노의 이목을 속이고 이리 가까이 접근을 하다니....’
천천히 허리를 펴고 상체를 일으켜 뒤를 돌아보니 헌앙한 얼굴과 무공을 익힌 것인지 아닌지 가늠이 안되는 청년이 정중히 포권을 취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유약한 서생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끝은 알 수 없는 무학의 대종사 같기도 하고.... 허허허, 드디어 이백년의 기다림이 내 대에서 끝날 수 있을런지...?’
“금구공과 함께 오신 분이신지요?”
“금아를 이르는 말씀이시면 맞습니다.”
“꾸오오오오오옹”
금아의 기쁨에 찬 울음소리에 촌로가 맞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귀인을 뵙습니다. 공야무라 합니다.”
“공야노야시군요. 반갑습니다. 금아가 저를 이리로 인도 하여 오게 되었습니다.”
“저를 따르시지요!”
자신을 공야무라 소개한 촌로가 낚시대와 어망을 정리하고는 섬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누추합니다.”
바닷가에서 섬의 중앙으로 가는 길목에 자그마하지만 정갈한 초가집에 들어섰다.
초가집 자그마한 마당 평상에 북리준을 앉혀 두고는 잠시 후 투박한 그릇과 함께 술병과 말린 생선, 해초류 등이 담긴 선반을 들고 나타났다.
“워낙 촌이어서 대접할 것이 변변히 않습니다.”
“개의치 않습니다. 저도 어촌 출신이라 이런 음식이 오히려 입에 맞습니다.”
공야무가 따라 주는 화주잔을 공손이 받아 들고는 북리준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공야노야 덕에 호강을 하는군요,”
신비로운 웃음을 지으며 화주잔을 비운 북리준의 잔을 다시 채웠다.
두 사람이 말없이 잔을 채우고 받기를 반복하며 청명한 바닷바람을 마음껏 즐겼다.
“금구공께서 왜 귀인을 이리로 모셨는지 궁금하실 법 한데 묻지를 않으시는군요.”
“아, 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너무 즐겼습니다. 주인께서 말씀해 주실 때 까지 객은 기다리는 것이 예의지요.”
진정으로 현재의 분위기에 흡족해진 북리준이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이백년을 기다렸습니다. 귀인께서 우리가 기다리는 그 분이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공야무가 화주잔을 들어 단숨에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천산쌍선 시조님들의 유지를 받들어 저희의 오랜 잠을 깨워 주실 귀인분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제가 말씀하신 그 사람인 것을 어찌 믿으시는 것인지요?”
“귀인이심을 증명할 최후의 관문이 남았기에 아직 까지는 완전히 믿지는 않습니다.”
“최후의 관문...?”
“네, 그 관문을 완성하셔야 쌍선 시조님들께서 안배해 놓으신 힘을 온전히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그 때 어망과 어구를 짊어진 어깨가 떡 벌어지고 기골이 장대한 짙은 눈썹의 사내가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어, 손님이네? 사부, 누구야?”
약 이십대 초 중반 되어 보이는 사내의 벗은 웃통에 강철 같은 근육들이 따가운 햇볕에 번들 거렸다.
“제자입니다. 공야휘라 이름을 주었습니다. 제 피붙이는 아닙니다.”
“사부, 누구냐니까?”
어망과 어구를 마당 한구석에 팽개쳐 놓고는 득달같이 술상으로 달려 들었다.
“퍼어억 쾌애애액”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온 공야무의 권에 가슴을 내어주고 데굴 데굴 굴러가던 공야휘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툭 가슴을 털어내고 헤벌죽 웃음을 지었다.
“우리 사부, 마이 늙었네....”
“몸뚱아리 하나는 튼튼 합니다. 인사 드리거라. 금구공께서 모셔온 귀인 이시다.”
“어, 진짜로? 불곡비종(不哭秘鐘)을 울릴 사람이야?”
“이리와 앉거라.”
공야무가 자신의 옆 자리를 탁탁 손바닥으로 치자 냉큼 평상에 올라 빈 술잔을 내밀었다.
“나 술!”
북리준이 화주병을 들어 넘칠 듯 따라 주자 공야휘가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우리 사부 외에 내 술잔을 채워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잘 지내자!”
“후후, 그래, 잘 지내자꾸나.”
“귀인! 제 직책은 종루지기입니다.”
“종루지기.... 불곡비종....”
“네, 귀인이 통과해야 할 최후의 관문이 무엇으로 때려도 울지 않는 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이 종이 울면 쌍선 시조님의 최후의 안배가 나타날 것이라 저의 사부님께 들었습니다.”
“나도 우리 사부 한테 들었다. 종을 울리는 사람이 내 주군이라고 했다.”
순박한 얼굴로 화주잔을 맛있게 비우던 공야휘가 히죽 웃음을 지었다.
“최후의 안배가 무엇인지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종을 울리고 닷새를 이 곳에 머무시면 그 안배를 볼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오를 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안내 하겠습니다.”
공야무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공야휘가 신바람이 난 표정으로 따르며 북리준을 향해 연신 웃음을 지었다.
“니가 그 귀인이었으면 좋겠다. 주군이 오면 난 이 섬을 벗어 날 수 있다고 사부가 그랬다.”
“이 섬을 벗어나고 싶은가?”
“아주 어릴 때 사부가 날 이리로 데려와 밥도 주고 무공도 가르켜 주면서 주군이 될 사람이 안 오면 사부 대신 종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가고 싶다.”
평생 자신의 사부 외에 사람을 본 일이 없었던 공야휘는 종종 사부에게 들었던 중원 무림에 대한 동경에 밤잠을 설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네가 가면 되지 않나?”
“사부가 말했다. 불곡비종이 울지 않으면 사부같이 평생 이 곳에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나와 사부의 약속이다.”
조금은 모자란 듯 하지만 사부에 대한 믿음과 약속에 대한 굳센 의지가 기꺼워 보였다.
“이 곳입니다.”
섬 중앙에 우뚝 솟은 산 정상에 거대한 종 모양의 바위가 돌로 깎아 만든 종루에 매달려 있었다.
“불곡비종은 저희 선조가 붙인 이름이고 원래 이름은 파면종(破眠鐘)이라 합니다.”
“잠을 깨우는 종이라....”
“이백년 동안 귀인을 기다리며 그 이상을 잠 잘 수 밖에 없는 안배를 깨우는 종입니다.”
북리준이 천천히 종루로 다가가 종 모양의 거대한 바위 위에 손을 얹었다.
“저희 태사부께서 귀인이 오시기를 기다리다 지쳐 종을 울리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고 들었습니다. 거대한 쇠망치, 검, 도, 추, 곤 등 두드릴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다 두드려 보았으나 끝내 종을 울릴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우우우우웅’
자신의 양 팔에 녹아 들어있던 일월쌍륜의 기이한 울림에 북리준이 불곡비종에 얹었던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두 분 다 뒤로 물러서 주시지요.”
“무엇으로 종을 울릴 거야? 주먹, 발, 검?”
공야휘가 북리준의 손과 발, 일월신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아니, 이것으로....”
불곡비종에서 공야무와 휘를 백 여장 밖까지 물러 나게 한 후 북리준이 양 손을 펴들자 그 위에 일월쌍륜이 둥실 떠올랐다.
“어어, 륜이다!”
북리준의 두 손에 떠오른 쌍륜이 흠칫 거리는 어깨춤에 따라 기이한 용틀임과 함께 허공을 수 놓고 공간을 가르며 북리준의 전신을 감아 돌던 쌍륜이 ‘타닷’ 떨쳐진 손목의 떨침에 쏜살같이 불곡비종을 향해 날아갔다.
‘크카가가가각 카카가각’
북리준의 손에서 떨쳐진 일월쌍륜이 스쳐 지나간 불곡비종의 자리에 ‘푸스스스스’ 돌덩이 들이 떨어져 내리고 그 안에 묵빛 종신이 수줍게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오, 종신(鐘身)이...”
공야무가 무엇으로 때리고 벗겨내도 보이지 않았던 종신을 보며 감격에 겨운 눈으로 감탄성을 내뱉었다.
불곡비종의 겉면을 일월쌍륜이 수십번을 헤집으며 묵빛 종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 나자 북리준이 일월쌍륜을 자신의 손 위에 불러 들였다.
“내, 내가 울릴꺼야!”
공야휘가 모습을 드러낸 아름다운 파면종의 모습에 홀려 진기를 가득 실은 주먹으로 냅다 종을 후려쳤다.
“안된다!”
자신의 제자가 십성의 금강묵현권으로 종을 후려치자 공야무가 안타까운 고함을 내질렀다.
‘퍼어어어억 퍼억 퍽 퍽’
묵빛 강기를 하나 가득 두른 권을 연신 내질렀으나 진흙을 때리는 듯한 소리만 작게 울릴 뿐 미동도 하지 않은 불곡비종에 공야휘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사부, 바위도 가루로 만드는 내 주먹에 흔적도 안남아....”
“귀인! 제가 한번 시험을 해 봐도....”
“괜찮습니다.”
불곡비종 앞에서 연신 고개를 갸웃 거리고 있는 공야휘를 뒤로 끌어 내고 진중한 자세로 마보를 취한 후 전신의 내기를 두 팔에 돌려 십성의 현천금강장을 내질렀다.
‘퍼억 퍽’
단 두 번의 모래를 치는 듯한 소리에 공야무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뒤로 물러 섰다.
“사부도 안돼?”
“뒤로 물러서거라.”
공야무의 말에 공야휘가 미련이 남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이 일월쌍륜과 같은 재질로 만든 종인 듯 합니다. 그럼...”
두 손에 띄운 일월쌍륜을 나신을 드러낸 불곡비종을 향해 떨쳐 내자 일륜과 월륜이 불곡비종의 좌우면을 때려 내었다.
‘구와아아아아아앙’
“으윽!”
공야무와 공야휘가 섬을 떨어 울리는 거대한 종소리에 급히 내공을 운기 하여 고막과 진탕하는 내장을 보호 했다.
‘과아아아아아아아앙’
다시 한번 되돌아와 불곡비종을 때린 일월쌍륜에 의해 군도 전체를 떨어 울리는 거대한 파동이 너른 바다 위를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구와아아아아아아앙’
바다를 떨어 울리는 거대한 용의 울부짖음 같은 종소리에 금아가 머리를 들어 포효를 하기 시작 했다.
‘꾸오오오오오오 꽈아아아아아’
불곡비종의 떨어 울림과 만년금구의 포효성이 어우러져 남해의 너른 바다가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오오오오’
네 번의 울부짖음을 끝으로 불곡비종의 종신에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 하더니 한순간에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허허허, 전설이 현신했구나....”
불곡비종의 울부짖음에 수십만마리의 갈매기들이 모이고 모여 거대한 융단을 만들어 불곡비종의 종루 위에서 춤을 추는 장관에 공야무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147. 종루지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