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왕-19화 (19/293)

19화. 단서 ― 이게 뭔지 알아? (1)

홍천관에서 천무진이 맡은 보직은 창고 관리였다. 허나 말이 관리지 하는 일은 허드렛일에 가까웠다.

직접 물건을 나르는 것부터 해서 매일 들어오고, 나가는 수량을 확인하여 꼼꼼히 기재하는 정도의 일이었다.

무림맹 창고 전체가 아닌 홍천관이 관리하는 것들 중에서도 자그마한 하나를 맡은 정도의 상황.

손은 제법 갔지만 그만큼 일만 끝내면 자유로운 시간이 꽤 있는 편이었다.

양휴가 입관했었다는 홍천관 내부를 돌며 이런저런 것들을 살펴보고는 있지만 무엇 하나 단서를 찾지 못하는 지금, 천무진은 단엽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자가 담긴 자루들 사이에 걸터앉아 있던 천무진은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햇빛 한 점 들지 않게 창문 하나 없는 창고 내부에는 감자를 비롯한 몇 가지 채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간은 꽤나 늦어 밤이 되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천무진은 여전히 창고에서 기척을 감추고 있었다.

사실 천무진은 현재 업무를 마치고 나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매번 그는 업무 종료를 알리고 나가는 척을 한 후에, 다시금 담장을 넘어 이곳에 숨어들고 있었다.

단엽의 연락을 기다리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천무진 또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하염없이 이곳에서 혹시 모를 수상한 움직임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지금 천무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시간이 참으로 덧없이 흘러갔다.

거의 눕다시피 자리하고 있던 천무진이 슬그머니 자루 안에 들어가 있는 감자 하나를 움켜쥐었다.

손바닥 안에 딱 들어맞는 크기의 감자.

휙휙.

공중으로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는 천무진의 표정은 복잡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세상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얻은 것은 크게 없었다.

그나마 적화신루와 손을 잡았고, 단엽을 수하로 거뒀다.

허나 이것만으로 그들과의 싸움을 대비했다 말할 수는 없다.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두려움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잘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어떻게 다시 한 번의 삶을 더 선물 받게 됐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기적이 다시금 반복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주어진 기회,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옥과도 같았던 그 삶을 생각하니 절로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통과 슬픔만이 가득했던 그 삶이 점점 다가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때였다.

툭.

허공으로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던 감자가 손가락 끝에 걸리며 땅에 떨어졌다.

천무진은 놀란 듯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덜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천무진은 이를 꽉 깨물며 떨리는 손을 움켜잡았다.

‘제발…….’

지금 생의 일은 아니었지만 그 모든 고통받은 기억들이 남아 있었다.

문제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그 어둠이 밀려들자 저절로 몸이 반응한 것이다.

괜찮은 게 아니었다.

그저…… 그 공포를 참고 있었던 것일 뿐.

손을 가슴팍에 가져다 댄 채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천무진은 이내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닫혀 있는 창고의 문이 움직이는 소리, 천무진은 우선 주변에 있는 물건들 사이로 숨어 몸을 감췄다.

끼익.

열렸다가 닫히는 창고의 문.

천무진은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가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창고 안에 나타난 것이 백아린이었기 때문이다.

천무진은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고, 그를 발견한 백아린이 성큼 다가오다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는 평소 같은 여유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다가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팔을 움켜쥐고 있는 천무진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전음을 날렸다.

『왜 그래요. 손은 왜 그렇게 잡고 있어요?』

백아린의 말을 듣고서야 천무진은 자신이 아직까지도 손이 떨리지 않도록 팔목을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화들짝 손을 놓은 천무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좀 뻐근해서. 그런데 무슨 일이야?』

천무진은 슬쩍 자신이 놓은 손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떨리던 손은 어느 정도 진정된 듯싶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둘러댄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백아린은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다. 평소와 달랐던 그의 모습에서 감추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으니까.

비밀리에 숨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둘은 전음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잠깐 어딜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요.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 거 같은데 혹시 찾으실까 봐 말씀드려 놓고 가려고요.』

『한천도 같이?』

『아뇨, 저 혼자 다녀올 생각이에요.』

『그러면 굳이 찾아올 거 없이 한천한테 말해 둬도 되잖아.』

『얼굴을 봐야 말해 두죠. 술 마신다고 코빼기도 안 비치는걸요.』

『또?』

무림맹에 들어온 지 어언 칠 일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헌데 그 이후부터 한천은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천무진의 질문에 백아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주 물 만난 고기에요. 인맥을 넓히는 중이라고 떠들어 대니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고 말이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내 들고 있던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다.

얼결에 받아 든 보따리와 백아린을 번갈아 바라보던 천무진이 물었다.

『이건 뭐야?』

『며칠째 저녁에 식사도 안 하고 있잖아요. 별건 아니고 오는 길에 그냥 간단한 것 좀 챙겨 왔어요. 냄새 안 나는 거니까 걱정 말고 먹어요.』

『……쓸데없는 짓 하긴.』

『먹든 말든 그건 알아서 하시고 전 전할 말 전했으니 우선 가 볼게요. 그럼 내일 봬요.』

말을 끝낸 백아린은 더는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고 닫았던 문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려는 그 찰나.

천무진이 다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백아린이 고개를 돌려 천무진을 올려다보자 그가 검지를 입가에 세웠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 하지만 이미 백아린 또한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녀 또한 제법 거리가 멀긴 하지만 누군가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천무진은 문에 몸을 가져다 댄 채로 조심스럽게 힘을 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문은 소리도 나지 않은 채 조금씩 열려 바깥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늦은 밤 누군가의 움직임.

종종 늦게까지 일을 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이미 홍천관에 있던 모두가 퇴관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다시 누군가가 나타난 것이고.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다시금 이 늦은 밤에 나타날 일은 거의 없다 봐도 무방했다.

더군다나 그 상대는…….

‘부관주?’

첫날 자신이 맞고 있는 걸 웃으며 보고 있던 부관주 여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태연하게 밤거리를 걷다가 이내 어딘가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전각 안에 있는 수십 여 개의 창고 중 하나.

그 창고의 앞에 선 여청이 주변을 슬쩍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모습을 나타낸 자가 부관주라는 사실에 천무진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수상한데.’

며칠 동안 보아 온 바로 여청은 이 창고 쪽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홍천관 내에서도 잡무로 분류되는 창고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탓이다.

나중에 보고서나 받는 정도로 창고 쪽에 대한 일을 끝맺는 그가 직접 창고에 나타났다? 그것도 이 늦은 밤에?

여청이 들어간 창고를 바라보고 있는 천무진에게 백아린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저 사람 누군지 혹시 알아요?』

『우리 부관주야. 여청이라고 하더군.』

『그래요? 수상한 사람은 아니군요.』

『아니지. 그런데…… 그래서 수상해. 창고 쪽 일에는 전혀 관심 없거든.』

『그랬던 자가 이 밤에 창고에 왔다 이 말이군요. 뭔가 좀 이상하긴…… 어? 벌써 나오는데요?』

전음을 몇 번 주고받기도 전에 창고 안으로 들어섰던 여청이 걸어 나왔다. 그는 다시금 주변을 살펴보고는 이내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기척을 완벽히 감추고 있었던 탓에 여청은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백아린이 곧바로 전음을 보냈다.

『저 창고에 뭐 특별한 거라도 있어요?』

『아니. 대충 다 둘러봐서 아는데 저쪽 창고라면 있는 것들은 다 뻔한데…….』

대부분이 식재료이거나, 기껏해야 병장기 일부를 모아 놓은 창고. 그것도 아니면 생활에 필요한 평범한 용품이 대부분이다.

천무진은 여청이 아예 사라진 걸 확인하고서야 문을 열고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천무진이 움직이자 백아린 또한 재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신형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쉬쉬쉭.

순식간에 창고의 입구에 도착했고, 천무진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뒤이어 들어선 백아린은 문을 닫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천무진의 말대로 창고는 방금 전에 자신들이 있던 곳보다 크기만 조금 더 클 뿐 그리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한쪽에는 간단한 식재료들이 가득했고, 다른 쪽에는 커다란 항아리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구석에는 다소 가격이 나가 보이는 식기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아린이 먼저 그것 중 하나의 뚜껑을 열었다.

진한 향이 갑자기 훅 하고 밀려들어 왔다.

음식에 쓰는 조미료였다.

몇 개의 항아리들을 열어 보니 그 안에는 마찬가지로 여러 종류의 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음식을 하는 데 필요한 장들을 보관하는 곳인 듯싶었다.

놓여 있는 오십 여 개의 항아리들.

빠르게 모든 내용물을 확인했지만 그리 이상한 건 없어 보였다.

뒤늦게 식재료 쪽을 뒤지던 천무진이 다가왔다.

『찾은 건 없어?』

『네, 특별한 건 안 보이는데요.』

천무진으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여기에 무엇이 있기에 부관주가 이 늦은 밤에 몰래 들어왔다가 나간단 말인가. 허나 직접 확인해 본 결과 내부에는 전혀 의심스러운 뭔가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의심해 볼 만한 것이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값비싸 보이는 식기류들 정도인데…….

‘단순히 재물 때문에 들어왔다는 건가?’

아쉽지만 지금으로선 그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

잠시 더 주변을 둘러보아도 전혀 의심스러운 걸 찾을 수가 없었기에 결국 천무진은 생각을 접었다.

지금으로선 괜한 의심을 했던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천무진이 전음을 보냈다.

『우선 나가지. 아무래도 헛다리를 짚은 것 같아.』

그의 말에 백아린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는 항아리 안의 내용물을 살피기 위해 열어 두었던 뚜껑을 다시금 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무진 또한 바닥에 놓여 있는 뚜껑으로 열린 항아리를 닫고 있을 때였다. 막 뚜껑 하나를 주우며 몸을 일으켜 세우던 그가 갑자기 멈칫했다.

천무진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바로 앞에 있는 항아리를 천무진은 말없이 응시했다.

정말 별건 아니었다.

향신료로 쓰이는 붉은색의 꽃잎들이 잔뜩 들어가 있는 항아리.

문제는 그 항아리가 아니었다.

항아리의 아래에 높이를 맞추기 위해 깔려 있는 돌, 바로 그게 시선을 끈 것이다.

평평한 돌. 그렇지만 돌의 모서리 부분이 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퍼져 있는 자잘한 돌가루들.

가루의 양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넓게 퍼져 가루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소량인 가루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건 이 돌이 막 깨어졌다면 걸 의미했다.

그리고 이 창고를 관리하는 자가 퇴관한 지는 몇 시진이 넘게 흐른 상황.

이런 상황에서 돌이 깨져 있다면…….

천무진은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는 쥐고 있던 뚜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떨어진 돌가루를 어루만졌다.

손가락에 묻은 돌가루를 천무진은 조심스레 코로 가져다 댔다.

코를 통해 들어오는 미약한 향.

순간 천무진의 손가락이 꿈틀했다.

이 냄새…… 왠지 모르게 어딘가 익숙하다.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냄새를 맡고 있는 천무진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백아린이 다가왔다.

『왜 그래요?』

천무진이 항아리 바닥에 놓여 있는 돌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뭔지 알아?』

『……겉보기엔 그냥 돌 같은데요.』

허리를 굽힌 채로 살펴봤지만 특별할 건 없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돌덩이.

백아린 또한 천무진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있는 돌가루를 손가락 끝에 묻혀 냄새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신기하게 향기에 가까운 냄새가 좀 나는데요? 이게 무슨 돌이죠?』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부관주가 여기 들어왔던 게 이 돌 때문인 건 확실해.』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죠?』

『돌이 막 부서진 흔적이 보이니까.』

천무진의 말을 듣고 백아린은 곧바로 그가 왜 그리 생각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 또한 부서진 돌의 단면이나, 또 주변에 퍼져 있는 가루를 보며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막 부서진 게 맞네요.』

천무진은 손으로 돌의 한쪽을 움켜쥐었다.

내력을 불어넣자 돌은 쉽사리 깨어져 나갔다.

팍.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일부를 떼어 낸 천무진은 그 돌을 백아린을 향해 내밀며 물었다.

『이 돌의 정체가 뭔지 알아봐 줄 수 있겠어?』

『……어려운 의뢰네요.』

다른 것도 아닌 돌이다.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니고, 세상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돌. 그런 돌 중에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낸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의뢰였다.

하지만 천무진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있는 백아린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의뢰가 될 거라고.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게요. 우선은 상부의 승낙부터 받아내야겠네요. 사람은 찾아 달라는 의뢰는 많았어도 돌을 찾아 달라는 의뢰는 처음이라…….』

말을 하고도 우스웠는지 백아린은 피식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