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가짜 신분 ― 처음 뵙겠습니다 (1)
무림맹주.
무림맹의 수장이자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무림맹주가 지금 이곳에서 천무진과 마주하고 있었다.
상대가 무림맹주라는 말에 백아린과 한천은 슬쩍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천무진은 의외로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무림맹주 추자후(秋刺侯).
젊었을 적에는 불같은 성정으로 유명하였지만 나이를 먹으면서는 온화해진 태도와 좌중을 압도하는 특유의 성격으로 무림맹을 이끄는 사내다.
천무진이 말을 시작했다.
"무림맹주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군요."
"다른 분도 아닌 천룡성에서 오신 분의 연락인데 소홀히 할 수는 없지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소협의 사부께 신세를 진 적도 있고요."
나이 차는 많이 났지만 추자후는 천무진에게 깍듯이 예를 갖췄다. 천룡성이란 많은 무림인들에게 그처럼 존경의 대상이었다.
추자후가 빈 탁자를 내려다보며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모인 분들과 식사 한 끼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군요. 비밀리에 나온 일이다 보니 제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말입니다."
사실 무림맹주란 자리는 생각보다 더욱 개인적 여유가 없었다.
비밀리에 어딘가에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고, 몰래 뒤를 캐는 이들 또한 많다.
하물며 지금은 천룡성의 인물인 천무진을 만나는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자신의 행보가 들통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추자후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물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급히 연락을 한 연유가 무엇입니까?"
"무림맹에서 조사를 해야 할 게 있는데 들어갈 수 있게 좀 해 주시죠."
"무림맹 내에서 조사를 하신단 말입니까?"
"찾아야 할 게 좀 있어서요."
천무진을 바라보던 추자후가 슬쩍 뒷머리를 긁적였다. 차라리 힘이 필요하다고 빌려 달라는 부탁이었다면 한결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무림맹 내부로 들어와 직접 처리할 일이라니…….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부탁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추가적으로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여긴 추자후가 물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맹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가짜 신분이 필요합니다."
"가짜 신분이라…… 필요한 시간은 얼마쯤으로 생각하시는지요?"
"그걸 장담할 수 없습니다. 빠르면 하루 이틀로도 끝날 수 있지만…… 길어지면 얼마나 걸릴지 확답을 드리지 못하겠군요."
"흐음, 이리 비밀리에 저희 쪽과 접선을 하신 걸 보아하니 천룡성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실 생각이신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추자후의 질문에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대화가 여기까지 이어지자 추자후는 상대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
"손님으로 며칠 정도 모실 수는 있으나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다 하셨으니 그건 안 될 것 같고…… 아무래도 무림맹에 무인으로 들어오셔야 될 것 같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뭐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저한테는 유능한 수하 한 명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 친구가 알아서 다 해 줄 겁니다. 안 그런가?"
말을 마친 추자후가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선을 받은 총군사 위지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또 저만 죽어나겠군요. 최대한 빠르게 준비해 보겠지만 이틀은 걸립니다. 그럼 여기 계신 네 분 모두의 가짜 신분을 준비해 드리도록……."
"셋만 준비하게."
막 위지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추자후가 빠르게 답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그 순간 그가 단엽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홍련의 부련주를 무림맹 내로 들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추자후의 말에 위지겸이 놀라 눈을 치켜뜰 때였다.
아까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단엽이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망할 영감 같으니라고."
"대홍련의 풋내기, 그 말투는 여전하구나."
"……칫."
불만스러운 듯 혀를 차면서도 단엽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구면인 두 사람 사이에는 뭔가 사연이 있는 듯싶었다.
단엽과의 대화를 끊은 추자후가 천무진에게 말했다.
"대홍련의 부련주다 보니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 수 있어서 말입니다. 이 부분은 양해 부탁드리지요."
"이해합니다."
천무진의 말에 웃음을 보인 추자후가 슬쩍 창밖을 바라봤다. 어떻게든 무림맹 바깥으로 나오긴 했지만 벌써 시간이 꽤나 지나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었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맹을 오래 비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닌지라 이만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는 대로 다시 뵙지요. 혹 앞으로도 뭔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이 친구에게 부탁하시면 됩니다."
말과 함께 추자후는 옆에 앉아 있는 위지겸의 어깨를 두드렸다.
쌓여 가는 과중한 업무에 지친다는 듯 위지겸은 자신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추자후가 말했다.
"자 그럼 전 이만,"
말과 함께 그는 거침없이 몸을 돌려 걸어 나갔고, 앉아 있던 위지겸 또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도 요청하신 일들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서 바로 맹주님과 함께 맹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박봉인데 무슨 일만 생기면 다 저에게 떠넘기시는 맹주님 덕분에 쉴 틈이 없군요."
먼저 나간 추자후에 대한 험담을 빠르게 쏟아 낸 그가 이내 포권을 취하며 말을 이었다.
"올라오는 김에 제가 미리 식사를 시켜 두었으니 곧 가지고 올 겁니다. 제 몫까지 남김없이 드시고 가시지요. 그리고…… 아까 무례하게 느끼셨다면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장난스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목소리로 위지겸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백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님 말씀을 들어서 이해했어요. 괜찮습니다."
"하하, 그리 말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낫군요. 그럼 가짜 신분을 만들고 그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아까 말씀해 주셨던 그 객잔에 계속 계실 생각이시지요?"
"네, 그쪽으로 연락 주시면 되요."
"그리하도록 하지요."
말을 끝낸 위지겸이 먼저 나간 추자후의 뒤를 쫓으려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빠져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위지겸의 말대로 그가 시켜 둔 음식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보고만 있던 일행들이었지만 이내 그 행렬이 길게 이어지자 모두가 입을 벌린 채 탁자 위에 올라오는 음식들을 바라봤다.
스무 명이 자리해도 모자라지 않을 법한 커다란 탁자 위에 음식들이 가득 찼으니, 그 양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는 이루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백아린이 탁자 위를 꽉 채우고 있는 음식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 이렇게 많아? 어떻게 다 먹으라고."
그런 그녀를 향해 한천이 말했다.
"대장, 뭘 모르시네. 이런 거는 함부로 먹는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이건 일종의 뇌물이라고 봐야죠. 함부로 받아먹었다가 골로 가는 사람 한둘 본 게 아닙니다. 제가 이런 쪽에 좀 빠삭해서 잘 아는데 말이죠. 이런 경우엔……."
뭔가 말을 이어 나가려던 한천은 갑자기 코로 밀려드는 향긋한 냄새에 입을 닫았다.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술이었다.
그것도 열 가지에 달하는 여러 종류의 술이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그 순간 한천이 재빠르게 다가가 뺏길세라 술 한 병을 들고는 잔에 채워 넣었다.
잔에 채운 술을 잽싸게 목구멍으로 넘긴 그가 탄성을 내질렀다.
"크으, 죽인다."
연거푸 술잔에 술을 채우던 한천은 이내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느껴서인지 움찔하고 손을 멈췄다.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아린과 시선을 마주쳤다. 한천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감도는 그사이 백아린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거 함부로 먹으면 골로 간다며?"
방금 전 자신이 내뱉었던 말이 떠오르긴 했지만 한천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공짜 술은 마다하지 않는 법이라 배웠습니다."
순식간에 돌변하는 모습, 하지만 술을 보고 눈이 뒤집힌 건 한천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옆으로 단엽이 다가갔다.
한천의 옆자리에 앉은 그가 술병을 통째로 들이켜고는 좋다는 듯 말했다.
"크으! 뭘 아시네, 아저씨. 뭣들 해. 와서 먹지 않고. 어차피 우리가 안 먹으면 다 쓰레기인데 아깝잖아. 어서들 먹자고."
말을 마친 단엽은 앞에 있는 고기를 한 움큼 집어삼켰다.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자리를 시작하는 걸 가만히 바라보던 백아린이 슬쩍 옆으로 시선을 줬다.
그곳에는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앉아만 있는 천무진이 있었다.
뭔가 골똘히 고민하는 모습.
그는 언제나 그랬다.
마치 뭐에 쫓기는 것처럼 조금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으려 하고, 또 빈틈도 보이려 하지 않는다. 방금만 해도 그렇다.
이곳에 들어온 직후부터 옆방에서 오고 가는 모든 대화들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던가.
물론 그 덕분에 옆방에 있던 무림맹주를 곧바로 알아차리긴 했지만, 그만큼 모든 일에 예민하게 감각을 세우고 있다는 건 스스로에게도 큰 피로감을 느끼게 만들 수밖에 없다.
하물며 백아린은 계속해서 달리는 마차에서조차 천무진이 눈 한 번 제대로 붙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옆방의 모든 대화를 듣고 있다가 그것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대단함을 느끼다가도, 왠지 모를 안쓰러움이 느껴졌다면 자신이 이상한 걸까?
언제나 날카로운 칼처럼 날이 서 있는 사내.
과연 이 사내가 이토록 찾아다니는 그건 무엇일까?
하지만 백아린은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다.
의뢰인이었으니까.
자신은 그저 시키는 것만 도우면 되는 그뿐인 관계다.
‘쓸데없는 데 관심 끄고 식사나 하자.’
떠들어 대는 둘과는 달리 조용히 음식을 집어 입가에 가져다 대려던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고는 이내 앞에 놓여 있는 빈 접시에다가 커다랗게 한 젓가락을 뜨더니 이내 그것을 천무진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던 천무진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정신을 추슬렀다.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접시를 확인한 천무진이 백아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치 이걸 왜 주냐는 듯한 천무진의 시선에 그녀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먹어요."
* * *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천무진은 홀로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도착한 장소.
그곳은 다름 아닌 무림맹이었다.
천무진은 입구의 앞에 선 채로 무림맹(武林盟)이라는 이름이 적힌 현판을 올려다봤다.
원래의 예정대로라면 내일 세 사람이 함께 무림맹에 가짜 신분으로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한 번에 세 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가짜 신분으로 들어오는 것보다는 시간 차를 두는 게 조금이나마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가짜 신분을 만들어 줄 총군사 위지겸의 제안에 천무진 또한 동의했다.
그럴 확률이 극히 적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주 만약에라도 하루 안에 단서를 찾아낸다면 굳이 다른 이들의 신분까지는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한 연유로 천무진은 혼자 가짜 신분을 가진 채로 이곳 무림맹을 찾아온 것이다.
한 명분만 만들면 되는지라 이틀이 걸릴 거라는 시간도 하루로 단축된 상황. 천무진은 어떻게든 빠르게 일을 시작하고 싶었기에 오늘 무림맹에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입구 근처에 서 있는 천무진을 발견한 수문위사 중 하나가 다가왔다.
그가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 여기."
천무진은 위지겸의 수하가 전달해 준 패를 꺼내어 내밀었다. 나무로 된 패 자체는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위에 달린 붉은 실과 무림맹을 상징하는 장신구가 달려 있었다.
그걸 확인한 수문위사가 슬쩍 천무진의 얼굴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오늘부로 무림맹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평소보다 더 예의를 갖추며 천무진이 말했다. 가능하면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용히 굴려 마음먹은 탓이다.
말과 함께 천무진이 내민 건 서찰이었다.
서찰은 임명장이었고, 그 끝에는 인장까지 찍혀져 있었다. 서찰의 내용까지 확인한 수문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소. 들어가 보시오."
승낙이 떨어지고 막 안으로 들어서려던 천무진이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홍천관(紅川館)이 어딥니까?"
"……홍천관 소속의 무인이시오?"
"네, 그리로 발령이 났다 들었습니다."
자신을 향하는 수문위사의 표정이 뭔가 묘하다는 건 느꼈지만 천무진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입장에서는 단서를 찾기 위해 얼마간 몸담을 장소일 뿐이었으니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천무진의 입장에서는 별반 상관없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천무진을 바라보던 그가 이내 열린 문 내부를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리로 쭉 가시다 보면 커다란 전각이 두 개 이어진 곳이 나오는데 그쪽으로부터 건물을 끼고 걷다 보면 나오는 게 홍천관이오."
"고맙습니다."
말을 마친 천무진은 수문위사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움직였다.
홍천관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문위사가 말해 준 것보다는 조금 더 길이 복잡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위치는 가늠할 수 있었기에 세 차례 정도 지나가는 이에게 물어 어렵지 않게 홍천관을 찾을 수 있었다.
홍천관이라는 이름이 적힌 현판까지 확인하고서야 천무진은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시간 때문인지 내부는 한산했다.
마음 같아서야 곧장 증거를 찾기 위해 움직이고 싶었지만…….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잘 지켜야 뒤탈이 없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진행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 홍천관 무인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고,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이었다.
몇 보이진 않았지만 연무장에서 몸을 풀고 있던 이들이 천무진을 발견했다.
무림맹 내부에 있는 단체인데, 생각보다 구성원들의 나이가 젊어 보였다.
귀찮긴 했지만 천무진이 먼저 그쪽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부로 홍천관에 몸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뭐야, 신입이야?"
"이거 신고식 좀 해 줘야겠는데."
두 사내가 천무진에게 다가오며 히죽거렸다.
신고식이라니?
‘……뭔 개소리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천무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다가오던 사내 중 하나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이 새끼 재밌네. 너 지금 신입 주제에 표정 구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