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목적지 ― 제법 쓸 만하거든요 (2)
사천성 성도에 위치하고 있는 무림맹은 예로부터 정파 무림의 대들보와도 같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주축으로 하여, 여타의 중소 세력들이 하나로 힘을 모은 곳.
정파를 대표하는 그들의 힘은 중원 곳곳에 스며져 있었다.
거기에 오대세가 중 하나인 사천당문 또한 이곳 성도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니, 당연히 마을 자체에 정파 무인들이 득실거렸다.
그러다 보니 무림인을 보는 게 원래는 쉬운 일이 아니거늘 이곳 성도에서만큼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창 바깥을 힐끔 내려다보던 단엽이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정파 무인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망할, 내가 살다 살다 무림맹 코앞까지 오다니."
사파인 그의 입장에서 가장 껄끄러운 곳 중 하나가 바로 이곳 성도일 것이다.
더군다나 무림맹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객잔에 자리하고 있자니 뭔가 염탐이라도 하러 온 첩자가 된 기분이었다.
성도에 도착하고 이틀째.
다른 이들 또한 업무적 이유가 아니면 외출을 자제했지만 개중에 단엽은 아예 바깥으로 한 발자국조차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단엽은 그 위명에 비해 얼굴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혹여 사파인 대홍련의 부련주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시끄러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무림맹이 있는 성도로 오는 동안 천무진은 두 번째 의뢰를 했던 양가장에 대한 정보를 받아 확인한 상태다. 그랬기에 양휴와 양가장에 대한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허나 그중에는 그리 크게 눈에 띄는 어떠한 미심쩍은 부분이 없었다.
무림맹과 양가장의 관계라고는 해 봤자 철의 일부를 거래하는 정도로, 사실 이건 굳이 양가장뿐만이 아니라 여타의 많은 세력들과도 진행하는 일이었다.
무림맹은 중원 곳곳의 가문들에게서 철을 구했고, 양가장은 그 수십여 개의 거래처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들이 있는 섬서성에도 이 같은 거래를 하는 가문이 열 개가량 되니 굳이 특별할 것은 없어 보였다.
다만 이번 의뢰를 통해 하나 확실해진 것이 있다.
첫 의뢰인 양휴라는 사내와, 두 번째 의뢰인 양가장이라는 가문의 관계.
백아린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았다.
비록 먼 친척이긴 하지만 양휴는 양가장이라는 가문과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전생에서 정체불명의 그녀가 한 부탁으로 죽였던 상대들.
과연 서로 관계가 있는 양휴와 양가장이라는 가문을 모두 없애려 한 것이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직은 그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이 같은 일이 우연으로만 벌어졌을 리가 없다. 그러니 그 두 개를 잇는 뭔가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바로 무림맹이었다.
무림맹에 들어갔던 양휴가 한나절도 안 돼서 쫓겨난 이유가 뭔가 미심쩍었던 탓이다.
적화신루조차 이유를 알아내 오지 못한 사건, 그랬기에 직접 알아내기 위해 이 성도까지 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무림맹에 들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허나 그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곳도 아닌 무림맹, 쉽사리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천무진에겐 백아린의 힘이 필요했다.
무림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높은 위치에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인맥이 백아린에게는 있었다.
물론 단순히 적화신루의 인맥을 통해서 무림맹의 이곳저곳을 파헤치고 다니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천무진에게는 만약을 대비해 챙겨 온 여분의 천루옥이 하나 있었다. 이걸 통해 무림맹의 높은 인물에게 천도의 맹약을 언급해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천무진의 입장에서는 아무에게나 천루옥을 주며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상부의 인물에게 전달해 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중간 과정을 빼고 은밀히 상부에 직접적으로 천루옥을 건네는 것, 그게 바로 백아린의 임무였다.
그 같은 연유로 낮부터 나간 그녀였지만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딱히 아무런 연락조차 오지 않고 있었다.
탁자에 자리한 채로 하염없이 백아린을 기다리고 있는 천무진을 향해 단엽이 말했다.
"나간 게 언젠데 아직까지 안 와. 그 여자 믿을 만은 한 거야?"
단엽의 말에 슬쩍 그에게 시선을 돌렸던 천무진이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
"실력 하나는 쓸 만하더군."
정보를 분류할 때 보았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과, 판단력. 그리고 상대가 약하긴 했지만 녹림도들을 때려눕힐 때의 무공까지.
두 가지 부분 모두에서 백아린은 천무진이 기대한 것 이상의 능력을 보였다.
그랬기에 단엽의 물음에도 일절 망설이지 않고 이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무진의 대답에도 단엽은 믿기 어렵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별거 없어 보이던데. 괜히 쓸데없이 큰 무기나 들고 다니는 것 같고. 곱상하게 생겨 가지고 그 무거운 거 뭐 쥐고 흔들 수나 있대?"
단엽의 질문에 며칠 전의 일을 더듬으며 천무진이 말을 받았다.
"한 손으로 쥐고 흔들면서 상대를 으깨 버리던데."
"……그래?"
대답을 하는 단엽의 눈동자에 흥미롭다는 감정이 일었다.
싸움을 즐기는 그로서는 백아린의 무기가 언제나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런 무기를 휘두르는 상대와 한번 싸워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다만 그녀가 너무 약할까 봐 싸움을 걸지 않은 것뿐이다.
호전적이라 해도 강자와의 싸움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 약한 상대를 괴롭히는 건 귀찮을 뿐이었으니까.
단엽이 중얼거렸다.
"재밌군. 생긴 거하고 다르게 제법 한가락 하는 모양인데."
단엽에게 시선을 주고 있던 천무진이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네가 생긴 걸로 뭐라 하기엔 좀 그렇지 않아?"
"뭐, 뭐가!"
스스로도 사내답지 않게 생긴 외모라는 걸 잘 알기에 단엽은 제 발이 저렸는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천무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천무진을 보며 단엽은 이를 갈았다.
곱상한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 있는 단엽은 여자 같이 생겼다는 식의 말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상대가 다른 이였다면 당장이라도 박살을 내 주겠다며 달려들었겠지만…….
"저걸 콱. 주인만 아니었으면 당장에 죽여 버리는 건데."
"다 들려. 뭐 언제든 죽일 수 있으면 덤벼도 되고. 지금 그 실력으론 안 되겠지만."
고개를 돌린 채로 대꾸하는 천무진을 향해 단엽이 스스로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리며 화를 표출했다.
그때였다.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방 안에 남아 있던 두 사람이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컥.
문이 열리며 바깥에서는 급한 걸음으로 뛰어온 백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약속 잡혔어요."
네 명의 일행은 성도의 거리를 따라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을의 번화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큰 주루였다.
사 층으로 된 주루에는 밝은 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또 그만큼 많은 이들이 오고 가기도 했다.
청풍루라는 이름의 이곳에 도착하자 백아린은 곧장 자신을 안내하러 온 이에게 말했다.
"예약되어 있을 거예요."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좌천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을 거라 하던데요."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말과 함께 뒤쪽으로 잠시 갔던 중년의 사내는 이내 확인을 끝마치고 다시금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확인되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말과 함께 사내는 일행을 청풍루의 한 곳으로 안내했다. 삼 층의 구석방에 도착하자 그가 문을 열었다. 방 내부는 제법 컸다.
스무 명 정도가 자리해도 될 정도로 커다란 장소.
사내가 예를 갖추며 말했다.
"그럼 주문은 다른 손님들이 더 오시면 받도록 하지요."
"그렇게 해 주세요."
백아린이 대답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나머지 셋 또한 걸음을 옮겼다.
방에 모두가 들어서자 뒤편에 있던 사내가 문을 닫고는 사라졌다.
빈자리에 가서 앉으며 천무진이 물었다.
"좌천이 누구야?"
그들을 무림맹 내부에서 움직이게 만들어 줄 정도의 힘이 있는 자라면 그만큼 높은 직위에 있어야 할 터.
헌데 천무진은 좌천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이상했다.
적어도 무림맹 내부에서 그 같은 일을 벌이게 해 줄 정도의 능력자라면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할 테니까.
그의 질문에 백아린이 답했다.
"사람 이름이 아닌데요."
"그럼?"
"그냥 지방으로 좌천되기 싫다고 그 이름으로 걸어 놓겠다던데요."
"……기가 막히는군."
말도 안 되는 농담에 천무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혹시나 하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이 그 실없는 농담을 한 장본인은 아니겠지?"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이 어색하게 딴청을 부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맞나 보군. 도대체 누군데?"
자신들에게 그 같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라면 무림맹 내부에서 큰 힘을 가진 인물일 터.
그의 질문에 백아린이 답했다.
"위지겸(慰遲兼)이요."
말을 듣는 순간 천무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 이름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무림맹 총군사 천뇌문사(千腦文士) 위지겸.
뛰어난 지략가로 오랫동안 무림맹을 지탱해 온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자다.
저토록 실없는 소리를 해 댄 것이 무림맹의 총군사인 위지겸이라는 사실을 알자 천무진은 절로 고개를 저었다.
"하아, 무림맹의 앞날이 캄캄하군."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천무진은 이 자리에 오기로 한 이가 위지겸이라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총군사인 그라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 도움을 줄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가 물었다.
"총군사와도 연이 닿아 있던 거야?"
"아뇨, 사실 총군사를 본 건 저도 오늘이 처음이에요. 개인적으로 무림맹에 아는 분이 한 분 있는데, 그분을 통해 접견 신청을 했거든요. 그래서 직접 만나 뵙고 전해 주셨던 천루옥을 그에게 건넸죠. 아무래도 만나기 쉬운 분이 아닌 데다가, 총군사께서도 오후까지 자리를 비우고 계셨던지라 저도 늦어진 거고요."
말을 내뱉는 백아린의 옆에서 한천이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총군사를 내일 만나면 안 되냐고 하는 걸 저희 대장께서 급한 일이라며 얼마나 밀어붙이셨는데요. 정말 어렵게 자리 만든 겁니다."
마치 누군가 들으라는 듯한 말투에 단엽이 헛기침을 해 댔다. 이곳에 오는 내내 뭐 하다 이렇게 늦었냐며 시끄럽게 굴어 댔던 탓이다.
그런 단엽을 보며 한천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때 천무진은 방 내부를 한번 크게 둘러봤다.
화려하게 꾸민 내부,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장식품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바로 앞에 있는 탁자조차도 제법 가격이 나가 보인다.
옆방에도 사람이 자리하고 있는지 웃음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고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있었다. 방음은 제법 좋았지만 사실 무인들에게 그건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실력이 뛰어나다면 수백 발자국 바깥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조차 감지해 낼 수 있는 게 무인이 아니던가.
방 안을 살피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때 마침내 기다리던 이가 일행들이 있는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이내 멈추었고,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중년의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옷차림은 단정했고, 인상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감추기 힘들 정도의 특별함이 있다는 게 느껴지는 그런 사내였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희끗희끗하게 자라난 흰머리가 그의 나이를 짐작케 했다.
상대를 본 백아린이 먼저 일어나 예를 갖췄다.
"오셨군요."
"허어,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또 뵙는 거지만 반갑습니다."
마찬가지로 포권으로 인사를 건네는 중년 사내.
총군사 위지겸이었다.
포권으로 인사를 주고받은 상황에서 위지겸의 시선이 자연스레 다른 일행들에게로 향했다. 한천이야 이미 백아린과 함께 보았으니, 남은 건 둘이었다.
천무진과 단엽을 번갈아 바라보던 위지겸이 누가 천룡성의 인물인지에 대해 물었다.
"두 분 중 어떤 분이신지요?"
"납니다."
위지겸이 한 질문의 의미를 알기에 천무진이 곧바로 답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생각보다 젊으신 분이군요. 아, 우선 좀 들어가서 앉아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천무진의 승낙이 떨어지고 나서야 위지겸은 방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가 안으로 걸어 들어와 한쪽에 위치한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위지겸이 품에서 지니고 있던 천루옥을 꺼내어 내밀었다.
이미 확인을 하기 위해 내력을 주입한 탓에 색은 붉게 변해 있었다.
내민 천루옥을 천무진이 품 안으로 회수하는 걸 바라보던 그가 말을 시작했다.
"갑작스레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시다고요. 그게 무엇인지……."
말을 내뱉는 위지겸을 향해 천무진이 갑자기 손을 들어 이야기를 저지했다.
그의 행동에 위지겸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천무진이 말했다.
"그 전에 옆방에서 손님인 척 떠들어 대는 이들이 누군지부터 말해 주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만."
"……!"
위지겸이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천무진의 그 한 마디에 다른 세 사람의 표정도 묘하게 변했다.
한천은 황급히 옆을 바라봤고, 단엽은 슬쩍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 백아린은 불편한 표정을 지은 채로 입을 열었다.
"총군사께서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접하시나 보군요. 제가 알기로 실없는 농담은 좋아하셔도, 예의는 바르신 분으로 알았는데요."
"허, 거참."
쏘아붙이는 그녀의 말에 위지겸은 얼굴을 긁적였다.
그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그때였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옆방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싶더니, 그 목소리의 주인공 중 한 명이 방의 바로 앞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모습을 본 위지겸이 입을 열었다.
"들어오셔도 된답니다."
드르륵.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열린 문, 그리고 그 건너에는 노인 한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얀 백발에 보통의 체구. 인상은 평범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였다.
적당할 정도로 기른 하얀 수염과, 옷으로 가려져 있긴 하지만 단련이 잘된 탓인지 떡 벌어진 어깨는 무척이나 사내답게 느껴졌다.
그 노인을 보는 순간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단엽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작게 움찔했다.
그때 노인이 새하얀 수염을 살짝 어루만지고는 방 안으로 들어서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설마 알아차렸을 줄은 몰랐소이다. 일부러 시간 차를 두고 자리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 정도 수를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서 말입니다."
어느 정도 예의는 갖추며 말하곤 있었지만 천무진의 말투는 싸늘했다.
원래 누군가에게 쉽사리 휘둘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전생의 일이 있고부터는 그런 부분이 유독 더 강해졌다.
뭔가 뒤에서 꼼수를 부리고 있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에 지금 이 상황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인이 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안 것인지 물어도 되겠소이까? 분명 들킬 만한 이유는 없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 귀에는 당신들의 대화가 조금씩 이어지지 않는다고 느껴졌으니까요."
분명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긴 했지만, 그것들이 묘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치 억지로 연기를 하는 느낌.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들이 나누는 대화만으로는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전생의 일이 없었다면 천무진 또한 별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허나 이번엔 달랐다.
많은 경험을 했고, 조그마한 것에도 신경의 끈을 놓지 않는다.
고통 가득했던 전생의 경험 때문이다.
자잘한 모든 걸 신경 쓴 덕분에 그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서도 뭔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천룡성의 연락이고, 그걸 받은 이들이 무림맹이라면 조용한 장소 따위는 언제든지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옆방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부터 미심쩍었다.
천무진의 말에 노인은 괜히 옆방을 흘깃 보며 탓하듯 말했다.
"거참, 최대한 자연스레 하라고 그리도 말했는데 목석같은 녀석들이라 쉽지 않았나 보오. 우리의 행동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사과하지요."
노인은 포권을 취하며 진심으로 사과의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사실 천룡성에서 연락이 왔다기에 그분을 뵙게 되는 줄 알고 예전 일이 떠올라 조금 장난스럽게 인사를 드리려 했던 것인데…… 이번엔 젊으신 분이 찾아오셨군요."
그 전까지만 해도 불쾌한 기색을 띠고 있던 천무진은 상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란 듯 표정을 바꿨다.
"그분이라면 설마 사부를 말하시는 겁니까?"
천무진의 질문에 그가 답했다.
"일전에 뵌 적이 있었지요. 아주 오래전이긴 한데…… 그때 제가 신세를 졌습니다. 그분께서는 정정하신지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제 사부를 알다니 그쪽은 누구십니까?"
자신의 사부가 쉽사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을 터. 그런 사부를 알 정도라면 이 노인 또한 보통 인물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묘하게 웃고 있는 노인을 대신하여 총군사 위지겸이 답했다.
"……맹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