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의뢰 ― 알아야겠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천무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여인이 확신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네, 제가 사람 보는 눈썰미가 좀 있거든요. 그쪽이신 거 같아서요."
밑도 끝도 없이 그쪽인 거 같다는 말에 천무진이 술잔에 있는 술을 입에 툭 털어 넣으며 대꾸했다.
"잘못짚은 것 같은데. 난 당신 같은 사람을……."
천무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여인은 갑자기 품속에 감추어 두었던 뭔가를 슬쩍 꺼내 내비쳤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확인한 천무진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여인이 위에 있는 천무진만 볼 수 있도록 보여 준 건 다름 아닌 이미 내공을 주입한 탓에 붉게 변한 천루옥이었다.
그리고 변색된 천루옥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는…….
자신이 연락을 취한 그곳에서 보낸 사람이라는 걸 뜻했다.
천무진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보고 있는 여인을 내려다봤다.
분명 자기는 서신에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지부장급 이상을 보내 달라 말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이는 기껏해야 이십 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 여인을 보고 그쪽에서 보내온 사람일거라 예상치 못한 것이다. 지부장급 이상이라면 훨씬 더 나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때 자신의 등에 걸치고 있는 커다란 대검을 손으로 툭 치면서 여인이 물었다.
"등 뒤에 달고 다니는 이게 좀 크다 보니 길목에 이렇게 서 있는 것도 주변에 민폐거든요. 일단 그쪽으로 올라가도 될까요?"
말을 하는 여인을 내려다보는 천무진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 이유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상대가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저 아래에서 대검을 등에 짊어진 채로 서 있는 여인과 자신을 조종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판이하게 달랐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그 목소리.
그랬기에 저 여인이 자신이 찾고 있는 그녀가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허나 고통스러웠던 기억 때문인지 그녀가 아니라는 걸 확신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여인이라면 찜찜했다.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하는 천무진의 모습에 아래에 서 있던 여인은 괜스레 표정을 찡그리며 어깨를 어루만졌다.
방금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던 대검이 갑자기 무겁기라도 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여인의 모습에 기가 찼지만…….
그녀가 보라는 듯 뻐근한 척 어깨를 움직이며 재차 물었다.
"힘들어서 그런데 올라가도 될까요?"
천무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여인이라는 사실이 내키진 않았지만 당장에 도움이 필요한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그가 입을 열었다.
"……우선은."
승낙이 떨어지자 예상대로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힘든 척을 멈추고 빠르게 천무진이 머무는 객잔의 입구로 향했다.
객잔 입구로 모습을 감추는 여인을 보며 천무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의 삶을 바꾸기 위해 시작한 첫 계획부터 미묘하게 어그러졌다는 느낌 때문이다.
허나 생각이 채 길어지기도 전에 멀리에서부터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방문 앞에 이르러 잦아들었다.
그리고 소리가 멈춤과 동시에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드르륵.
자연스레 천무진의 눈은 소리가 난 문 쪽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그녀가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백의에 그보다 더욱 하얗다 느껴지는 맑은 피부.
왜 이 여인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단연 시선을 잡아끌었던 것인지 다시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미모였다.
허나 천무진의 시선은 그토록 빼어난 여인의 외모보다는 그녀의 등 뒤에 달린 대검으로 향해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무척이나 크다 생각했는데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 거대한 크기가 훨씬 더 강렬하게 체감이 됐다.
가녀려 보이는 외향에 전혀 맞지 않는 엄청난 크기의 대검. 그런데 그 묘한 조합이 이상하게도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검을 등에 짊어진 채로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서는 여인에게서는 가녀린 외향과는 달리 산을 찢어 버릴 것만 같은 박력이 느껴졌다.
잠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천무진이 다가오려는 여인을 향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들어오기 전에 우선 증표부터 확인했으면 하는데."
방금 전 품 안에 있는 천루옥을 보긴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다.
천무진의 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품 안에 들어 있던 천루옥을 꺼내어 던졌다.
탁.
가볍게 천루옥을 받아 챈 천무진은 이내 그것이 진짜인지 확인을 시작했다.
내공이 주입되어 원래의 색을 잃고 붉게 변한 천루옥의 안에 또렷하게 천(天)이라는 글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에 천루옥 특유의 재질까지.
확실한 진품이다.
천루옥의 상태를 확인하는 천무진을 바라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보기와 다르게 꽤 치밀한 성격이시네요."
"당한 게 좀 있어서. 칭찬이라고 듣지."
짤막하게 대답하는 천무진의 모습에 여인이 뜻 모를 표정을 지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확인을 마친 천무진이 고개를 들자 여인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확인은 되셨어요?"
"들어와. 아무래도 해야 할 이야기들이 좀 있을 것 같은데."
승낙이 떨어지자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여인이 성큼 들어와 천무진의 맞은편으로 다가와 앉았다.
긴 대검을 슬쩍 눕히듯 고쳐 메며 그녀가 자리에 앉을 때였다.
천무진이 쥐고 있던 천루옥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으드득.
소리와 함께 천루옥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며 탁자 한편에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그런 그의 행동에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 귀한 걸 왜 그냥 부숴요?"
"이대로 놔뒀다가는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까."
사용된 천루옥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회수한다. 추후에 계약의 거짓 증표로 사용됨을 막기 위함이다.
천룡성이라는 문파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중원의 많은 것들을 뒤흔들 만한 파급력이 있었고, 당연히 그걸 이용하려는 이들도 많았다.
짧은 설명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얼추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는지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마주한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탁자 바로 옆에 있는 창문을 통해 한 줄기의 바람이 스며들 때였다.
동시에 밀려드는 향기.
그 향기를 맡는 순간 천무진은 다시금 이 여인이 자신을 괴롭혔던 그녀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 여인에게서는 일반적인 여성에게서 날 법한 향수나 분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카락에서 살짝 풍겨져 나오는 은은한 진달래향이 전부였다.
그 반면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녀에게선 언제나 강렬한 향내가 났었다.
물론 자주 바뀌긴 했지만 언제나 진한 향이 났었던 건 기억한다.
그녀는 여인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무인이다.
천무진이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내가 분명 그쪽에 지부장급 이상을 보내 달라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왔죠."
"그 말은 그쪽이 지부장급 이상이라는 말인가?"
"말이 나왔으니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하죠."
자리에 앉은 채로 여인이 포권을 취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적화신루(赤花神樓)의 사총관 백아린(白娥燐)이에요."
"사총관?"
"네, 그쪽이 말하신 지부장보다 훨씬 더 높은 총관 중 한 명이죠."
백아린이라는 이름의 여인은 ‘훨씬’이라는 단어에 한껏 힘을 주며 말했다.
현재 중원의 정보 단체에 대해 거론하면 빠지지 않는 이름들이 있다.
정파를 대표하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의 하나이자 거지들의 집합소인 개방.
그들의 정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알려져 있다.
각지에 퍼져 있는 거지들이 사소한 모든 일들을 긁어모으는데,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정보망을 형성한다.
두 번째로는 하오문이다.
하오문은 개방과 비슷하게 천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소매치기, 기루의 기녀 같은 위험한 일에 휘말리기 쉬운 이들이 주류를 이룬다.
점조직으로 운영되고, 스스로가 하오문의 문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많아 개방만큼 결속력이 크진 않지만 뒷골목의 삶을 살아가는 만큼 비밀스러운 정보들이 꽤나 많다.
세 번째는 귀문곡(鬼問谷).
귀신조차 질문을 한다는 이름처럼 많은 정보를 지닌 이들이다.
주로 마교와 사파 쪽의 정보통으로 이용되고, 휘하에 귀살(鬼殺)이라는 이름의 살수 단체까지 지니고 있어 직접 청부 살인까지 벌이는 이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가 바로 천무진이 선택한 적화신루(赤花神樓).
적화신루는 나머지 세 개에 비한다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같은 선상에 놓은 이유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천무진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이후로는 주변의 다른 건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정신을 반쯤 빼앗긴 상황에 자의로 뭔가를 궁금해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랬기에 가만히 있어도 귀에 들어올 정도의 큰 사건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대부분을 알지 못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밖에 없었던 큰 사건.
바로 적화신루 루주에 관련된 일들이다.
정보 단체 중에서도 자신들의 정체를 꽁꽁 숨기기로 유명한 그들의 수장이 당시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를 무릎 꿇린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정보 단체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우두머리, 어느 정도의 무력을 지닌 것은 당연했지만 그 실력이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이를 꺾을 수준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거기에 그는 개인적인 능력뿐만이 아니라 판을 읽는 눈 또한 있는 인물이었던 듯싶다.
그 소문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과감할 만큼 빠른 결단력으로 세 번째로 언급했던 귀문곡에 속한 살수단인 귀살을 단신으로 쓸어버린 것이다.
귀문곡의 팔다리라 불리는 귀살을 잘라 버린 그는 곧바로 그들을 휘하에 넣으면서, 적화신루는 일약 가장 큰 정보 단체로 급부상한다.
그렇게 최고가 되는 적화신루, 그렇지만 천무진이 그들을 선택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이유였다면 천무진의 입장에서는 가장 피해야 할 상대였을 것이다.
단기간에 빠른 성장을 했다는 말은 곧 그만큼 그들의 뒤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얽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니까.
그리고 자신이 모를 그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건 지금 찾고 있는 그들과 연관되었을 공산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화신루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이 여타의 다른 정보 단체보다 믿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천무진을 조종했던 그녀.
그녀가 천무진에게 적화신루를 없애 주었으면 하는 속내를 보였던 적이 있었고, 그건 지금 그들을 믿을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되어 줬다.
그녀의 표적이었다는 것.
그만큼 적화신루가 그들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으니까.
그녀가 적화신루를 표적으로 삼았을 그때에는 천무진은 다른 부탁을 들어주다 큰 부상을 당한 바람에 쉽사리 거동하지 못할 때였다.
당연히 적화신루를 멸문시켜 달라는 부탁은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벌어진 갑작스러운 사건.
귀문곡을 흡수하며 일약 최고의 정보 단체로 떠오른 적화신루, 그렇지만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들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시는 재건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히 뿌리째 뽑혀 나갔다는 말이 맞을 게다.
그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그곳에서 적화신루의 루주 또한 숨을 거뒀다 들었다.
당시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간다.
그토록 커다란 정보력을 지닌 단체를 순식간에 쓸어버렸다는 건 그만큼 큰 힘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아마도 자신이 찾는 그들의 소행일 확률이 크다.
그리고 그토록 다급히 움직인 걸 보면 자신이 낫는 걸 기다리기 힘들 정도로 적화신루가 큰 방해 요소가 되었으리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뛰어난 정보력과 그녀의 입에서 직접 나온 정황 증거까지.
자신을 조종했던 이들이 무림의 어디까지 파고들었을지 모르는 지금 그들의 제거 대상이었던 적화신루는 최선의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천무진이 백아린에게 물었다.
"사총관이라면 총관이 여러 명이라는 소린가?"
"네, 총관이 몇 명 있고 각자 몇 개의 지부를 관리하는 개념이라고 보시면 돼요."
"흐음."
짧게 소리를 토해 내는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물었다.
"왜요? 제가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봐요?"
"뭐 그보단 생각보다 어려서 조금 놀란 것뿐이야."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죠 뭐. 저도 훨씬 더 연배가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왔거든요."
"젊은 나이에 적화신루의 총관이라…… 제법 능력이 있나 보군."
"그건 제 입으로 말하기보다는 차차 보시다 보면 알겠죠?"
"왜 우리가 계속 볼 거라 생각하는 거지?"
"어떤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전설의 문파인 천룡성의 인물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연락을 줬다는 건 분명 뭔가가 벌어진다는 뜻이니까요. 천룡성의 일은 전적으로 제가 담당하기로 되어 있으니 어쩌면 우리 둘…… 생각보다 오래 보는 사이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별다른 대답 없이 턱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적화신루 총관의 위치에 오른 게 우연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 주는 대답이었다.
허나 단번에 속내를 읽힌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천무진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 무기, 들고 다니기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것 같은데."
백아린이 슬쩍 자신의 뒤편에 눕듯이 자리하고 있는 대검을 향해 시선을 주더니 이내 물었다.
"왜요? 멋으로 들고 다니는 것 같아요?"
"아니, 그렇게 말하기에는 그쪽하고 너무 잘 어울리는 걸 보니 그건 아닌 듯싶어. 대검 손잡이랑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의 크기도 일치하고."
"호오."
백아린이 대단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손 안 쪽이라 잘 보이지도 않을 굳은살까지 확인하다니…… 대단한 눈썰미라 생각한 것이다.
백아린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처음인 거 알아요?"
술잔에 술을 채우던 천무진이 힐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뭘?"
"이 대검이 저한테 잘 어울린다고 한 사람이요. 당신이 처음이라고요."
"……그래?"
"네, 사람들은 제가 멋으로 이런 대검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묻더군요. 그런 큰 무기를 제대로 쓸 수나 있냐고. 그래서 직접 보여 주곤 했어요."
"보더니 뭐라고 하던데?"
"대답은 못 들었죠."
"왜?"
"왜긴요."
말을 받았던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거든요."
웃으며 하는 대답 속에는 뼈가 실려 있었다.
전부 박살을 냈다는 소리일 게다.
그녀의 자신만만한 대답이 나온 이후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는 그때였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자자, 그럼 서로 간 보기는 어느 정도 끝난 거 같은데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저희에게 의뢰를 하시려고 하는 건 뭐죠?"
"여기."
천무진은 미리 준비해 왔던 서찰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이내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안에 적힌 자에 대해 조사를 좀 해 줬으면 하는데. 연관된 세력들이나 평소 친분 있는 이들도 알아봐 줬음 해. 어렸을 때의 기록부터 뭔가 조금이라도 의문스러운 부분은 모조리 다."
의뢰의 내용을 전해 들은 백아린은 손가락으로 서찰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금 확인해도 괜찮죠?"
"나야 빠를수록 좋지."
그녀가 서찰을 펴는 사이 천무진은 술잔에 따랐던 술을 가볍게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서 묵묵히 서찰의 내용을 확인하던 백아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음…… 의외네요."
"뭐가?"
"생각보다 너무 작은 건수라서요."
기대가 컸는지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천무진이 물었다.
"대체 뭘 기대한 건데?"
"천룡성이 움직였으니 막 무림맹 내부의 감춰진 비밀을 파헤쳐라, 아니면 마교 교주의 사생아가 있다는데 그자를 찾아라 등등 뭐 이런 흥미진진한 뭔가를 기대했죠."
"그건 너무 나간 거 아냐?"
당황스러운 말을 쭉 늘어놓는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이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천룡성의 의뢰인데 그 정도는 생각했죠. 그런데 양휴라…… 혹시 이 사람 저희가 모르는 뭐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걸 다 알면 왜 당신들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겠어."
"우선 알겠어요. 당장에는 작아 보여도 천룡성의 의뢰니 뭔가 있겠죠."
서찰을 품 안에 넣은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보다 작은 건수라 여기는 건 당연했다.
양휴는 이전의 삶에서 그녀의 첫 부탁으로 죽여 준 상대였지만 강호에서 손꼽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섬서에서 알아주는 무인, 그리고 그것도 몇 년 후의 일이니 지금은 그때보다도 이름이 덜 알려진 시기일 것이다.
얼추 의뢰에 대한 대화가 끝나자 천무진이 술잔을 채우고는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꾸 아까부터 신경 쓰여서 그러는데 하나만 묻지."
"얼마든지요."
"소매 속에 뭐가 있는 거야? 자꾸 뭔가가 꿈틀거리는데."
"아, 이거요?"
사실 아까부터 말만 안 했을 뿐이지 백아린의 소매에서는 계속해서 미묘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그마한 기척까지도. 뛰어난 무인인 천무진이었기에 그토록 작은 움직임까지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백아린은 서슴없이 소매를 슬쩍 열며 입을 열었다.
"치치."
뭔가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안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뭔가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소매 안에서 나타난 건 주먹 정도 크기의 자그마한 다람쥐였다.
갈색 빛 털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다람쥐는 손에 옥수수 알갱이 한 알을 쥐고 있었다.
치치라는 이름의 다람쥐가 낮게 울었다.
"끼익, 끽."
생각지도 못한 다람쥐의 등장에 천무진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다람쥐?"
"네, 치치라고 제가 데리고 다니는 녀석이에요."
백아린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턱을 어루만져 주고는 이내 소맷자락을 열자 치치라는 이름의 다람쥐는 다시금 그 안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소매를 갈무리한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귀엽죠?"
"그냥 단순히 귀엽다고 데리고 다니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맞아요. 이 녀석 이래봬도 저희 적화신루의 영물이거든요. 사람 말도 알아듣고, 시키는 일들도 하곤 하죠. 종종 중요한 정보를 물어 오기도 하고요."
말을 마친 그녀가 창문을 통해 바깥을 슬쩍 확인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의뢰한 일에 대해 저희 쪽에 알려야 하니 전 이만 일어나 볼게요. 내일까지 이 마을에 계실 건가요?"
"그럴 생각이야."
"제가 내일 점심 이후에 다시 찾아뵐게요. 그때 제 수하와 함께 올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죠?"
"그건 뭐 당신 마음대로."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백아린은 뭔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손을 뻗어 천무진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채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안에 들어 있는 명신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크으."
짧은 소리를 내며 그녀가 빈 잔을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타악.
소매로 입가를 닦아 내며 백아린이 말했다.
"그리고 이런 좋은 건 좀 혼자 먹지 말고 나눠 먹고요."
벌떡 일어나 들어왔던 문 쪽으로 걸어가던 백아린이 몸을 돌렸다.
그녀가 말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제 소개만 하고 아직까지 그쪽 이름을 못 물어봤네요."
이름을 물어 오는 백아린을 슬쩍 바라본 천무진이 이내 빈 잔을 툭툭 치며 말했다.
"천무진이야."
"천무진, 천무진이라……."
그의 이름을 읊조리던 백아린이 이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괜찮은 이름이네요."
* * *
천무진과 만났던 명도객잔을 나선 백아린은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일각 가까운 시간을 걸어 그녀가 도착한 곳은 마을 내부에 있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골목길 내부로 들어선 그녀가 담벼락에 기대어 섰다.
백아린이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이, 이거 받아."
말과 함께 그녀는 품 안에 가지고 왔던 서찰을 하늘 위로 휙 하니 집어 던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담벼락 건너 어둠 속에서 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며 서찰을 잡아챘다.
이내 담벼락 건너편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전설 속 사람을 만나 본 소감은 어떻습니까? 뭐 막 광채가 나고 그럽디까?"
"뭐 그다지. 생각보다 젊다는 거 정도? 그리고…… 제법 눈썰미가 있더라고."
"호오, 그래요? 설마 미남입니까?"
"그게 왜 궁금한데."
"에이. 그거야……."
평소처럼 사내가 자신에게 농담을 던지려 한다는 걸 눈치챈 백아린이 칼처럼 말을 잘랐다.
"시간 없으니까 시답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그 서찰에 적힌 자에 대한 정보란 정보는 모조리 모아 달라고 해. 한시가 급한 일이라고."
"지금 저도 내용을 확인해 봤는데 그리 특별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뭘 모르는 소리 하긴. 천룡성의 의뢰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글쎄요?"
담벼락 너머에서 답변 대신 들려오는 사내의 물음에 백아린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무림에…… 피바람이 불 거라는 소리야. 그것도 아주 지독한."
오랜 역사 동안 강호를 지켜 오던 천룡성의 등장, 그런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분명 큰 사건이 닥칠 거라는 걸 의미했다.
백아린이 중얼거렸다.
"그러니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겠어?"
이제는 멀어져 보이지도 않는 객잔 쪽으로 시선을 움직인 그녀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 피바람이 어디로 향할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