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왕-33화 (33/293)

33화. 의문사 ― 바로 움직이죠 (2)

단엽은 천무진의 명령대로 한천과 교대로 여청을 감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감시를 한천이 도맡긴 했지만, 단엽은 그 짧은 시간마저도 그리 내키진 않았다.

단엽이 맡은 시간은 대부분 여청이 잠에 든 시간.

싸움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성격인 그에게 이런 일은 당연히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록 아직 잠에 들진 않았지만, 오늘도 언제나처럼 거하게 술을 마신 여청은 책상에 앉아 뭔가를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최근 들어 불거진 관주와의 대립으로 매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은 불안감이 밀려드는 날들이었다.

그나마 다른 이들과 함께할 때는 나았지만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오면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자신을 버리려 한 관주 금호의 태도에 나름 승부수를 던졌다.

분명 먹힐 거라 여겼는데 금호 쪽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여청을 못내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에잇, 망할 새끼!"

짜증 난다는 듯 욕설을 내뱉고 있는 여청을 단엽은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여청은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둘의 실력 차가 컸기 때문이다.

몸을 감춘 채로 서 있던 단엽이 길게 하품을 했다.

단엽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무에 기대어 섰다.

‘겨우 저런 놈이나 감시하고 있고.’

화끈한 싸움을 기대하고 천무진과 동행했거늘 아직까지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싸움은 전혀 없었다. 한 번 임무를 받고 양휴를 죽이려 했던 자와 싸우긴 했지만…… 그건 몸풀기조차 되지 않았다.

‘젠장, 그때 왜 져 가지고 이런 신세가 됐는지 원.’

아직까지도 천무진과 겨뤘던 그날의 모든 것들이 생생하다.

그의 움직임이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림처럼 머리에 그려진다. 그만큼 많이 생각했고, 또 연구했다는 소리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듯한 천무진의 움직임에 자신은 완벽하게 패했다.

귀찮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날의 패배를 떠올리면 단엽은 다시금 마음에 불이 확 하고 붙었다. 자신을 꺾은 천무진이라는 사내를 이기고 싶었다.

하루 종일 싸움 생각만 하는 사내, 그게 바로 단엽이었다.

천무진을 생각하니 단엽은 이상하게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와 시원하게 한판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단엽은 애써 자리를 지켰다.

여청을 감시하라는 것이 천무진의 명령이었고, 그를 따르기로 한 이상 내려진 명령은 어떻게든 완수해 내야 했다.

그건 약속이었으니까.

나뭇가지 위에 선 채로 안을 감시하던 단엽의 귓가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그 발걸음은 여청이 있는 방 안으로 향했다. 단엽이 상대가 누군지 귀를 쫑긋 세우는 그때였다.

"어르신, 꿀물을 가져왔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온 말에 여청이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들라!"

말과 함께 하인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여청은 그가 건넨 꿀물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거칠게 들이켜던 그가 일부를 쏟았는지 표정을 확 구겼다. 입 옆으로 흐르는 꿀물을 소매로 닦아 낸 여청이 곧 남은 걸 모두 입에 털어 넣어 버렸다.

여청이 빈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가져가."

"예, 어르신."

하인은 그의 명령대로 빈 그릇을 받아 들고는 방문을 나섰다.

하인이 사라진 이후 찾아온 잠시의 정적.

그때 잠시 가만히 앉아 있던 여청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 위에 있는 서책들을 바닥으로 쓸어 버렸다.

우당탕.

그러고는 이내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고개를 치켜들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으아! 취한다!"

짜증이 치솟은 표정으로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여청을 보며 단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이처럼 술을 마시고 방 안의 물건을 때려 부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여청을 감시하던 그날부터 그는 화가 나기만 하면 방 안의 물건들을 마구 집어 던졌다.

오늘도 예상대로 탁자 위에 물건들을 바닥으로 내팽개친 그는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발로 땅에 나뒹굴고 있는 것들을 팍팍 걷어찼다.

잠시 소란을 부려 대던 여청이었지만, 이내 그는 의자에 기댄 채로 곯아떨어졌다.

"커어, 커어."

여청의 코 고는 소리가 울려왔다.

나무 위에 서 있던 단엽이 천천히 자리에 걸터앉았다. 제 풀에 지쳐 잠든 여청의 모습에 한심하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참 하루도 변함없이 지랄 맞은 성격이네.’

단엽은 품 안에 챙겨 온 옥수수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그러고는 옥수수를 옷에 가볍게 슥슥 닦아 내고는 곧장 입에 가져다 댔다.

원래 단엽은 옥수수를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최근 치치를 만난 이후부터는 연신 옥수수를 입에 달다시피 하며 살고 있었다.

요즘 따라 옥수수가 좋아졌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있긴 했지만 사실은 치치에게 은근슬쩍 한 알씩 건네는 재미 때문이었다.

여청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옥수수를 오물거리던 단엽은 갑자기 사라진 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의자에 쓰러진 듯 자고 있는 여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막 옥수수를 다시금 입에 가져다 대는 찰나…….

단엽의 눈동자가 꿈틀했다.

‘이상한데?’

뭘까?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그의 감각이 무엇인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외치는 그 순간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여청의 코에서 뭔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피였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단엽의 신형이 곧바로 나무 아래로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창문을 통해 여청이 있는 방 내부로 뛰어 들어갔다.

가까이에 다가가는 그 순간 코에 이어 입에서도 피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단엽이 여청의 맥을 짚어 보았지만…….

‘……늦었어.’

여청은 이미 시신이 되어 있었다.

그가 죽은 걸 확인한 단엽이 황급히 시체를 살폈다. 몸에는 그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거기다 감시하는 내내 누군가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죽었다면 당연히 독을 의심해 봐야 옳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꿀물을 가져다준 그 하인이다.

시신을 바라보던 단엽이 확신했다.

‘보통 독이 아니야.’

일반적으로 독에 중독당해 죽었다면 피부색이 변하거나, 악취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지금 여청은 피를 쏟아 낸 것을 제외하고는 별반 독에 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평온해 보이는 얼굴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당장 이 독을 쓴 하인을 찾기 위해 움직이려던 단엽은 뭔가를 기억해 내고는 황급히 발을 멈췄다.

다름 아닌 입가에 묻은 꿀물을 닦아 내던 여청의 모습이었다.

단엽의 시선이 향한 소매에는 아까 닦아 낸 꿀물이 묻어 있었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단엽은 곧바로 꿀물이 묻어 있는 소매를 뜯어냈다.

지이익.

꿀물에 독이 타져 있었다면 그게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밝혀내야 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반대편 옷소매를 뜯어내고는 여청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피를 잔뜩 묻혔다.

서둘러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챙긴 단엽은 곧바로 움직였다.

꿀물을 가져다준 하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나무 위에 숨어 있던 탓에 입구 쪽에만 있었던 그자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슬쩍 보였던 옷차림과, 목소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여청의 거처에서 허드렛일을 돕는 이의 숫자는 다섯밖에 되지 않는다. 개중에 사내는 그 절반 정도인 셋. 단엽은 당시 방에 꿀물을 가지고 들어온 하인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단엽의 눈동자가 빛났다.

‘간이 부은 자식이구나.’

사람을 죽이고도 그는 너무나 태연해 보였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짐을 창고로 옮기고 있는 그자를 보며 단엽이 막 모습을 드러내려고 할 때였다.

짐을 내려놓은 그가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어휴, 오늘도 난리를 피워서 내일 또 뒷정리할 생각에 앞이 깜깜했는데 그나마 일찍 잠잠해져서 다행이구먼."

상대의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단엽은 움찔했다.

목소리가…… 달랐다.

옷차림은 같다. 게다가 줄곧 신경이 곤두서 있던 여청이 모르는 얼굴을 한 이가 준 꿀물을 받아 마셨을 리도 없을 터.

‘역용술에 당한 건가?’

완전 의심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분명 목소리에 차이가 있다.

만약 역용술을 쓴 자에게 당한 것이라면 그자가 이 장원에 남아 있을 리가 없을 터.

뿌드득.

단엽은 이를 갈았다.

화가 치솟았다.

자신이 감시해야 할 상대가 죽어 버렸으니까.

이건 누가 뭐라 하고 말고를 떠나 단엽 스스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서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우선은 알려야 해.’

꿀물과, 피가 묻은 각각의 소맷자락을 꽉 쥔 채로 단엽이 몸을 돌렸다.

* * *

"……그래서 이렇게 돌아온 거고."

단엽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은 세 사람의 표정은 복잡했다.

천무진의 손에 금호가 죽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여청 또한 죽음을 맞았다.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어떠한 모종의 이유가 있기에 벌어진 일인 것인가.

백아린이 물었다.

"여청의 소맷자락은?"

"여기."

단엽이 품 안에 넣어 뒀던 두 개의 소맷자락을 꺼내어 내밀었다. 소맷자락을 받아 든 백아린이 잠시 그것의 상태를 살필 때 옆에 있던 천무진이 말을 걸었다.

"그 독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겠어?"

"장담하긴 어려워요. 여기에 언제까지 독성분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요."

고개를 저으며 백아린이 대꾸했다.

시간을 들인다면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건 그런 여유가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독성분이 언제까지 남아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다가, 적화신루를 통해 이 소맷자락이 왔다 갔다 하다가는 결국 그나마 있던 단서조차 날아갈지 모른다는 거다.

금호에게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사실 여청의 죽음은 천무진에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여청은 금호의 아래에 있던 자고, 오히려 아는 것이 극도로 적었을 거라는 판단이 서 있던 상태였으니까.

허나 여청의 죽음으로 또 하나의 단서가 될지도 모를 꼬리가 잡혔다.

바로 이 독과, 이걸 사용한 자의 정체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이 독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알고 싶었다.

천무진이 재차 물었다.

"이 독에 대해 알아낼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하나 있긴 한데."

"그게 뭔데?"

그가 다급히 되물을 때였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성도예요. 그 말은 곧 바로 옆에 사천당문(四川唐門)이 있다는 거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천무진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곧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오대세가의 하나이자, 독과 암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사천당문. 그리고 사천당문은 무림맹이 있는 이곳 성도와 아주 인접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성도 인근에 자리한 탓에 그들의 본가와는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거기다가 독이다.

천하에서 독에 대한 정보가 가장 많이 있는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당연히 사천당문이 첫손에 꼽힐 수밖에 없다.

백아린이 말을 이었다.

"분명 세상 그 누구보다 이 독에 대해 알아낼 확률이 높을 거라 자부해요. 다만 하나 문제가 있다면 사천당문에 이 독의 정체를 알아봐 달라고 의뢰를 해야 하는 건데……."

사천당문이 돈에 움직이는 문파도 아니고, 정체 모를 이가 무턱대고 이 독이 무엇인지 확인해 달라며 의뢰를 하는데 이를 들어줄 이들이 아니었다.

지금 천무진의 위치는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말단이었고, 당연히 그런 그의 부탁을 사천당문에서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적의 정체를 모르는 지금 동네방네 천룡성의 이름을 떠들고 다닐 수도 없는 상황.

무림맹주와 총군사에겐 이미 밝혔지만 최대한 정체를 숨기고 있는 천무진에게 그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그들을 통해 의뢰를 넣어 보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그것도 그리 간단하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이 독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부르게 무림맹주를 이용했다가는 뒷일이 시끄러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반맹주파가 득실거리는 지금의 무림맹에서 괜한 분란거리는 그들 또한 안으려고 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천무진의 고민이 깊어지는 그때, 백아린이 말했다.

"제가 한번 해 볼게요."

"그쪽이?"

"네, 아무래도 천룡성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제가 나서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요. 우선은 총군사를 통해 사천당문과 곧바로 만날 약속을 잡을게요. 그리고 제가 의뢰를 하는 척 꾸미도록 하죠."

"그게 되겠어? 아무리 총군사의 부탁이라고 해도 고집이 센 자들이라 이런 사사로운 외부의 의뢰는 받지 않으려고 할 텐데?"

"그냥 무림맹 말단의 신분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예요."

백아린이 옆에 내려놓았던 대검을 등에 메며 말을 이었다.

"적화신루의 총관으로 그들 앞에 나설 거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