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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4화 (24/293)

24화. 실타래 ― 있거든요 (2)

정체불명 그녀의 부탁으로 처음 죽였던 상대를 마주하고 있자니 천무진은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다시금 실감 났다.

죽은 자를 다시 마주한다는 건 절대 할 수 없는 경험이었으니까.

천무진이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양휴……."

점혈을 당해 말조차 하지 못하는 양휴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천무진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단엽이 대충 던져 놓은 탓에 양휴는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그와의 대화가 필요했던 천무진이 걸음을 옮겼다.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 못 하는 그를 번쩍 들어 의자에 앉힌 천무진이 가볍게 손가락으로 점혈된 혈도를 눌렀다.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파아!"

숨을 쉬는 것도 조금 어려웠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양휴는 이내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바람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양휴의 어깨를 천무진이 내리누른 탓이다.

꾸욱.

그리 큰 힘을 준 것 같지 않았거늘 양휴는 꼼짝도 못한 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처음 보는 상대에, 나이도 젊어 보였지만 왠지 모를 위험한 분위기가 풀풀 풍겨져 나왔다. 사실 양휴로서는 지금 이 모든 일들이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는 이들과 술을 마시고 눈을 떴는데 자신은 납치가 되었고, 며칠을 달려 도착한 곳에서 이제야 처음으로 혈도가 풀린 상황이었으니까.

그가 물었다.

"여, 여긴 어디요? 그리고 당신은 대체 누구요?"

"그건 알 거 없고. 묻는 것에 대답이나 해. 다시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게 무슨…… 아악!"

꽉!

다시 죽인다는 말에 의아한 듯 중얼거리는 양휴의 어깨를 천무진이 보다 강하게 움켜쥐었고, 그는 저절로 비명을 토해 냈다.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양휴 또한 자신을 조종했던 그자들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좋게 이야기로 풀어 나갈 생각은 없었다.

천무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못 들었어? 지금 난 너한테 기회를 주려는 거야. 그리고 네 녀석을 죽일 이유가 없다면 살려 주겠다 말하는 거고."

"아, 아프니까 이 손은 좀 놓고……!"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힘 때문에 양휴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통을 호소했다. 그의 어깨를 잡은 손의 힘을 아주 천천히 풀면서 천무진은 재차 경고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 질문은 내가, 대답은 당신이. 되묻지 말고 숨기려고도 하지 마. 만약 하나라도 뭔가 수를 쓴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는 겨우 이 정도 고통으로 안 끝나."

천무진이 슬쩍 백아린이 있는 쪽을 바라보자, 양휴의 시선 또한 그녀에게로 향했다.

자연스레 백아린의 등 뒤에 걸려 있는 대검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도 압도적인 외향이었기에 절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천무진이 피식 웃더니 대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무기 보여? 한 방 맞으면 뼈가 으스러지는 정도로 안 끝나. 그러니 얕은 수작질 했다가는 저 여자가 당신을 곤죽이 되게 두드려 팰 거야. 생긴 거랑 다르게 좀 많이 무서운 여자거든."

자신을 향한 예상치 못한 말들에 백아린은 기가 막혔다.

하지만 지금은 천무진의 조력자로 나선 상황, 그의 말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백아린은 등 뒤에 달린 대검을 뽑아 가볍게 돌렸다.

부웅, 붕!

머리털이 삐쭉 설 정도로 소름 돋는 굉음을 토해 내던 대검을 그녀가 가볍게 어깨에 걸쳐 멨다.

그리고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 한 마디 돕자면 제가 힘 조절은 잘 못 하거든요. 혹시나 저한테 넘어오게 되면 제가 좀 미안해질 것 같은데 가능하면 그쪽에서 좋게 끝내는 걸로 해요. 알겠죠?"

웃고 있는 두 남녀를 보는 양휴는 절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살다 살다 이런 협박은 처음이었다.

양휴 또한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기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는 대로 말하겠소."

"좋아, 그럼 시작하지."

천무진이 의자를 끌고 와 그의 맞은편에 놓고는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런 천무진의 뒤편으로 다가온 백아린은 여전히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로 양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로 주눅이 든 상황에서 천무진의 질문이 시작됐다.

"무림맹에 들어간 적이 있지?"

"그, 그렇소. 하루도 못 버티긴 했지만 무림맹에 들어간 적이 있었소."

"그런데 왜 나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잖아. 다른 곳도 아닌 무림맹이라면 가장 욕심이 날 수밖에 없는 자리인데 말이야."

"당신 말대로 내 발로 나갔을 리가 없잖소. 나간 게 아니라 쫓겨났소."

"왜?"

"그게……."

말을 잇지 못한 채로 가만히 있던 양휴가 눈치를 살피다 이내 입을 열었다.

"모르겠소."

대답을 듣는 순간 천무진이 눈꼬리를 확 추켜올렸고, 뒤편에서 듣고 있던 백아린도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어깨에 올리고 있던 대검이 꿈틀하는 걸 보는 순간 양휴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지, 진짜요! 진짜 아무것도 모르오!"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는 그를 향해 천무진이 짜증 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다더니 처음부터 수작질이네. 팔 한쪽을 아작 내고 이야기를 재개해야 좀 솔직해질 거야?"

소름 돋는 경고와, 뒤편에서 그 커다란 대검을 아무렇지 않게 까닥거리는 백아린의 모습에 양휴의 얼굴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가 서둘러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갑자기 그만두라 한 거라 정말 난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오. 나도 꿈에 그리던 무림맹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쫓겨나는 바람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르오."

"그러니까 말이 안 되잖아. 무림맹을 들어가는 건 절차가 있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리 힘들게 사람을 들인 곳에서 널 쫓아낼 리가 없잖아."

"아이 씨, 미치겠네. 정말! 나도 억울해 죽겠단 말이오!"

자신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로 그가 머리를 마구 흔들어 댔다.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리는 양휴의 모습을 보던 천무진이 슬쩍 백아린에게 전음을 날렸다.

『어떻게 생각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쪽이 봐도 그렇지?』

『네, 보니까 꽤나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 같은데 굳이 의심스러운 뭔가가 있다면 감출 것 같지 않아요. 물론 이런 짐작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요.』

이런 상황에 의심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자신들을 완벽히 속일 정도로 뛰어난 자라는 거다. 심계가 깊고, 충성심이 강해 목숨을 버리면서라도 비밀을 지키려는 자.

하지만 이건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았다.

이번 생뿐만이 아니라 전생에서 만났던 기억이 있었으니까.

양휴는 그리 용맹한 사내가 아니었고, 또한 저번 생에서 죽음을 목전에 뒀을 때도 살려 달라고 빌 정도로 본인의 목숨에 연연했었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비밀을 지키려 드는 건 아닐 확률이 크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 경우의 수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정말 모르는 상황.

허나 그렇다면 굳이 사람을 붙여서 감시를 하고, 무림맹에서도 쫓아냈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경우의 수가 나온다.

바로 본인이 보고도 그것이 의심스럽다 여기지 못하는 경우.

그랬기에 천무진은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쫓겨난 이유가 뭐라던데?"

"능력 부족이라고 했소. 젠장, 말하고 나니 더 기가 막히네. 보여 줄 시간이나 있었냐고."

투덜거리는 양휴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무진은 질문을 이었다.

"홍천관으로 배정되었다고 들었는데, 거기서 무슨 특별한 일 없었어? 뭔가 들었다거나 본 거 없었냐고. 뭐라도 좋으니 생각나는 거 있으면 말해 봐."

"뭐 별거 있겠소. 그냥 간단하게 호구 조사나 좀 하고 쓸데없는 잡담이나 좀 나눴소이다. 뭐 얼마 있지도 못 해서 본 사람도 거의 없소."

"그러니까 그 대화들이 뭐였냐고."

"별로 중요한 말들이 아니라 기억이 나는 게 딱히 없소."

한나절 만에 쫓겨났으니 홍천관의 사람들 중 얼굴을 본 이도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해 줄 말이 없다고 말하는 양휴의 모습에 천무진이 표정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없으면 다야? 그냥 그렇게 대충대충 말해 가지고 지금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하, 하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는데……."

"그래? 그럼 생각나게 해 줄게."

좋게 말해선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천무진이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허벅지를 강하게 움켜잡았고, 기다렸다는 듯 백아린이 대검을 치켜들었다.

천무진에게 눌리는 허벅지에서도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그보다 시선을 잡아 끄는 건 역시나 대검이었다. 너무도 압도적인 외향에 절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드, 들어가자마자 신고식이라면서 선배인 척하는 놈들이 윽박질러 댔소. 다행히 내 이름과 신분을 듣고는 곧바로 사과를 했었던 것이 얼핏 기억나오."

"좋아, 계속해."

천무진이 허벅지를 움켜쥔 손을 풀었고, 양휴는 계속해서 자신이 나눴던 대화들을 최대한 기억해 내며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천무진은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고식부터 해서 일련의 과정들이 자신이 경험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완전 말단의 신분으로 들어간 자신과는 달리 양휴는 그래도 나름 등에 업을 정도의 이름과, 가문이 있었던 덕분에 크게 무시를 당하지는 않았던 듯싶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호구 조사만을 마친 채로 곧바로 관주에게 신고를 했다고 했다.

양휴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소. 홍천관 관주는 나에게 환영한다 웃으며 말하기도 했고, 앞으로 잘해 보자는 덕담 어린 이야기들도 해 줬소."

"그리고?"

"……그다음엔 식사를 했소. 음 그 이후엔……."

뭔가를 생각해 내려는 듯 머리를 쥐어짰지만 점점 양휴의 표정은 좋지 않게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무림맹에서 겪었던 건 이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관주에게 신고를 했고, 곧바로 밖에 나가 식사를 했다. 그리고 이내 홍천관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무림맹에서 나가라는 퇴출을 명받았다.

더는 이야기해 줄 것이 없었지만, 이 안에서 눈앞의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뭔가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본인인 양휴조차 잘 알았다.

고민하는 그를 바라보던 백아린이 물었다.

"혹시 식사를 하던 도중에 뭔가 의심스러운 대화는 없었어요?"

"그럴 건 전혀 없었소. 무림맹 내부에서 식사를 하기엔 아는 사람도 없고 불편해서 일부러 바깥에 나가 혼자 밥을 먹었거든."

양휴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이후의 이야기들 중에는 의심할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 막 백아린의 질문에 대한 답을 끝내던 양휴는 뭔가를 퍼뜩 떠올렸다.

사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일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흘러 나갔다.

"아, 맞다.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관주를 봤소."

"바깥에서?"

"객잔 근처의 골목이었으니 바깥이었던 걸로 기억하오. 홍천관 관주의 이름이 금 뭐시기였는데 그 사람 겉보기와 다르게 성격이 별로 안 좋더라고."

"듣기로 평판이 상당히 좋은 것 같던데."

금호를 이미 만나 본 적이 있었기에 천무진 또한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와, 배려 가득한 말투.

홍천관 무인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자다.

알면서도 천무진은 모르는 척 말을 떴고, 양휴는 곧바로 그에 답했다.

"그러니까 말이오. 나도 처음 인사를 할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근데 난 봤지. 그가 골목길에서 수하로 보이는 자의 뺨을 때리는 걸 말이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천무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뺨을 때려?"

"그렇소. 그것도 서너 대를 연달아 쳤소. 근데 지금 말을 하면서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한 부분이 하나 있는데 맞은 자도, 때린 자도 너무 평온해 보였소."

"평온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보시오. 지금 당장에 그쪽이 날 때리면 내 기분이 어떻겠소. 기분이 불쾌할 수도, 아니면 살고 싶어서 오히려 나쁜 감정을 감춘 채로 억지웃음을 지을 수도 있지 않겠소? 반대로 때리는 쪽도 화를 내면서 손바닥을 휘두르거나, 아니면 울컥해서 때린 거면 그 이후에 조금이나마 미안해할 수도 있을 것 아니오. 뭔가 말이라도 하든지 말이오."

"그렇겠지."

"그런데…… 그런 게 없었다는 말이오. 때린 자도 그냥 때렸고, 맞은 자도 그냥 맞았다고 해야 되나. 뭐 하여튼 그런 이상한 분위기였소."

사실 금호가 누군가를 때렸다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니까.

다만 양휴의 설명대로라면 상황상 분위기가 뭔가 묘했다.

그리고 평소 성인군자처럼 행동하는 금호가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 또한 그냥 가볍게 흘려들을 문제는 아닌 걸로 보였다.

지금까지 양휴가 기억해 낸 일들 중에 가장 의심스러운 상황이었으니까.

천무진이 물었다.

"그리고?"

급히 물어 오는 질문에 양휴가 담담하게 답했다.

"들켰소."

"관주에게 들켰다고?"

"들켜서 크게 한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날 확인하고는 별다른 말 없이 가라고 했소. 가능하면 식사는 무림맹 내에서 해결하라고 하면서 말이오. 그러고 나서 돌아간 지 얼마 안 돼 무림맹을 나가라는 통보를 받은 거요."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천무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뿐이다.

의심을 이어 나갈 어떠한 것조차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아무런 것도 얻어 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급했는지, 천무진이 양휴를 재촉했다.

"더 생각나는 거 없어? 잘 생각해. 그 하나가 네 목숨을 살릴 수도 있으니까."

아는 걸 최대한 말한 상황에서 더 무엇을 기억해 내야 하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양휴는 기억나는 또 하나가 있었다.

그가 재빠르게 말했다.

"그 뺨을 맞은 자, 홍천관 내부의 사람이었소."

"확실해?"

"그건 확실하오. 홍천관에 들어가서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거든. 그 사람 이름이…… 아! 손광일(孫廣逸)! 맞다 손광일이라는 자였소."

이름을 듣는 순간 천무진이 곧바로 백아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홍천관에 들어가 많은 이들의 정보를 알고 있는 천무진이다. 그런 그의 기억에 없는 이름이라면 이미 홍천관을 떠난 자라는 소리다.

한번 본 정보는 거의 모두 외우다시피 하는 뛰어난 머리를 지닌 백아린이었기에 그 이름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는…… 죽었어요."

* * *

한천은 한껏 술에 취해 걷고 있었다.

백아린의 명령대로 부관주 여청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고, 그 덕분에 속이 아플 정도로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처음부터 단둘이 자리를 가졌다가는 자칫 의심을 받을 수 있었기에, 일부러 다른 이들까지 합석한 술자리.

열 명 가까운 인원이 참석한 자리였지만 그 와중에도 한천은 임무대로 여청과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맹 내부에 있는 주루에서 술을 마신 탓에 한천은 아직도 무림맹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장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틀거리며 실실 웃었다.

‘하하, 이렇게 노력하는 걸 우리 대장은 알려나 모르겠네.’

새벽이 다 되어 가는 상황이었기에 무림맹 내부는 낮과 달리 오고 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점점 나아갈수록 그나마 보이던 이들의 모습 또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취한 듯 비틀거리며 걷던 한천은 아주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대 또한 한천이 걷는 길 위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무림맹주 추자후였다.

아무리 무림맹이라고 해도 맹주를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닌 상황.

한천은 비틀거리는 와중에서도 추자후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길옆으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그에게 예를 갖추고 있었다.

한천의 바로 앞을 지나쳐 가려는 바로 그때 추자후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인적 하나 없는 장소.

추자후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객잔에서 봤던 그 친구로군."

둘 사이에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바람, 한천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영광스럽다는 듯 말했다.

"맹주님께서 소인을 어찌 기억하시고……."

"한천이라고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한천을 바라보던 추자후가 슬쩍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한천이라…… 그 이름 잘 어울리는군, 조휘(趙輝)."

무림맹주 입에서 나온 조휘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실실 웃고 있던 한천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돌변했다.

술기운 가득했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해져 있었다.

그런 한천을 향해 추자후가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는가, 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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