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단엽 ― 당연히 나지 (1)
무방비한 상태에서 정확하게 틀어박힌 공격에도 몸을 일으켜 세운 단엽이었지만, 그의 상태가 좋을 리는 없었다.
기혈이 들끓어 피까지 토해 낸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엽의 눈동자만큼은 처음과 변함없이, 아니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두 주먹에 넘실거리는 붉은 기운이 점점 더 거세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펼쳤던 공격보다 더욱더 강렬한 열기가 주변을 뒤덮어 간다. 그리고 천무진은 이 초식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손에서 시작한 기운이 단엽의 전신을 뒤덮어 간다.
천무진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더 귀찮게 됐는데.’
열화신공의 네 번째 초식, 열화무쌍(熱火無雙).
어쩌면 이번엔 아까처럼 아무런 피해 없이 제압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각오를 좀 해야겠군.’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단엽의 실력으론 열화무쌍의 파괴력이 완벽할 순 없을 거라는 점.
넘실거리는 붉은 기운이 단엽의 전신을 감싸며 휘몰아쳤다.
그가 말했다.
"어떻게 방금 전 내 공격을 그토록 쉽게 막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다를 거다."
설령 이 초식의 정체를 몰랐다고 해도, 느껴지는 분위기 자체가 아까완 달랐다.
온몸의 털이 쭈뼛거리며 설 정도의 위압감.
단엽 주변에 퍼져 있는 풀들이 재가 되어 흩날린다.
둘 사이에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턱 막혀 올 정도의 열기가 느껴진다.
찢겨져 나간 옷 사이로 들어 올린 단엽의 팔뚝이 꿈틀거렸다.
힘줄이 치솟았고, 팔뚝은 터져 나갈 듯 팽창했다.
뒤로 슬그머니 검을 잡아당긴 천무진 또한 내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보통의 힘으론 받아 낼 수 없는 공격.
천무진의 검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커다란 형상이 되어 치솟았다.
단엽이 전력을 다해 쏟아 내는 열화무쌍, 제 아무리 이 무공 또한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중간하게 대적했다가는 도리어 당할 수도 있다.
그랬기에 천무진 또한 스스로의 내력을 끌어올려 하나의 빛무리를 만들어 냈으니…… 검강이었다.
콰콰콰콰!
검을 집어 삼킬 듯 솟구쳐 오르는 검강의 모습에 마주하고 있는 단엽의 표정 또한 묘한 흥분에 젖어 들었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이만큼 커다란 검강을 뿜어낼 수 있는 고수라니 실로 재미있지 않은가.
붉은 기운이 그의 손바닥 안으로 몰리며 이내 폭발을 일으켰다.
열화무쌍의 초식이었다.
쿠카카카캉!
두 개의 커다란 붉은 회오리가 기다렸다는 듯 천무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동시에 그 회오리가 지나가는 길의 모든 것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날아드는 두 개의 불꽃 회오리.
천무진은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성큼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몸이 빠르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열화무쌍, 두 개의 회오리가 하나가 되며 그 갑절 이상의 파괴력을 쏟아 내는 초식이다. 그냥 고스란히 정면으로 받아 냈다가는 천무진이라 해도 치명상을 피하긴 어려운 상황.
그렇지만 천무진은 열화무쌍이라는 초식의 힘을 반감시킬 방도를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두 개의 회오리가 겹치는 그곳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허나 그건 찰나의 기회였다.
그 순간을 놓친다면 그 두 개의 불꽃 회오리가 겹쳐지는 곳은 도리어 더욱 단단해지고, 약점이 아닌 절대 뚫을 수 없는 철벽이 되고 만다.
불꽃을 향해 몸을 던진 천무진은 빠르게 한 점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잠깐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조금만 틀어져 버린다면 그 힘을 직격으로 받아야 하니 보통의 담을 가진 사람으로선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함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허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머뭇거림조차 없이 불꽃의 속으로 스스로 뛰어든 천무진이 검강에 휩싸여 있는 검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전신이 타들어 갈 것만 같은 열기.
그렇지만 눈동자는 한 곳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그리고…….
싸아아아!
검강이 두 개의 힘이 하나로 합쳐지는 바로 그 공간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결국 열화무쌍의 초식은 순간적으로 그 힘이 반쪽짜리가 되며, 방향 또한 검강에 막혀 묘하게 비틀려 버렸다.
갈라져 버린 불꽃, 그리고 그 안에서 검강을 뿜어 대는 천무진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그 모습에 단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뒤를 이어 밀려드는 열화무쌍의 기운과 천무진의 검강이 그 상태로 충돌했다.
반쪽짜리의 열화무쌍과, 검강의 충돌로 인해 생겨난 후폭풍!
일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일그러졌다.
아주 잠깐의 정적, 그리고 이어지는 커다란 폭발.
쿠우우웅! 쾅쾅!
소리와 함께 모든 것들이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연달아 터져 나가는 굉음과 함께 주변에 있는 많은 것들이 박살이 나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긴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찾아든 고요함.
하지만 아직도 그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는지 주변은 잔 떨림과, 하늘 높이 치솟은 흙먼지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터벅터벅.
흙먼지 속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풀풀 풍겨 오르는 흙먼지 사이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한 사람.
피투성이의 얼굴로 걸어 나온 이는 다름 아닌 천무진이었다. 그리고 점점 전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그의 손에는 또 다른 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인 단엽이 천무진의 손에 이끌려 폭발의 현장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천무진과는 달리 그는 혼절해 있었고, 그 때문에 천무진은 단엽의 목 부분 옷깃을 움켜쥔 채로 질질 끌고 나오는 상황이었다.
울퉁불퉁하게 변해 버린 싸움터를 조금 벗어난 천무진은 이내 기대어 쉴 만한 나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단엽을 질질 끌고 걷던 천무진은 그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곧바로 나무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하아."
피가 흘러내리는 얼굴을 손등으로 가볍게 닦아 낸 천무진의 시선이 기절해 있는 단엽에게로 향했다.
천무진은 불만스레 혼절해 있는 그의 어깨를 발로 툭 치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망할 자식, 사람 힘들게 만드는군."
약 한 시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을 무렵.
꿈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단엽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단엽은 힘겹게 눈을 치켜떴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온몸이 쑤셨다.
순간적으로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는지 단엽은 드러누운 상태로 힘겹게 고개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내 그의 시선에 나무에 기대어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천무진이 들어왔다.
천무진을 보고서야 방금 전 있었던 일들을 모두 기억해 낸 단엽이 힘겹게 상체의 절반 정도를 일으켜 세웠을 때였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일어났군."
들려오는 목소리에 단엽이 움찔했다.
이렇게 쓰러져 있었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러웠는지 그가 괜스레 말을 돌렸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자긴, 말은 정확하게 하지그래? 잔 게 아니라 기절한 거지."
"큭!"
분하다는 듯 짧게 숨을 들이켰지만 단엽은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차마 그럴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져 버렸으니까. 이 정도로 완벽하게 패해 버리니 핑계를 내뱉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결국 단엽은 두 손을 번쩍 들며 그냥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그가 소리쳤다.
"젠장, 그래 졌다. 내가 졌어."
분하다는 듯 소리를 내지르는 단엽의 목소리에 천무진이 그제야 눈을 떴다.
"그럼 슬슬 이야기를 좀 해도 되겠군. 서찰은 확인했을 테니 내가 왜 찾아왔는지는 알지?"
"봤지. 그런데 대체 그게 뭔 내용이야? 내가 필요하다니? 나한테서 뭐가 필요한데?"
"말 그대로야. 네가 내 수족이 되어 움직여 줘야겠어."
천무진은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게다.
죽었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왔고, 혹시 모를 그날을 대비해서 자신을 구하게 하기 위해 널 선택을 했다는 말을 어찌 할 수 있으랴.
단엽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그 말을 내가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
"물론. 애초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면 서찰을 보고도 나오지 않았을 거잖아?"
"……."
천무진의 말에 단엽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으니까.
다른 이들도 아닌 천룡성의 연락이었다.
단엽은 궁금했다.
천룡성의 인물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그들이 왜 세상에 다시금 나타났는지도 말이다.
천룡성이 나타났다는 말은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질 징조라는 것인데 그러한 사실이 단엽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단엽이 물었다.
"널 따라서 나한테 이득이 뭔데?"
그런 그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천무진이 답했다.
"강해지게 해 주지. 그리고 강한 놈들과 무진장 싸워야 할 거야."
"강한 놈들과 무진장 싸운다고?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데."
맘에 든다는 듯 단엽이 자리에 누운 채로 히죽 웃었다.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 대답은? 따를 거야 말 거야?"
애초에 자신의 서찰을 받고 나왔을 때부터 답은 나와 있다 생각했지만, 천무진은 확실히 물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단엽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답했다.
"좋아. 천도의 맹약도 있고, 나 또한 흥미가 좀 돌거든. 네 옆에 있으면 진짜 강한 놈들과 신나게 싸워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말이야."
승낙이 떨어지자 천무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한 배를 타기로 했으면 이제부터는 날 부르는 호칭을 좀 바꿨으면 좋겠는데."
"왜?"
"내 수족이 될 상대한테 너나, 야라는 소리 별로 듣고 싶지 않아서."
"그럼 뭐라고 해줄까? 천 씨?"
"아니. 주인님이라고 불러."
"뭐야? 너 미쳤냐?"
여전히 누운 채로 눈을 부라리는 단엽을 향해 천무진이 말을 받았다.
"졌잖아. 그럼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어야지? 강한 자의 말이 법이다. 그게 네 좌우명 아니었던가?"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글쎄. 아무튼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 행동일 텐데."
천무진의 말에 단엽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톱을 깨물며 그가 낮은 소리를 토해 냈다.
"끄응."
사내답지 못하다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 단엽이다.
그랬기에 더더욱 천무진의 말에 어쩌질 못하고 있는 그였다.
수하들에게 항상 그리 떠들어 대고는 막상 자신이 지키지 않는다는 건 천무진의 말대로 사내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단엽이 결국 두 눈을 꽉 감고 소리쳤다.
"젠장, 나중에 널 꺾으면 그때는 반대로 나한테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할 테니, 각오 단단히 하라고."
지지 않겠다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단엽의 시선에 천무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받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도전은…… 언제든 받아 줄 테니까."
"언제든 받아준다는 그 말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지."
기회만 나면 언제든 다시 도전을 해서 이 굴욕을 씻고야 말겠다는 듯 단엽이 이를 갈았다.
분한 표정을 지으며 누워 있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주인이라고 부르기 전에 하나만 묻자."
"물어."
"……왜 나냐?"
단엽은 분명 강했다.
비슷한 나이 대에는 적수를 찾기 어려울 테고, 중원을 통틀어도 엄청난 고수 중 하나다. 하지만 천룡성이라는 전설의 문파라면 더 강한 고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
그런데도 불구하고 굳이 자신을 찾아온 연유를 모르겠다.
그랬기에 궁금했다.
왜 자신이어야 하는지.
단엽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던 천무진이 이내 대답했다.
"네가 무림에서 두 번째로 강한 자가 될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두 번째로 강한 자가 될 거라는 확신이 있다는 말에 단엽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밀려드는 고통에 표정을 구기면서도 단엽은 불만을 터트렸다.
"뭐야. 첫 번째면 첫 번째지, 왜 재수 없게 두 번째야."
아픈 와중에도 두 번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따지고 드는 단엽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투지 넘치는 사내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 단엽을 향해 천무진이 말했다.
"일인자가 될 사람은 따로 있거든."
"그게 누군데?"
"누구긴."
천무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답했다.
"당연히…… 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