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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8화 (8/293)

8화. 최후의 패 ― 입 조심해 (1)

남쪽으로 향하는 도중 만난 녹림도들을 아무렇지 않게 제압한 지 얼추 하루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겁을 집어먹은 마부가 더는 못 가겠다고 하소연을 해 대는 바람에 일행은 결국 예정에 없던 마을에 들러야만 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마부를 기다리던 그때 천무진은 품 안에 가지고 있던 지도를 펼쳐 지금 자신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지도를 품 안으로 다시 갈무리한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 이만 갈라지지."

"컥컥!"

배고프다며 막 사 온 커다란 고기 꼬치를 입 안에 욱여넣던 한천이 사레가 들렸는지 거칠게 기침을 토해 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목을 축이고 있던 백아린 또한 놀란 얼굴로 천무진을 바라봤다.

갑작스레 갈라지자니?

천룡성과의 인연을 이어 가기 위해 어떻게든 따라붙어 이곳 운남까지 함께한 자신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의 반응에 천무진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왜들 그래?"

백아린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희한테 뭐 맘에 안 드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 정보를 제때 못 받은 게 조금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건 이미 넘어가기로 한 문제니 그걸로 뒤끝 있게 굴 생각은 없는데."

"그런데 왜 저희랑 갑자기 끝내실 생각이신가요."

"끝내? 무슨 소리야 그게. 아직 그쪽한테 정보 하나 못 받았는데 끝낼 이유가 어디 있어. 이대로 헤어지면 나만 손해지."

"아니 방금 전에 갈라지자고……."

백아린이 억울하다는 듯 말을 받을 때였다.

천무진이 답했다.

"내가 만날 사람이 있다 했잖아. 그리고 당신들 쪽에서 준비한 정보도 받아야 하고. 근데 지도를 보니 나눠져서 움직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백아린이 정보를 받기로 한 마을과 천무진이 누군가와 만나기로 연락을 취한 곳은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아예 따로 움직이자 제안한 것이다.

그가 말했다.

"삼 일 후에 이 마을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지."

천무진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았다.

그렇지만 왠지 그와 따로 움직인다는 게 석연치 않았는지 백아린은 미적거렸다.

그녀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기에 천무진은 확실히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말했잖아. 아직 나한텐 당신들이 필요하다고. 그러니 연락 끊길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천무진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적화신루가 필요했고, 또 어제 있었던 녹림도와의 싸움 이후 그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이 백아린이라는 여인, 처음 생각보다 훨씬 더 쓸모가 있어 보였다.

"휴우, 알겠어요. 그렇게까지 말하시는데 억지로 쫓아가겠다고 들러붙긴 힘들겠네요."

백아린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이해했기에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정했다. 천무진의 말대로 적화신루가 그에게 필요한 이상 결국 자신들의 연은 끊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 천무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먼저 가지. 말한 것처럼 삼 일 후에 저쪽 길목 끝에 있는 객잔에서 보자고."

"네, 그럼 그때 봬요."

백아린과의 대화를 마친 그가 곧바로 앞에 놓여 있는 말들 중 하나에 올라탔다.

"이랴!"

다음 약속까지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말 머리를 돌렸다.

* * *

둘과 헤어져 홀로 움직인 천무진은 어제 저녁 지금 머물고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곧바로 객잔을 찾아와 하루를 보냈고, 지금까지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중이었다.

전생에서 정신을 조종당한 탓에 기억나는 사건들이 별로 없었지만 최대한 많은 걸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그중에 무엇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미래를 안다는 건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다.

자신에게 닥칠 안 좋은 일을 피할 수도, 그걸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

허나 아쉽게도 천무진에겐 그 미래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었다.

자신이 직접 개입했거나, 너무 유명해서 가만히 있어도 알 수밖에 없었던 몇몇 사건들, 그게 천무진이 기억하는 전부였다.

혹시 잊고 있을 뭔가를 찾기 위해 긴 고민을 했지만 조종을 당한 탓에 기억의 많은 부분은 비어 있다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긴 시간을 방에만 있던 천무진은 창 너머로 해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는 걸 확인하고는 이내 방을 나와 일 층으로 걸어 내려왔다.

객잔의 한쪽에 자리를 잡은 천무진은 저녁거리와 차를 한 잔 주문하고는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곧 이곳을 찾아올 그 누군가를 기다리며.

오늘 이곳에서 만나려고 하는 상대는 천무진에게 최후의 패가 되어 줄 자였다.

천무진은 지금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바꾸기 위해 이런저런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스스로 더욱 강해질 것이고, 자신을 찾아올 그들의 정체를 먼저 알아내 다시금 더러운 수를 쓰기 전에 박살을 내 버릴 계획이었다.

허나 이 모든 건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잘 풀렸을 때의 이야기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이렇게 모든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당한다면?

다시금 그때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지만 결코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결국 천무진은 최악의 경우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들의 손에 빠진 자신을 어떻게든 구출해 낼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

그리고 혹여 구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살인 병기가 되어 있을 자신을 죽여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

사실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최적의 적임자는 무척이나 가까이 있었다.

그건 바로 사부였다.

가장 믿을 수 있고,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었으니까.

진정한 천룡성의 주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무진은 사부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건 죽기 전 삶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그녀에게 조종당하던 그 당시 천무진은 두 차례 사부를 만났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사부는 천무진을 구해 내지 못했다.

분명 사부였다면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을 터.

사부가 왜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었는지 이유를 알 방도가 없는 지금, 그때도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한 사부에게 도박을 걸 순 없었다.

정체불명의 적과 싸워야 하는 천무진에겐 그들을 공격할 창과, 막아 줄 방패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창이 적화신루였다면 방패가 되어 줄 그 적임자는…….

쾅!

객잔의 커다란 문이 떨어져 나갈 듯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 한 사내가 거칠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젊은 사내, 그의 두 눈에서 터져 나오는 야수와도 같은 강렬한 빛은 이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는 듯싶었다.

풀어헤친 머리는 길었고, 잘못 보면 여인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무척이나 곱상했다.

적당하게 균형 잡힌 몸에, 보통보다 조금 더 큰 키.

눈빛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그런 그의 분위기를 확 바꿔 주는 건 오른쪽 뺨에 있는 상처였다.

뺨부터 턱 근처까지 내려오는 상처는 제법 깊었다.

객잔 안에 들어선 그는 우습게도 곱상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거친 남성미를 마구 뿜어 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떤 새끼냐!"

욕설을 내뱉으며 버럭 소리치는 사내의 모습에 천무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젊었을 적에도 저 성질 머리는 여전했던 모양이군.’

변함없는 모습에 반가워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사이, 그가 탁자 사이를 마구 헤집으며 주변에 있는 이들의 옷깃을 하나씩 움켜잡았다.

"너냐? 너야?"

"아, 아닙니다."

멱살을 잡힌 이가 놀란 듯 허둥댔다. 그러자 사내는 그를 밀치며 곧바로 옆에 있는 자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객잔 내부를 뒤집어 대는 그 정체불명 사내의 행동에 모두가 놀란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상황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창가 근처에 앉아 있는 천무진이 잡혔다.

모두가 시선을 피하고 있는 이 와중에 여전히 꼿꼿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유일한 이였으니까.

사내가 성큼 천무진을 향해 다가왔다.

순식간에 천무진의 바로 옆에 도달한 사내가 양손으로 탁자를 소리 나게 짚었다.

쾅!

탁자를 양손으로 짚은 채 그가 천무진의 얼굴을 향해 비스듬히 자신의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냐?"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지척의 거리,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의 난폭함이 절로 느껴지는 이 눈빛을 천무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아니,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니 오랜만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려나.’

천무진이 슬쩍 의자에 몸을 기대며 여유 있게 대답했다.

"그럴걸?"

돌아오는 대답에 사내가 천무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뭐야 이건. 새파란 애송이잖아. 정말 네놈이 천룡……."

사내의 입에서 천룡성이라는 이름이 나오려는 걸 눈치챈 천무진이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타앙!

소리와 함께 손에 들려 있던 젓가락이 탁자에 박힌 채 부르르 떨었다.

천룡성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천무진의 입장에서는 문파의 이름이 거론되는 걸 원치 않았다.

말을 막은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입 함부로 놀리지 마. 그러다가 다치니까."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살기, 그걸 느낀 사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춤하고 입을 닫고야 말았다.

허나 이내 그런 사실을 인지했는지 발을 높게 치켜들었다가 내리찍으며, 천무진의 바로 앞에 있는 탁자를 쪼개 버렸다.

쩌저적.

조각조각 난 탁자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천무진은 소매를 들어 올려 파편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했다.

천무진이 옷에 묻은 나무 파편을 툭툭 털어 낼 때였다.

탁자를 박살 낸 사내가 앉아 있는 천무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내 입, 내가 마음대로 놀린다는데 네가 어쩔 건데?"

사내를 올려다보는 천무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결코 기분이 좋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잔뜩 짜증이 났다는 걸 보여 주는 듯한 미소.

천무진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넌…… 교육이 좀 필요할 것 같네."

말과 함께 천무진은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사내의 엄지와 검지 사이의 오목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강하게 눌렀다.

"크윽."

생각지도 못한 천무진의 힘에 사내가 슬쩍 표정을 구길 때였다. 멱살을 반쯤 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천무진이 곧바로 사내의 손을 뿌리쳤다.

순식간에 둘 사이의 거리가 일 장 정도 벌어졌다.

사내가 아직까지 객잔 안에 남아 있는 이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다들 나가! 죽고 싶지 않으면."

그의 외침에 눈치를 보던 이들이 쏜살같이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순식간에 단둘만이 남게 된 객잔 안.

천무진은 가볍게 목과 주먹을 풀었다.

애초에 이 사내에게 서찰을 보낼 때부터 좋게 이야기로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강한 자가 아니면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내라는 사실은 저번 삶에서 충분히 겪어 봤으니까.

단신으로 마교마저 뒤집었던 자신이 최후까지 죽이지 못했던 사내.

훗날 사파를 대표하는 최고수가 될 타고난 싸움꾼.

그리고 이번 생에선…… 자신의 방패가 되어 줘야 할 최후의 패.

수많은 별호를 가졌었지만 결국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었다.

권왕(拳王) 단엽(段曄)이라고.

예상대로 흘러간 상황에 천무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화로 풀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 너 같은 싸움 개가 그냥 순순히 내 말을 들을 리가 없지."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찾아왔다는 건 애초에 나랑 붙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는 거냐?"

"물론. 그리고 붙어서 박살을 내 줄 생각이고."

박살을 내 준다는 천무진의 말에 재미있다는 듯 이를 드러낼 정도로 크게 미소 지은 단엽이 양쪽 주먹에 쇠로 된 특이한 권갑을 착용했다.

철컥.

그의 양 주먹이 강하게 부닥쳤다.

쿵쿵!

맞닿는 주먹 사이로 권기(拳氣)가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천무진이 짧게 말했다.

"준비됐으면 덤벼."

그런 그의 말에 단엽이 힘차게 걸음을 옮기며 받아쳤다.

"바라던 바다, 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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