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단서 ― 이게 뭔지 알아? (2)
섬서성.
지금 천무진 일행이 있는 사천과 맞닿아 있는 곳이자 구파일방인 화산파와 종남파가 자리하고 있는 정파의 세력권이다.
그런 섬서성의 남쪽 지역 감중(橄重)에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눈매를 한 사내는 마을에 들어서기 무섭게 성큼 성큼 어딘가를 향해 나아갔다.
죽립을 쓴 채로 얼굴은 가리고 있었지만 비범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단엽이었다.
천무진의 명령으로 양휴를 잡으러 온 그가 이곳 감중에 도착한 것이다.
사천에서 섬서로 넘어온 것이긴 하지만 그나마 밀접한 곳에 있었기에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감중에 들어서기 무섭게 단엽이 간 곳은 자그마한 상단이었다.
일을 하는 이들까지 해서 대략 스무 명 안팎으로 구성된 상단. 이 상단은 다름 아닌 적화신루의 지부 중 하나였다.
백아린을 통해 상단을 소개받았고, 양휴를 잡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초면인 그가 상단에 들어서자 입구 부근에서 일하던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젊은 사내가 물었다.
"누구십니까?"
"여기 단주를 만나러 왔는데."
"약속은 하셨습니까?"
"여기."
백아린이 준 소개서를 들이밀자 사내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곧 사라졌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감췄던 사내가 돌아왔다.
그가 말했다.
"오시죠. 단주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말을 끝내고 걸어가는 사내의 뒤를 단엽이 따라 걸었다. 그렇게 사내의 안내를 통해 도착한 전각에는 한 명의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는 바로 이곳 상단의 단주인 문인준(聞人俊)이라는 인물이었다.
단엽을 여기까지 안내해 준 사내는 곧바로 자리를 비웠고, 문인준이 손짓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단엽은 성큼 전각 안으로 들어가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의 맞은편에 자리한 문인준이 입을 열었다.
"서찰을 보았습니다. 양휴의 정보가 필요하시다고요?"
"어, 이곳에 오면 도움을 좀 받을 수 있다던데."
"물론입니다. 우선 여독부터 좀 푸실 수 있게 방부터 마련을……."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당장 움직일 생각이라서."
"지금 말씀이십니까?"
사천성 성도에서부터 이곳까지 꽤나 힘든 여정이었을 터인데 곧바로 움직이겠다는 단엽의 말에 문인준은 놀란 눈치였다.
그의 질문에 단엽은 당연하지 않냐는 듯 되물었다.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알아?"
"당연히 양휴를 잡으러……."
"아냐. 난 그놈 옆에 있다는 정체불명의 놈을 박살 내러 온 거거든. 싸우러 왔는데 한가하게 쉬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사실 단엽은 양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의 옆에 숨어 있다는 정체불명의 상대.
그자와 싸워 보고 싶을 뿐이다.
단엽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씩 웃으며 물었다.
"몸이 근질근질해서 그러는데 그놈 지금 어디 있냐?"
* * *
잠시 후 단엽과 문인준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객잔이었다.
객잔은 손님들이 바글바글했고, 둘은 그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단엽은 앞에 놓인 술잔을 홀짝이며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을 반복했다.
그의 시선이 슬쩍 스쳐 지나가는 곳.
두 사람이 앉은 곳과 먼 곳에 위치한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서른 중반 정도의 나이, 수염이 조금 지저분하게 자라 있었고 전체적인 인상은 다소 사납게 생겼다.
찢어진 눈에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는 그가 제법 성격이 있어 보이는 걸 말해 주는 듯싶었다.
술을 좋아하는지 연신 옆에 있는 이들과 술을 들이켜 대는 사내.
저자가 바로 양휴였다.
이 객잔에 양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문인준은 곧바로 단엽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고, 그의 정보대로 이곳에는 아까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던 양휴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싸움을 벌이고 싶어 하던 단엽이었지만…… 그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애초에 싸우고자 했던 상대는 양휴가 아니기도 했고, 자신이 섣부르게 나섰다가 적화신루 조사단을 전멸시켰던 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모두 공염불이 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문인준은 필요하면 적화신루의 무인들을 더 지원해 주겠다고 했지만 단엽은 이를 거절했다.
숫자가 많아지고 뭔가 위험한 기색이 보이면 오히려 적이 숨을 수 있다 판단해서다.
그랬기에 오히려 이곳에 동행한 문인준에게도 잠시만 함께 자리를 지켜 주다 가라는 지시까지 내린 상황.
걱정이 되는지 슬쩍슬쩍 눈치를 살피던 문인준이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말했잖아. 충분하다니까."
어차피 상대가 하나인 이상 단엽은 자신이 있었다.
술잔의 술을 털어 마신 그가 말을 이었다.
"됐으니까 이제 가 봐. 일 끝내고 다시 찾아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혹시나 마음이 바뀌시면 연락 주시지요."
말을 마친 문인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엽의 정체를 모르는 그로서는 적화신루 조사단 하나를 궤멸시킨 위험인물과 단신으로 싸우려는 것이 무모하다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야기가 길어지면 주변에 있는 다른 이의 귀에도 말이 들어갈 수 있는 상황.
이미 생각이 저리 확고한 상태니 더는 설득할 이유가 없었다. 문인준은 곧바로 의심받지 않게 객잔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혼자 남은 단엽이 손을 들어 올렸다.
"어이, 여기 죽엽청 한 병만 더 줘."
간단하게 술을 한 병 더 주문한 단엽은 양휴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술잔을 채워 갔다.
쪼르르.
시선은 전혀 주지 않고 있지만 이미 이 객잔 내부에 있는 모두가 그의 감각 안에 잡혀 있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라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기에 굳이 눈으로 확인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술자리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양휴는 점점 더 얼큰하게 취해 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마실 생각이야?’
적당한 정도의 취기만을 유지하며 남은 술기운들은 내공으로 날리고 있던 단엽이 바깥을 살폈다.
해가 지고도 한참은 지나 새벽으로 들어서는 시간.
꽉 차 있었던 객잔도 점점 한산해지기 시작했고, 일을 하던 점소이도 졸린지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아 대고 있었다.
양휴와 함께 술을 마시던 일행 세 명도 서서히 지쳐 가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상황.
단엽은 술자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판단을 내렸고, 예상대로 그로부터 약 이 각 가까운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양휴는 무인이었지만 그와 함께한 이들은 딱히 무공을 배운 이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그냥 돈깨나 있어 보이는 자들.
그들 중 하나가 버럭 소리쳤다.
"이놈아! 슬슬 가자."
사내가 소리치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몇몇 이들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개중엔 젊은이도 있었고, 나이 든 자도 있었다.
그들은 황급히 양휴와 술자리를 함께한 이들의 짐들을 챙겼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양휴에게도 누군가가 다가갔다.
일행들 중에 가장 어린 소년이었다.
십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
평범한 외모였지만 아직 소년티가 물씬 나는 그런 아이였다. 그리고 키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나이에 비해 조금 작은 편이었다.
"도련님, 제가 들겠습니다."
자그마한 소년이 쪼르르 달려와 양휴의 짐을 대신 챙겼다. 무거운 검을 낑낑거리며 드는 소년을 보며 양휴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새끼가 그리 힘이 없어서 어따 쓰려고. 쯧, 몸종을 바꾸든 해야지 원. 됐다, 이리 내놓거라!"
말을 하며 양휴는 소년이 들고 있던 검을 낚아채 갔다.
그의 빠른 손놀림에 깜짝 놀란 얼굴을 하던 소년이 나머지 짐만을 어깨에 짊어진 채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양휴가 술자리를 함께한 이들과 함께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 어서들 감세. 내 오늘은 잔뜩 얻어먹었으니 내일은 내가 쏘지."
"그 말 잊지 말게나. 술김에 한 말이라 까먹었다고 하면 무척이나 곤란하네."
"에잉, 내가 누군가! 양휴일세. 대장부 양휴!"
가슴팍을 팍팍 치며 자신 있게 말하는 양휴를 보며 남은 세 명 또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몸종을 대동한 네 사람이 모두 객잔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앉아 있던 단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은 여기 두지."
탁자에 술값을 내려놓은 단엽은 나간 그들의 뒤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약간의 시간 차를 두긴 했지만 멀리에서나마 육안으로 동태 확인이 가능할 정도의 거리.
사실 훨씬 더 거리를 벌려도 뒤를 쫓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단엽은 적당한 수준의 간격을 계속해서 유지했다.
자신이 양휴를 놓칠까 봐가 아니다.
그토록 찾고 있는 그 정체불명의 자가…… 자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만만해 보여야 그자도 나타날 것이 아닌가.
제대로 실력을 드러낸다면 양휴를 죽이고 도망칠 수도 있었기에 단엽은 오히려 스스로를 만만하게 보도록 만들고 있었다.
마치 이것보다 멀어지면 놓칠 거라는 듯 적당한 수준의 거리를 유지하며 은밀히 뒤쫓는 걸음걸이.
이 모든 것이 모두 완벽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움직임이었다.
멀리서 쫓으며 단엽은 그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술에 많이들 취했는지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그들은 이내 하나둘씩 몸종과 함께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세 번째 사내가 몸종과 함께 떠나갔고, 마침내 양휴만 남게 된 상황.
옆을 따르는 몸종 소년만이 곁에서 낑낑거리며 술 취한 그를 부축한 채로 가고 있었다. 속도가 더 더뎌지자 마찬가지로 단엽 또한 걸음을 늦췄다.
그리고 마을의 외곽 지역을 걷던 소년은 더는 못 버티겠는지 잠시 나무에 양휴를 기대 세운 채로 땀을 닦아 댔다.
소년은 술에 취해 혼절해 있는 양휴를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어휴, 어쩌지."
여기까지는 어떻게 부축한 채로 데리고 왔지만 검 하나 제대로 들지 못했던 소년이다.
아예 혼절을 해서 이제는 걸음조차 못 옮기는 그를 부축한 채로 목적지까지 가는 건 무리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이 있는 곳을 향해 단엽이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점점 양휴와 단엽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이제 거리는 고작 십여 장 정도.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그리고 마침 어떻게 해야 하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소년의 시선이 단엽에게 와서 멈췄다.
늦은 밤이고 마을의 외곽 부분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단엽을 제외하곤 없었다.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년이 그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달려왔다.
땀으로 범벅인 얼굴로 단엽에게 달려온 소년이 입을 열었다.
"저 아저씨."
"뭐야, 꼬맹이."
"죄송한데 조금만 도움을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주인 나리께서 술에 취하셔서요. 집까지만 모시고 가면 되는데 도저히 제 힘으론 무리라서요."
"내가? 나 그렇게 무보수로 누구 돕고 그러는 사람 아닌데."
"에이! 집으로만 모셔다 주시면 당연히 사례하죠."
소년은 부탁한다는 듯 간절한 눈빛으로 단엽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단엽은 나무에 기댄 채 혼절해 있는 양휴를 슬쩍 바라봤다.
알면서도 단엽이 괜히 물었다.
"저 사람이 네 주인이냐?"
"예예. 그렇게 무겁지는 않으셔서 둘이 같이 양쪽에서 부축하면 어렵지 않게 모실 수 있을 거예요. 집도 여기서 반 각 정도 밖에 안 걸리고요."
"뭐 정말 돈만 준다면야……."
"정말요? 우와, 감사합니다. 어르신!"
좋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는 소년을 보며 단엽 또한 픽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양휴를 향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를 향해 다가가는 단엽의 뒤쪽으로 막 소년이 따라붙는 그때였다.
갑자기 단엽이 걸음을 멈추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꼬마야."
"네?"
돌연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부르는 단엽을 향해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뜰 때였다.
그런 소년을 향해 웃음을 보이고 있던 단엽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었다.
"큭, 크크큭큭!"
"아, 아저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어 대는 단엽의 모습에 소년은 겁먹은 표정으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막 웃어 대던 단엽이 손으로 입 부분을 어루만지며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미안. 좀 더 참으려 했는데 너무 웃겨서."
"갑자기 뭐가……."
"너무 웃기잖아. 나이도 많으면서 어린 척하는 꼬락서니가. 역겨워 죽겠다, 야."
단엽의 그 한 마디에 소년의 순진무구해 보이던 얼굴 표정이 싸늘하게 돌변했다.
그리고 그곳엔 방금 전까지 눈을 빛내며 웃고 있던 소년은 없었다.
소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어떻게 알았지?"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맑았던 소년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탁하고 소름 돋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소년을 바라보며 단엽이 여유 있는 얼굴로 답했다.
"구린내가 나거든. 너희 같은 놈들한테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