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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1화 (21/293)

21화. 낙구 ― 임무거든 (1)

"……뭐? 구린내?"

조롱 섞인 단엽의 말투에 소년의 얼굴을 한 사내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사실 사내는 지금 무척이나 기분이 좋지 못했다.

누군가가 쫓는다는 사실은 진작 알아차렸다.

하지만 오히려 모르는 척하며 상대인 단엽에게 다가가는 것까지 성공했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흉내를 내며 거리를 좁혔고, 그대로 양휴를 부축하는 순간 뒤편에서 검으로 심장을 꿰뚫어 버리려 했다.

그거면 충분할 상황이라 여겼고, 상대를 겉모습에 속는 머저리라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속은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정체가 들통난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었거늘 그걸로 모자라 자신을 도발하는 상대의 언사는 그의 자존심마저 건드렸다.

소년의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단엽의 말대로 사내는 겉보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이 사내의 정체는 일격살(一擊殺) 낙구(洛龜), 한때는 살수로 활동했던 자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사람을 죽인다 하여 붙여진 일격살이라는 별호, 그건 바로 이같이 소년의 모습을 한 덕분에 가능했다.

어릴 적에 희귀한 병을 앓으면서 성장이 멈춰 버렸고, 그 때문에 이처럼 자구마한 체구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낙구는 오히려 그걸 이용했다.

아무리 살얼음판 위를 살아가는 무인이라고 해도 대부분이 어린아이 앞에서는 방심을 하기 마련이다.

뛰어난 무공 실력을 지닌 그에게 간격을 준 이들의 결과는 하나같이 똑같았다.

죽음.

그렇게 어린아이인 척 상대를 방심하게 해서 죽인 이들의 숫자만 수백 명에 육박하는 살인귀가 바로 낙구였다.

어차피 정체가 들통난 이상 더는 살기를 감출 이유가 없었다.

낙구가 가볍게 손을 움직이자, 널브러져 있던 양휴의 옆에 있던 검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타악.

언제 연결했는지 검에는 얇은 실이 묶여 있었고, 덕분에 가벼운 손짓 하나로 순식간에 낙구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온 것이다.

마주한 채로 서 있는 단엽을 노려보던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스르릉.

검이 뽑혀 나오며 서슬 퍼런 빛을 쏟아 냈다.

낙구가 말했다.

"제법이군. 내 정체를 먼저 알아낸 녀석은 한 명도 없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검집을 옆으로 휙 집어던진 낙구가 말을 이었다.

"……네놈이 나한테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터인데."

"까불고 있네. 네깟 놈이 날?"

타앙!

순식간에 권갑을 손에 채운 단엽이 픽 비웃음을 흘렸다.

사실 소년의 모습을 한 낙구가 적화신루의 조사단을 몰살시킨 자라는 건 이미 객잔에서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낙구의 정체를 금방 알아낼 수 있었던 건 천무진과 백아린이 나눈 대화를 옆에서 주워들었던 덕분이다.

바로 아래에서 위로 찌르고 들어왔다는 검상에 대한 이야기.

전부 심장을 관통했고, 나머지 큰 흔적은 없는 걸 보면 단 일격에 상대를 제압했다는 소리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고 해도 죽기 전 조금의 반항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것조차 불가능했다는 건 방심을 했다는 소리였다.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는 자일 것이라는 추측.

거기에 아래에서 위로 찔러 들어온 검상을 통해 상대가 독특한 검법을 쓰거나 그것이 아니면 무척이나 작은 체구를 지닌 자일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년의 모습을 한 그가 나타났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단엽은 꿈틀했다.

그 모든 조건에 맞는 상대였으니까.

거기다 옷으로 몸을 감추고 있긴 했지만 슬쩍 드러나는 신체는 제법 단련이 되어 보였다. 그러면서 검 하나 못 들고 쩔쩔매는 모습이 결정적으로 확신을 하게 만들었다.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먼저 그 분위기를 깨부수며 공격을 시작한 건 낙구였다. 그가 검을 들지 않은 손을 갑자기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손에는 아까 전 검을 회수할 때 사용했던 얇은 실이 남아 있었다. 자연스레 멀찍이 던져 놨던 검집이 갑자기 단엽을 향해 날아들었다.

파악.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검집을 단엽이 힐끔 바라봤다. 단엽은 날아드는 쪽의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보호했다.

파앙!

검집과 권갑이 부닥치는 그 순간 득달같이 낙구가 달려들고 있었다.

부웅, 붕.

검이 재빠르게 전신을 벨 듯이 휘둘러졌다.

단엽이 발을 한 보 앞으로 내딛으며 손을 움직였다.

"어딜."

날아드는 검을 권갑으로 쳐 내는 것과 동시에 반대편 손이 막 튕겨 나간 검집을 움켜잡았다.

빠각.

검집이 단번에 산산조각이 나며 터져 나갔다.

그의 주먹이 빠르게 앞에 있는 낙구를 향해 날아들었다.

생각보다 너무나 유연한 대처에 막힌 검을 회수하며 재차 공격을 퍼부으려던 낙구가 당황해서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생각하는 순간 단엽이 땅을 강하게 밟으며 팔꿈치로 옆을 치고 들어갔다.

주먹이 비껴가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방향을 트는 공격은 날카로웠다.

"큭!"

보통 사람이었다면 옆구리에 닿았겠지만, 워낙 체구가 작았던 탓에 얼굴로 날아드는 공격이 되어 버렸다.

가까스로 손을 들어 올려 막아 내긴 했지만 그 충격으로 머리가 흔들렸다.

비틀하는 그 순간 낙구의 시야 속에 무엇인가가 스치듯 지나갔다.

단엽의 주먹이었다.

뻐엉!

피해 보려 했지만 이미 주먹이 복부에 틀어박혔다. 낙구의 몸이 그대로 허공으로 치솟으며 뒤편으로 쭉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쿠웅.

제법 두꺼운 나무였지만 낙구와 충돌한 나무는 그대로 기둥이 부러져 쓰러져 버렸다.

간신히 두 발로 버티고 서 있는 낙구였지만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상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 밀려들었다.

고통을 참기 위해 꽉 다문 이 사이로 피가 질질 흘러내렸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말도 안 될 정도의 힘.

낙구는 이가 갈렸다.

뿌드득.

"감히……!"

분노한 듯 눈을 부라리는 낙구를 향해 단엽이 들어오라는 듯 손을 까닥이며 말했다.

"어이, 너랑 싸우려고 얼마나 멀리서 왔는데. 벌써 끝나면 이쪽이 섭섭하지. 어서 덤벼."

"이곳에 나타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애송이."

"됐으니까 덤비라고."

비웃음이 명백한 미소를 보며 낙구가 울컥하고는 달려들었다.

일격을 당하며 상당히 떨어졌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매섭게 회전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검이 아닌 발이었다.

회전하는 검으로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정작 지금 공격의 핵심은 변화무쌍한 보법이었다.

위로 치고 들어오려던 검이 갑자기 발걸음에 따라 방향을 비틀었다.

카앙!

권갑으로 가볍게 받아 내는 순간 검이 위로 솟구쳤다. 목젖을 노리고 치솟는 검, 그리고 단엽의 반대편 주먹이 빠르게 아래로 향했다.

검을 밀어내는 것과 동시에 단엽과 낙구의 몸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바로 그 찰나.

낙구의 소매 속에서 비수 한 자루가 흘러내리며 그의 손아귀에 착 감겼다.

상체를 이용해 그런 미묘한 움직임을 숨긴 낙구는 곧바로 비수를 지척까지 다가온 단엽의 배를 향해 찔러 넣었다.

비수의 끝이 아슬아슬하게 단엽의 배에 닿은 그 순간이었다.

꽈악.

단엽의 남은 손이 배에 틀어박히려는 비수의 날을 움켜잡았다. 새끼손톱 반 정도의 깊이로 틀어박힌 탓에 조금 피가 배어 나오긴 했지만…….

그 상태에서 아무리 힘을 줘도 더는 깊게 파고들지 못하는 비수에 인상을 쓰던 낙구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단엽이 움켜쥔 비수를 뭉개 버리고 있었다.

으드드득.

쇠로 된 비수가 뭉개졌고, 서둘러 그는 단엽의 거리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렇지만 이미 늦었다.

비수를 쥐지 않은 손이 빠져나가려는 낙구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낙구의 몸을 땅바닥에서 한 자 가량을 들어올렸다.

덕분에 키 차이가 심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할 수 있었다.

눈이 마주한 그 상태에서 낙구는 재빠르게 망가진 비수를 놓았다. 그리고는 이내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또 하나의 비수를 꺼내어 들었다.

손목을 찌르고 빠져나가려던 것이다.

허나 이번에도 단엽이 빨랐다.

시선을 마주한 그 상태에서 단엽의 입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열화폭뢰(熱火爆雷)."

중얼거림과 함께 손바닥에서 폭발이 일었다.

퍼엉!

불꽃이 확 하고 이는 듯싶더니 그것은 이내 큰 충격으로 변해 낙구에게 밀려들었다. 멱살을 잡힌 상황이었기에 낙구는 그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잡혔던 옷이 터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 또한 폭발에 휘말리며 뒤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가슴팍에 생긴 상처에서 분수처럼 솟구친 피가 주변의 땅을 적셨다.

새카맣게 변해 버린 가슴팍은 보기 흉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로 고통 어린 숨을 몰아쉬던 낙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단엽의 모습에 낙구의 머리는 복잡했다.

상대의 겉모습을 보며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저토록 젊은 나이의 무인 중에는 자신을 위협할 만한 고수가 몇 없다 확신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너무도 달랐다.

압도적이다.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공을 지닌 상대라는 걸 알아 버렸다.

그랬기에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젊은 무인은 있다손 쳐도 이토록 손쉽게 상대할 이가 있다는 사실이.

‘네놈은…… 누구냐.’

저 나이 대의 인물 중 대체 누가 이 정도의 파괴력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머리를 굴려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자가 이곳에 나타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막을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허나 상대를 바라보는 낙구의 머릿속에는 그 하나의 이름만이 맴돌았다.

결국 말도 안 된다 생각을 하면서도 낙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홍련 부련주 단엽?"

물어 오는 질문에 주먹을 꽉 쥐고 있던 단엽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실력은 볼품없는데 눈썰미는 제법이네."

대답을 듣는 순간 낙구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최악이었다.

사파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로 손꼽히는 젊은 고수.

그의 무공은 이미 중원을 뒤흔드는 최고수들을 일컫는 우내이십일성(宇內二十一星)의 아성에 다다르고 있었으니까.

낙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쪽이 단엽이라고? 그럼 대체 왜 대홍련의 부련주가 날 막는 거지?"

"음, 그냥 네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 내 주인이라는 작자한테 네가 찍혔거든."

"주인? 대홍련 련주를 말하는 건가?"

"그것까진 알 거 없고."

일일이 설명을 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단엽이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이내 엎어져 있는 그를 향해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엎어져 있을 거야. 못 싸우겠으면 순순히 항복이라도 하든지. 싸움을 포기한 녀석하고 굳이 싸울 생각은 없거든."

"……큭큭. 항복?"

낙구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사실 싸울 생각은 상대의 정체를 아는 순간 버렸다. 일격살이라 불리던 자신이지만 상대는 단엽이다.

애초에 몸을 감춘 채로 기회를 엿보다 암습을 해도 승산이 없는 상대라는 소리다.

그런 그와 더 싸운다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무인의 자존심을 앞세우며 죽을 때까지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것이다.

낙구의 시선이 멀리 나무에 기댄 채로 잠들어 있는 양휴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임무는 양휴의 관리였다.

그리고 지금처럼 뭔가 일이 벌어진 상황이라면…….

낙구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씨익 웃었다.

"웃기는 소리."

말과 함께 그의 얼굴이 갑자기 새카맣게 변했다. 그리고 그걸 보는 순간 단엽이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미친 자식아, 그만두지?"

"이게 내 임무거든. 양휴를 감시해라. 그리고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양휴와 함께 죽어라."

얼굴이 새카매지는 것과 동시에 몸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단엽은 지금 낙구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너무도 잘 알았다.

자폭이다.

스스로의 몸을 폭발시켜 저 멀리에 있는 양휴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낙구의 몸에서 조금씩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젠장!’

더는 망설일 틈이 없었다.

단엽은 곧바로 양휴가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빛에 휩싸이던 낙구의 몸이 터져 나갔다.

파앙!

터져 나가는 신체의 일부가 날카로운 암기가 되어 폭발과 함께 주변을 뒤덮었다. 그리고 목표하고 있는 양휴를 향해 그 많은 것들이 집중되어 쏟아져 나갔다.

파라락!

옷깃을 휘날리며 날아든 단엽이 주먹을 위로 들어 올리더니 곧바로 땅을 향해 내리쳤다.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하늘을 향해 흙과 돌들이 치솟아 올랐다.

동시에 휘몰아친 권풍이 날아드는 폭발과 충돌했다.

스스로의 목숨까지 내던지며 펼친 마지막 공격은 생각보다 강했다. 주변의 많은 것들이 뒤집어질 듯 흔들렸다.

하늘로 치솟았던 흙과 돌들이 이내 땅으로 떨어져 내렸고, 조용해진 그곳에는 얼굴을 가린 채로 서 있는 단엽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양휴가 자리했다.

비록 한나절도 안 돼서 쫓겨났다고는 해도 무림맹에 들어가기까지 했던 무인인 그다. 그런 양휴가 이런 소란에도 일어나지 않는 건 단순히 취기 때문이 아니었다.

객잔을 나와 이곳까지 부축되어 걷던 와중에 낙구가 혈도를 점혈해서 아예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들어 둔 탓이다.

혹시나 뭔가 이상함을 느낀 양휴가 눈을 뜨는 걸 원치 않아서다.

그 때문에 양휴는 연달아 터져 나오는 소란도 모른 채 깊은 잠에만 빠져 있었다.

이내 천천히 손을 내린 단엽이 뒤편으로 힐끔 고개를 돌렸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엉망이 된 자신의 노고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코까지 골고 있는 그를 보자니 이상하게 짜증이 치밀었다.

단엽이 중얼거렸다.

"망할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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