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왕-7화 (7/293)

7화. 습격 ― 뭐라는 거야 (2)

백아린의 질문에 사내가 답했다.

"아직 밝혀내지 못했고, 지금 별도로 조사 중이라고만 전해 들었습니다."

그녀가 물었다.

"이번 조사에 몇 조가 움직였지?"

"중요한 의뢰라 오 조 전원이 움직였었답니다."

"……그런데 몰살당했다고?"

오 조라면 적화신루 내의 조사단 중에서도 실력 있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런 자들이 몰살이라니? 상대가 대마두거나, 높은 위치에 올랐던 무림 명숙이라면 모른다.

그런데 고작 양휴 정도를 조사하는 데 그들이 몰살당했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그에게 무슨 비밀이 있기에…….

"하아."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화신루의 전력 손실을 떠나, 수하들의 죽음은 그녀를 착잡하게 만들었다.

‘고생들 했어요. 그곳에서는 편히 쉬어요.’

눈을 감은 백아린은 죽은 수하들을 향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대부분이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지만, 한배를 타고 나아가던 동료들이다.

그런 이들의 죽음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그녀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죽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남은 식솔을 챙겨 주고, 이렇게 평안을 빌어 주는 짧은 인사가 전부였다.

내일이라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무림이라는 세상에 몸담은 이들의 숙명이었으니까.

감정을 추스른 백아린이 물었다.

"그래서 정보는 어떻게 됐지?"

"곧바로 대기조가 투입되어 정보를 모았고, 그 때문에 다소 시간이 더 걸려서 아직까지 정보가 도착하지 않은 겁니다."

적화신루는 동네 구멍가게가 아니다.

언제나 완벽을 추구해야 하는 정보 단체의 입장 상 정보를 찾으려 움직이는 조사단에게 일어날 만약의 상황 또한 대비하고 있다.

정보의 크기에 따라 투입될 조가 정해지고, 그 중 몇 명이 거기에 매달릴지도 철저한 검토 후에 확정한다.

정확한 판단을 근거로 배치하니 그들이 실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아주 만약에라도 자신들이 파악하지 못한 부분으로 인해 조사단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면 곧바로 대기조가 투입된다.

그들은 조사단이 하던 일을 이어서 마무리 짓는 일을 하게 된다.

이번 양휴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전멸한 오 조의 일을 위임받은 그들이 어떻게든 의뢰를 매듭지은 것이다.

백아린이 물었다.

"그럼 정보는 언제쯤 받아 볼 수 있는 거지?"

"이틀 정도 후에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내의 말에 백아린은 옆에 걸려 있는 커다란 운남의 지도를 확인했다.

사실 지금 그녀는 자신들의 목적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천무진이 정확한 목적지를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말해 준 게 원강(元江) 쪽으로 간다는 것이라 막연하게 그쪽과 이어진 관도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지도에서 원강 인근을 확인하던 그녀가 지도의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이곳에서 확인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리 보고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 조를 몰살시킨 놈들에 대한 뭔가 알게 되는 게 있으면 그것도 나에게 전부 전달해 달라고 말해 줘."

"예. 그것도 바로 요청해 두겠습니다."

"의뢰는 그럼 그렇게 정리하는 걸로 하고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시지요."

"보니까 마을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던데…… 상황이 그렇게나 안 좋은 거야?"

운남성의 소식은 주기적으로 전해 들었지만 막상 와서 본 분위기가 생각보다 더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녀의 물음에 사내가 답했다.

"이 근방 마을들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다 이렇습니다. 그나마 이곳은 큰 마을이라 양호한 편이지요. 곳곳에서 도적들이 나타나 약탈을 하고, 새외 세력들이 살육을 벌이기도 하는 상황이니까요."

"살육까지?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얼마 되지 않은 사건이라 아직 사총관님께는 들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비록 이곳 운남이 백아린의 담당 지역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 큰일이라면 귀에 들어오기 마련.

사내의 말대로 사건이 벌어진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

백아린은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이곳 운남에서 누구를 만나려고 하는 거지?’

운남까지 오면서 만나려 한 상대. 허나 천무진이 그 상대가 누군지 내색하지 않으니 백아린으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그것이 못내 궁금했지만…….

백아린이 사내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말한 것들 부탁하지."

"예, 사총관님."

말을 마친 그녀가 몸을 돌려 포목점을 걸어 나왔다.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해를 잠시 바라보던 백아린이 천천히 객잔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일이 틀어진 걸 천무진에게도 알려야만 했으니까.

그녀는 서둘러 객잔으로 갔고, 이내 천무진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객잔 주인의 안내로 곧바로 천무진이 쉬고 있는 방에 도착한 그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안에서 천무진의 승낙이 떨어지자 그제야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천무진은 백아린을 확인하고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가지고 올 거라 여겼던 양휴에 대한 서류들이 보이지 않아서다.

그가 물었다.

"왜 빈손이야?"

"일이 좀 생겼어요."

"일?"

"정보는 정리됐는데 아직 이쪽으로 오고 있는 모양인 것 같아요."

"애초에 시간을 정한 건 그쪽이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조금 더 걸릴 것 같다고? 장난치는 거야?"

기다렸던 정보가 늦어질 거라는 말에 화가 치밀었는지 천무진이 쏘아붙였다.

빠르게 정보를 전달받기 위해 동행까지 한 상황, 그 첫 의뢰부터 이렇게 어그러지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백아린은 변명이 아닌 사과로 마주했다.

"미안해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고 해도 어떻게든 일정을 맞춰야 하는 게 우리 일이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총관으로서 의뢰인에게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정말 미안해요. 이틀 후에는 받아 볼 수 있다고 하니 이번엔 어긋나지 않게 확실히 처리할게요."

그녀가 거듭 사과의 뜻을 내비쳤다.

곧바로 사과를 하는 백아린의 행동에 천무진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거기에 아예 이 의뢰가 엎어졌다면 모를까 이틀 정도의 시간이 더 걸리는 정도라고 하니 천무진 또한 더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허나 넘어가 주는 건 그렇다 쳐도,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아야 했다.

천무진이 물었다.

"사과는 됐고, 무슨 일인데?"

"직접 양휴의 뒤를 캐던 이들이 모두 죽었어요."

"죽어? 양휴한테?"

"아직 몰라요. 하지만 양휴가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면 모를까 그 정도 되는 자가 죽일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에요."

수하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는 백아린이 확신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의 말에 천무진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양휴와의 싸움, 분명 그는 알려진 것보다는 조금 더 강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예상보다 엄청나게 특출한 실력을 지녔었다면 그러한 부분을 백아린에게 전달했을 게다.

그렇다면 죽어 버린 조사단은 양휴의 짓이 아니라는 것인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천무진이 서둘러 물었다.

"당신 쪽 사람들을 죽인 이에 대한 정보가 나온다면 혹시 나한테도 말해 줄 수 있어? 아주 자그마한 단서들이라도 좋아."

"그건 왜 필요하신데요?"

"내가 찾는 놈들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애초에 양휴를 조사하고자 했던 이유는 그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했던 정체불명의 그녀와, 그 뒤에 숨겨진 모종의 세력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이번 적화신루 조사원들의 죽음은 그들과 연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넘기기엔 뭔가 석연치 않았다.

천무진의 설명을 듣자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룡성의 의뢰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그래, 부탁할게."

해야 할 대화가 끝나자 백아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래요?"

"난 별로 생각 없으니 둘이서 알아서들 해.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내일 보자고."

"알겠어요. 그럼 전 나가 보죠. 내일 일찍 출발할 수 있게 미리 말과 마부도 준비해 둘게요. 푹 쉬시고 식사도 챙겨 드세요."

인사를 마친 그녀가 나가자, 이내 방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방에 홀로 남은 천무진은 상념에 잠겼다.

대체 왜 양휴의 뒤를 캐던 적화신루의 무인들이 죽은 걸까?

정말로 이번 일이 자신이 찾는 그들과 연관이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뭔가 말이 되지 않는다.

저번 삶에선 분명 자신을 이용해 양휴를 죽였다.

그런데 이번엔 그의 뒤를 캐는 이들을 죽인다?

물론 자신이 양휴를 죽인 건 지금부터 몇 년 후의 일이다. 그 몇 년이라는 시간동안 뭔가가 바뀌었을 수도 있긴 했지만…….

분명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데, 그것이 뭔지 도통 모르겠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녀.

그리고 그런 그녀와 함께 자신을 이용했던 그자들까지.

해가 완전히 진 바깥에서 짙은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촛불 하나 켜지 않은 방은 그런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천무진은 턱을 괸 채로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아야 했다.

그들의 속셈이 무엇인지를.

새카만 방에 홀로 앉아 있던 그가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던졌다.

"……대체 너희들의 꿍꿍이가 뭐야?"

* * *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세 사람을 태운 마차가 마을을 벗어나 다시금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한천은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늘어지게 하품을 해 댔다.

그런 그를 보며 백아린이 핀잔 어린 말을 쏟아 냈다.

"부총관, 대체 언제 정신 차릴 거야?"

"대낮부터 움직이니 그러는 거 아닙니까. 오랜만에 침상에서 단잠 좀 자고 있었는데 그게 그리도 싫으셨습니까?"

"마을에서 쉰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

말을 하며 백아린은 슬쩍 천무진의 눈치를 살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제의 일로 그녀는 계속해서 천무진에게 미안한 상황이었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천무진은 그저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천무진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양휴와 그들의 관계에 대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기조식으로 휴식을 대신한 그는 아침 일찍 이들과 함께 다시금 목적지로 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천이 말했다.

"그나저나 객잔 텅텅 빈 거 보셨습니까? 그 꼴로 계속 가다가는 쫄딱 망할 것 같던데요."

"그만큼 이 근방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소리겠지."

"망할 새끼들. 조용히 자기들 동네에 처박혀 있지 왜 이곳에 와서 엄한 사람들까지 죽여 대는지 원. 대체 그놈들은 갑자기 왜 그 지랄이랍니까?"

한천의 말에 마을을 출발한 이래 창밖만 바라보던 천무진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봤다.

천무진이 백아린에게 물었다.

"사람을 죽여?"

"네, 새외 세력에게 마을 몇 개가 거의 몰살되다시피 한 모양이더라고요."

"무인도 아닌 그냥 일반인을?"

물어보는 천무진의 목소리는 조금 높아져 있었다.

언제나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야 하는 무인, 허나 일반인은 아니다. 그들에겐 그들만의 삶이 있고 그 또한 존중받아야 할 것들이다.

그런 그들의 삶을 무공을 아는 강자라는 이유만으로 망가트리지 않는 건 무인들에게 불문율과도 같았다.

하물며 마을을 몰살시켰다면 그 안에는 어린아이와 노인, 힘없는 여인들까지도 있었을 터.

백아린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런 이유로 얼마 전보다 운남의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진 모양이에요. 녹림도들도 기회다 싶어 날뛰고 있고요. 마을을 약탈하기도 하고 장사를 하기 위해 움직이는 상단을 습격하기도 한다더군요. 길목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여행자들의 짐을 털기도 하고요."

"여행자들의 짐을 털어요? 하하, 설마 저희도 그런 놈들에게 털리는 건 아니……."

웃으며 말을 내뱉고 있던 한천을 향해 갑자기 천무진이 손을 내밀었다.

"잠깐."

손을 들어 한천의 이야기를 저지한 그가 바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 무당이 돼 보는 건 어때. 신기가 있는 거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랍니까?"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천무진이 바라보는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한천의 눈에도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의 나무 그늘 아래.

그곳에는 말과 건장한 사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니라고 만들어 둔 길 위니 누군가를 만나는 건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하나 같이 흉악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거기다가 허리에 달고 있는 커다란 무기들은 누가 봐도 겁을 줄 용도로 보였다.

그들의 모습을 본 한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딱 봐도 도적이군요."

"저 정도면 뭐 확정적이네."

마찬가지로 천무진이 바라보던 방향 쪽을 확인한 백아린이 말을 받았다.

한천이 자신의 입을 때리며 중얼거렸다.

"어휴, 하여튼 이 놈의 주둥아리가 문제라니까."

그 순간 열여섯으로 구성된 그들 또한 마차를 발견했는지 재빠르게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양쪽으로 쫙 갈라지며 마차를 포위하듯 에워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마차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자리까지 잡는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싶었다.

마차 주변으로 말이 점점 다가오자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과도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두두두두두!

더불어 그들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마차를 포위한 그들은 사방에서 신명 난다는 듯 소리를 질러 댔다.

"끼요오옷!"

"푸하하! 이놈들!"

갑작스러운 녹림도들의 등장에 마차를 이끌고 있던 마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리고 때마침 앞을 막는 위치에서 이들을 이끄는 수장 사내가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제 자리에 선 채로 달리는 마차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멈춰라!"

동시에 그가 쥐고 있던 도를 강하게 땅에 박아 넣었다.

쿠웅.

땅에 도가 틀어박혔고, 결국 정면을 막아선 녹림도들로 인해 마차 또한 멈추어 섰다.

마차를 멈춰 세운 마부가 기겁해서는 곧장 바닥으로 뛰어내려 넙죽 엎드렸다.

"제, 제발 목숨만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덜덜 떠는 마부의 모습에 그는 더더욱 기가 살았다.

수장 사내가 마차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야야, 됐고. 안에 있는 다른 놈들 빨리빨리 안 기어 나오냐! 겁을 단단히 먹고 그 안에 숨어 있을 요량인가 본데, 우리는 비겁한 놈들을 아주 싫어해. 그러니 냉큼 네 발로 기어서 고개들 내밀라고!"

"낄낄낄!"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내뱉은 말에 좋다는 듯 수하들이 웃어 젖혔다.

그런 시끄러운 주변의 상황에도 마차에 자리하고 있던 천무진이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저놈 지금 뭐라는 거야?"

"음…… 죽고 싶다는 소리 같은데요."

백아린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받았다.

그때 슬쩍 바깥을 확인한 한천이 물었다.

"대장, 어떻게 할까요?"

"우선 나가야 될 거 같은데. 저기 있는 마부도 구해야 할 거 아냐."

"마침 배고팠는데 멈춘 김에 점심이나 먹을까요?"

"글쎄. 저놈들 얼굴 보니 입맛이 갑자기 뚝 떨어져서 말이야."

세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바깥에 있던 녹림도의 수장이 화가 났는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이 새끼들이 지금 당장 나오라는 내 말을 무시하고 안에서 뭐라고들 쑥덕거리고……."

"예예, 나갑니다."

말을 싹둑 자르며 한천이 마차의 문을 열고 먼저 내려섰다.

그 뒤를 이어 천무진이, 그리고 백아린이 순서대로 마차에서 나왔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히죽거리던 녹림도들의 표정이 돌변한 건 마지막으로 백아린이 모습을 드러낸 바로 그 순간이었다.

웃음기 가득했던 얼굴이 순간적으로 경직됐다.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니까.

평생을 살아오며 봐 왔던 그 어떤 여인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미모.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그 모습에 이곳에 있던 열여섯 명의 녹림도 모두는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반쯤 정신을 잃고 있던 수장 사내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넋이 나갔던 눈동자에 서서히 음흉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가 혓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손바닥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내의 얼굴에는 감추기 어려운 더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원래는 순순히 가지고 있는 것만 전부 내놓고 가면 모두 그냥 보내 주려 했는데 막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바닥에 박았던 자신의 도를 뽑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는 이내 흉흉한 기운을 뿜어 대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지닌 재물, 저 말과 마차. 그리고…… 저 계집도 놓고 가라."

말을 내뱉은 그자는 눈을 부라렸다.

마치 허튼 반항 따위 하지 말고 어서 이곳에서 사라지라는 듯이.

그런 상대의 말에 천무진은 옆에 있는 백아린을 슬쩍 바라봤다.

애초부터 그냥 좋게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이들과 싸워야 한다는 소리였는데…….

자신의 실력을 먼저 보여 줄 의향이 없었기에 천무진은 상황을 백아린에게 돌렸다.

"어떻게 해 줘? 그쪽 두고 가라는데. 두고 갈까?"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이 고개를 저었다.

"쫓아가기 귀찮은데 잠시만요. 가능하면 부총관한테 맡기려 했는데, 직접 지목까지 해 오니 어쩔 수 없죠."

말을 마친 백아린이 앞으로 스윽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이내 발 아래쪽에 있는 마부를 향해 말했다.

"아저씨 뒤로 빠져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상황에서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뒤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마부가 거리를 벌리자 백아린의 손이 천천히 뒤로 향했다.

그리고 그 손은 얼굴을 지나 등 뒤에 매달려 있는 대검의 손잡이에 닿았다.

대검을 뽑을 것만 같은 자세를 취하자 사내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 이 요망한 것. 얼굴값 하겠다고 앙탈을 부리는구나. 그 손으로 그런 무거운 무기를 휘두를 수나 있겠느냐. 그냥 그 무기 내려 두고 냉큼 내 품에 안기거라. 내 친히 너를 귀여워해 줄 테니."

말과 함께 그자가 성큼 한 걸음 다가설 때였다.

대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던 백아린의 손이 꿈틀했다.

동시에 등 뒤에서 번개처럼 뽑혀져 나온 대검이 그대로 다가오던 상대를 후려쳤다.

부와와앙!

빠가각!

일부러 날이 아닌 커다란 옆면으로 후려쳤기 때문인지 전신의 뼈가 아작 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공으로 붕 떠서 수십 바퀴를 회전하던 사내는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쿠웅.

큰 덩치의 사내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주변으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일격에 나가떨어진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만큼 갑작스레 벌어진 사건에 사내의 수하들이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실력에 동요한 건 그들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뒤쪽에서 백아린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예의주시했던 천무진의 표정 또한 변해 있었다.

‘……깔끔하군.’

무서울 정도로 검과 하나가 된 움직임이었다.

대검을 뽑아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상대를 향해 휘두르는 일련의 움직임이 마치 하나의 완벽한 그림과도 같았다.

거기다 보통 검이 아닌 저토록 커다란 대검을 마치 장난감처럼 휘둘렀다. 얼마만큼의 혹독한 훈련을 거쳤기에 그게 가능한 것일까?

어느 정도 이상의 실력자라는 건 처음부터 예상했던 바다. 허나 직접 눈으로 본 그녀의 무위는 자신의 예측을 훨씬 뛰어넘었다.

상상을 웃도는 실력에 놀란 천무진이 그녀의 다음 움직임에 더욱 집중하는 그때였다.

백아린이 쓰러진 상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미안. 약해 보여서 힘 조절을 좀 한다고 했는데 그것도 못 버틸 줄은 몰랐네. 그런데 어쩌지? 이것보다 약하게는 좀 힘들 거 같은데. 너희 같이 대놓고 나쁜 놈들은 못 봐주는 편이라."

백아린이 뽑아 든 대검을 가볍게 움직였다.

사람보다 큰 대검이 마치 수수깡처럼 허공에서 이리저리 꿈틀댔다.

부웅 붕.

그녀의 대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왔다.

대검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풀던 그녀가 자세를 잡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각오해. 이제부터…… 한 놈씩 머리통을 박살 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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