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이간질 ― 충분해요 (1)
홍천관의 관주 금호는 갑작스러운 호출에 급히 무림맹의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총군사 위지겸의 집무실이었다.
집무실에 도착한 금호가 예를 갖춰 포권을 취했다.
"홍천관 관주 금호, 총군사님을 뵈러 왔습니다."
"허어, 생각보다 일찍 오셨소, 금 관주. 우선 이리로 오시지요."
위지겸은 곧바로 금호를 가운데에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위지겸은 탁자 위에 있던 차를 따라 권했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금호는 조심스레 찻잔을 받아 입가에 가져다 댔다. 홍천관의 관주라는 신분으로 있긴 하지만 사실 그는 위지겸과 만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렇게 독대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금호가 물었다.
"찾으셨다 들었습니다만 무슨 연유이신지요?"
별다른 이유 없이 만날 사이가 아니었기에 금호는 위지겸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질문에 위지겸이 곧바로 답했다.
"금 관주도 알다시피 이번에 강소성 무림맹 지부에 물자를 보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에 맞춰 무인 충원 요청이 들어와서 말입니다."
"아, 저희 쪽에서도 인원의 일부를 충원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렇긴 한데 정확히 말하자면 인원의 일부라기보다는 중간 관리직 한 명이 필요한 상황이지요. 물자 관리를 전담해 줄 사람으로 말입니다."
"……중간 관리직이요?"
되묻는 금호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홍천관에서 그나마 중간 관리직으로 분류될 만한 이는 채 다섯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도 억지로 꼽았을 때나 그렇지 실상은 자신과 부관주 여청 단둘뿐이라 봐도 옳았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그때 위지겸이 먼저 속내를 드러냈다.
"금 관주나 부관주 둘 중 한 분은 그곳으로 가 줘야 할 것 같군요."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을 겁니다. 길면 일 년, 짧으면 반년 안에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요."
무덤덤하게 말을 하는 위지겸의 모습을 보며 금호는 애써 말을 삼켜야만 했다. 다른 이도 아닌 무림맹의 많은 부분을 관리하는 총군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결정을 번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 그를 곁눈질로 살피던 위지겸이 이내 물었다.
"어찌하시는 게 좋으시겠습니까? 저희 쪽에서야 당연히 관주께서 가시는 게 낫긴 한데……."
뭔가 자신을 보내려는 낌새가 느껴지자 금호가 황급히 말을 자르며 답했다.
"부관주를 보내도록 하지요. 아무리 그래도 관주인 제가 일 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은 탐탁지 않고, 이곳에서 제가 담당하고 있는 일들이 많아서요."
"그래요? 금 관주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야 부관주를 보내는 쪽으로 정리를 해야겠군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위지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마치고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리는 그를 바라보던 금호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다 끝나셨다면 전 이만 물러나지요. 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이런 바쁘신 분을 대낮부터 불렀군요. 그럼 살펴 가시지요."
"예,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말을 마친 금호가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갔고, 그로부터 잠시 동안 위지겸은 홀로 찻잔을 기울였다. 그러던 그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공간에 갑자기 내뱉은 그의 한 마디.
이내 뒤편에 있는 자그마한 문이 열리며 백아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요."
"필요하시다고 하셔서 도와 드리긴 했지만 이보다 더 깊게 도움을 드리긴 어려울 듯싶군요. 의심하시는 건 알겠지만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어서요."
맹주와 총군사가 천룡성의 인물인 천무진을 돕기로 약조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선에서의 이야기다. 그 부탁이 무림맹에 해를 끼칠 일이라면 선뜻 돕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부탁이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
그랬기에 백아린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위지겸의 말이 끝나자 백아린이 금호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 이후부터는…… 저희가 상황을 키울 생각이니까요."
* * *
"망할!"
여청이 거칠게 술잔을 들이켰다.
이미 술을 꽤나 마셨는지 그의 얼굴은 상당히 붉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여청의 옆에는 한천이 자리한 상태였다.
처음 이 술자리는 지금처럼 단둘만이 아니었다.
여섯 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연신 화만 내며 술을 들이키는 여청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불편해하던 상황.
한천은 그런 그들에게 슬쩍슬쩍 여청은 자신이 맡을 테니 먼저 가 보라며 다른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고, 결국 반 시진 정도 시간이 흐르자 넓은 방 안에는 여청과 한천, 단둘만이 남게 된 것이다.
여청은 입술 옆으로 흐르는 술을 소매로 닦아 냈다.
그런 그의 빈 술잔에 한천이 다시금 술을 채워 줬다.
쪼르르.
술이 차는 걸 물끄러미 보던 여청이 이내 한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네도 가 보게. 내 오늘 기분이 영 더러워서 어울려 주질 못하겠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청은 계속 말없이 옆자리를 지켜 주는 한천에게 내심 고마운 눈치였다.
그의 말에 한천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무슨 소린가, 그게. 기분이 안 좋을 때일수록 누군가는 옆에 있어 줘야지. 이대로도 괜찮으니 나는 신경 쓰지 말게. 그냥 계속 술을 마셔도 되고, 혹 이야기를 해서 가슴속에 담긴 화를 풀고 싶다면 그래도 되네. 술친구란 게 그런 거 아닌가."
슬쩍 떠보며 잔을 권하는 한천.
그런 한천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여청은 재차 쓴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크으."
"술만 먹지 말고 안주도 좀 먹게."
말과 함께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고기 안주가 담긴 접시를 내미는 한천의 모습에 여청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껏 오른 취기와, 화. 그리고 옆에서 연신 챙겨 주는 한천의 모습까지.
그가 결국 입을 열고야 말았다.
"젠장, 그 새끼가 자네만큼만 날 챙겨 줬다면……."
여청이 왜 이리 화가 나 있는지 한천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들이 벌인 일 때문이리라.
알면서도 한천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되물었다.
"관주라는 작자가 또 자네를 화나게 했나 보군."
일전에 이미 관주에 대한 투덜거림을 늘어놓은 적이 있기에 그런 한천의 말에도 여청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마음을 조금 연 여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개처럼 부려 먹더니 이번엔 좌천을 시키더군."
"좌천?"
한천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말문이 열리자 마치 무너진 둑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물처럼 불만이 연신 터져 나왔다.
"강소성이라네. 나보고 그 먼 곳까지 가라더군. 젠장,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도왔는데……."
"그리 멀리? 안 갈 수는 없는 겐가? 자네 말대로 그리 도움을 줬다면 그 정도야 어떻게 빼 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내 말이 그 말일세! 이젠 필요 없어졌다 이거겠지.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더러운 새끼. 반년이나 그곳에 가서 처박히라더군."
분노를 토해 내며 여청이 재차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화를 곱씹는 그를 위로하는 척하던 한천이 준비해 둔 속내를 서서히 끄집어냈다.
막 생각났다는 듯 한천이 말했다.
"그런데 강소성이라면 혹시 무림맹 지부의 일을 말하는 건가?"
"맞네."
"……이상하군."
"뭐가 말인가?"
"거길 가는 거면 반년 안에 돌아올 리가 없을 터인데……."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리 쪽에서도 몇 명 차출이 되었거든. 그런데 그들 말로는 족히 십 년은 있어야 할 일이라며 가족들과 함께 떠난다고 하던데 말이야."
"……뭐? 십 년?"
술잔을 쥐고 있는 여청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덩달아 눈초리마저 미묘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지금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말해 주는 듯싶었다.
결국 참지 못한 여청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당장 그놈에게 물어봐야겠네! 정말로 날 십 년이 넘게 그곳에 처박아 두려고 한 건지!"
금호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려는 듯 발걸음을 떼는 여청을 한천이 황급히 잡아챘다.
그가 한천을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한천이 말했다.
"이 친구야 생각을 해 보게. 정말 그렇다고 한들 지금 자네에게 솔직히 말하겠는가?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우선 보내고 나서 조금만 더 있으면 돌아오게 해 주겠다고 반복하며 시간을 끌 게 뻔하지 않은가."
"아니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지 않나!"
"진정하게. 이렇게 대놓고 찾아가 따졌다가는 오히려 자네의 수만 읽히는 꼴이 된단 말이야. 거 영특한 친구가 왜 그러나."
술과 화로 인해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던 그이지만 한천의 말에 그나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가 다시금 자리에 털썩 앉았다.
여청이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 이 새끼 감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친다 이거지?"
분노를 토해 내는 여청을 보며 한천은 한 가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둘이 같은 목적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유대 관계가 그리 깊지 않은 모양이로군.’
어느 정도 예상을 했기에 이 같은 자리를 만들긴 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 조금만 더 흔든다면 둘 사이는 훨씬 더 멀어질 거라는 것을.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이상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실눈을 한 그의 눈동자가 옅게 빛났다.
한천이 입을 열었다.
"이후의 일이나 이런 건 다 따지지 말고 우선은 이곳 맹에 자네가 남을 방법부터 찾지. 이곳에 있어야 뭘 도모해도 할 것 아닌가."
"나도 알지. 다만 그럴 방도가……."
"자네를 붙들고 있어야 할 일이 뭐 없겠는가? 그렇게만 만든다면 아무리 상부의 명이라고 해도 관주가 어떤 핑곗거리를 만들어서든 자네를 지킬 거 아닌가."
"날 붙들고 있어야 할 일이라."
중얼거리던 여청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금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여청이 말을 이었다.
"하나…… 생각나는 게 있군그래."
"허어, 그거 참 다행일세!"
안심이라는 듯 한천이 소리쳤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번 일을 자신이 돕겠다고 나서거나, 그게 뭐냐고 캐묻지 않았다. 일이 잘 풀린다면 보다 확실한 증거를 얻을 기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과한 접근은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다.
과한 것보다는 차라리 모자란 게 낫다.
한결 풀어진 얼굴로 여청이 한천을 향해 말했다.
"고맙네."
"고맙기는."
씩 웃으며 한천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자네가 가면 내 술친구는 누가 하겠는가."
* * *
늦은 밤 금호의 거처.
그곳에 손님이 막 찾아들었다. 그건 다름 아닌 몇 시진 전까지 한천과 술을 퍼마시고 있던 여청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잠에 들고도 한참이 지났을 늦은 시간에 갑작스레 찾아온 그를 금호가 맞았다.
가벼운 경장 차림을 하고 있던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 늦은 밤에 무슨 일인가?"
"관주님."
"……뭔가?"
왠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거는 상대방의 모습에 금호 또한 표정을 굳히며 되물었다.
그러자 여청이 말했다.
"날 너무 우습게 보셨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날보고 강소성에 가라고? 한마디로 쓸 만큼 썼으니 이만 꺼져 달라 그거 아니요!"
"에휴, 또 그 소린가.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상부의 명령인데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대꾸하는 금호를 향해 여청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가 말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소? 관주가 손을 써서 날 지키면 될 일 아니오!"
"그게 안 되니까 가라는 것 아닌가. 나라고 해서 자네를 보내고 싶을 리가……."
"안 되는 게 아니라 그럴 생각이 없는 건 아니고?"
"감히!"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금호가 옆에 있던 벼루를 집어 던졌다.
쨍!
벽에 부닥친 벼루가 산산조각이 나며 떨어져 내렸고, 덩달아 안에 남아 있던 먹물이 곳곳에 튀었다. 얼굴에 묻은 먹물을 손등으로 스윽 닦아 내는 여청의 눈동자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그런 그를 향해 금호가 말했다.
"죽고 싶은가?"
"킥, 이제야 진짜 속내를 드러내는군그래. 하지만 나도 그냥 당할 생각은 전혀 없소."
"……그게 무슨 뜻이지?"
"내일 한번 창고에 가 보시오. 당신이 아끼던 그 물건들이 잘 남아 있는지."
"여청 네놈이 설마……!"
"내 말은 여기까지요. 그러니 알아서 하시오. 날 버린다면 그 물건들 또한 다시는 찾지 못하게 될 테니."
말을 마친 여청은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금호는 이를 뿌득 갈며 옆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혹시나 했거늘 여청이 정말로 사고를 치고야 만 것이다.
그때 자리에 앉은 금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의 말이 맞았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천무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