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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35화 (35/293)

35화. 사천당문 ― 나이는 중요치 않아요 (2)

무림맹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는 탓에 백아린은 죽립을 벗지 않고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얼굴은 보여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제 신분은 총군사님께서 보장하셨으니 믿고 이야기 나눠도 괜찮겠죠?"

"그럼요. 어차피 얼굴을 보여 주셔도 사총관님은 무림에 외모가 알려지지 않으신 분이라 저희 쪽에서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는 건 매한가지니까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이런 깜빡하고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저는 사천당문의……."

"당소련(唐昭蓮). 사천당문 가주의 둘째 따님분 맞으시죠?"

아무런 언급도 없었거늘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당소련이라 불린 그녀는 움찔했다. 정체가 드러날 만한 건 아직 아무런 것도 보여 주지 않은 상태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정확하게 자신의 신분을 파악했다.

아무리 사천당가에서 활약하는 여인의 숫자가 사내들보다 적다고는 해도, 그 숫자는 백여 명에 달한다.

젊은이들을 빼고 비슷한 나이대만 쳐도 오십 명 이상인데 그중에서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짚어 낸 것이다.

당소련이 대답했다.

"네, 맞아요. 그런데 제가 당소련인 건 어찌 알아차리셨죠?"

"조금의 정보만 있으면 그 정도야 그리 어렵지 않죠. 그게 저희의 일이니까요."

담담하게 대꾸하는 백아린의 말에 그녀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의 대답은 적화신루가 그만한 정보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젊은 상대가 꽤나 능력이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당소련이 말했다.

"적화신루에서 먼저 연락을 취해서 놀랐어요. 언제나 저희가 만나려고 하던 입장이었는데 말이에요."

돈으로 정보를 사고파는 정보 단체인 적화신루의 입장에서 사천당문은 어려운 고객이었다.

개방이 가운데 끼어 있는 탓이다.

아무리 개방과 사천당문 사이가 좋지 못하다고 해도 대놓고 정보를 파는 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 개방과의 불화는 적화신루에게도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최대한 직접적인 만남은 자제하고 개방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정도로만 일을 맡아 왔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이 변한 건 아니다.

허나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아주 조금만 더, 사천당문과 밀접한 관계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언젠가 이 일을 계기로 개방과의 관계가 복잡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개방의 눈치만 보다가는 적화신루는 결국 고인 물이 될 수밖에 없다.

고인 물은 결국 썩기 마련, 세력을 보다 확장하길 원하는 적화신루의 입장에서 지금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적화신루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줄 선택. 그리고 백아린에겐 그런 선택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의뢰를 하나 드리고 싶어서요."

"적화신루가 저희에게요?"

의뢰라는 말에 당소련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반적으로 정보 단체인 그들에게 의뢰를 주는 입장이었으니까.

백아린이 비단에 싸인 뭔가를 내밀었다.

비단을 받아 든 당소련이 물었다.

"이게 뭐죠?"

"풀어 보세요."

백아린의 말에 그녀는 곧장 받아 든 비단을 조심스레 풀어헤쳤다. 안에는 찢겨져 있는 소맷자락이 있었다.

얼룩이 져 있는 두 개의 소맷자락.

당소련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피로군요."

"맞아요. 다른 하나는 꿀물이라고 하더군요."

백아린의 말에 그녀는 조심스레 두 개의 소맷자락을 확인했다.

잠시 얼룩들을 바라보던 당소련이 이내 그것들을 다시금 비단 위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에 독이 묻어 있나 보군요."

"바로 알아차리셨네요."

"독이 관련된 일이 아니고서야 적화신루가 저희에게 의뢰할 건수가 없으니까요."

"이미 알고 계시니 긴 설명 하지 않을게요. 이 독이 무엇인지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최대한 빠르게요."

"흐음."

당소련은 소맷자락을 바라보며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예 독이 담긴 병 같은 걸 가져다주었으면 모를까 성분을 파악하기 힘들게 피와, 꿀물에 섞인 독이다. 당연히 그 정체를 파악하는 건 그리 녹록지 않았다.

거기다가 시간이 지나면 점점 독 기운이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

잠시 계산을 하던 그녀가 이내 판단을 내리고는 말했다.

"알려져 있는 독이라면 무조건 파악할 수 있어요. 다만 특별한 독이라면 확률은 칠 할 정도예요."

"그 칠 할이라는 게 파악에 성공할 확률인가요, 아니면 실패할 확률인가요?"

백아린의 질문에 당소련이 씩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성공이죠."

다른 것도 아닌 독에 관련된 일이다.

그것에 한해서만큼은 사천당문은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죽립 안에서 백아린 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반신반의했는데 사천당문에게 의뢰를 가지고 오길 잘했네요."

"잘하셨어요. 저희가 알아내지 못한다면 세상 그 누구도 알아낼 수 없으니까요."

당소련이 자신 있게 말을 받았다.

말을 끝마친 그녀는 소맷자락이 들어 있던 비단을 다시금 조심스레 접어 품 안에 넣었다.

당소련이 입을 열었다.

"이 의뢰 받아들이죠. 그럼 이제 저희 쪽의 요구를 이야기해 볼까요?"

"네, 하시죠."

"적화신루의 정보를 저희가 이용했으면 해요. 물론 금액은 섭섭지 않게 치를 생각입니다."

"직접 연락을 할 수 있도록 사람 하나를 사천당문에 보내도록 할게요. 앞으론 그를 통해 의뢰를 하시면 될 거예요."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리고 하나 더."

당소련이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가 이내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이번에 만들어진 저희의 인연이 숙부님에게까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조심스레 꺼낸 그 한마디에 백아린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소련은 적화신루의 정보망을 그녀의 숙부가 이용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었다.

당문추(唐聞秋).

사천당문 가주의 동생으로 오랫동안 가문을 이끌어 오던 인물 중 하나다.

능력이 뛰어나서 무림에서도 그 위명이 쟁쟁했지만 언제나 가주인 형에게 가려져 이인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사내.

현 사천당문 가주인 당세종(唐世宗)은 나이를 먹으며 점점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찾아온 병환은 그를 더욱 약하게 만들었다.

상황이 이리되자 다음 가주 직을 놓고 사천당문은 지금 보이지 않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당문추는 가주 직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사천당문은 거의 두 개로 나눠지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가주의 딸인 당소련은 당문추의 반대편에 선 인물이었고, 그와 대적할 힘을 쌓아 가고 있었다. 오늘 적화신루를 만난 것 또한 그러한 과정의 연장선이라고 봐야 옳았다.

이미 사천당문 내부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백아린이 대답했다.

"그분이 저희에게 의뢰할 일은 없다고 생각돼요. 이미 그분은 개방과 연줄을 만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들었거든요. 아마 그 성과를 곧 내지 않을까 싶고요."

"……이렇게 대화하기 편한 분은 처음이군요. 뭐든 알고 계시네요."

"어쨌든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늘 저에게 도움을 주시겠다고 하신 분이 어느 쪽인지 너무도 잘 아니까요. 이미 그분 쪽에 발을 담근 이들이 누군지도 다 파악하고 있으니, 그쪽 의뢰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최대한 받지 않도록 하죠."

"대답을 들으니 한결 안심이 되네요. 그럼 저희 쪽에서도 이 독에 대해 알아보고 연락을 드려야 하는데 보내 주신다는 분을 통하면 될까요?"

"그렇게 하시면 될 것 같아요."

"네, 그럼 그렇게 하죠. 조만간 좋은 소식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말을 마친 백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여나 얼굴이 보일까 죽립의 앞부분을 꾸욱 누른 그녀가 포권을 취해 보였다.

마찬가지로 당소련 또한 포권으로 화답했다.

말을 마친 백아린은 곧바로 몸을 돌려 객잔 바깥으로 걸어 나갔고, 이내 열린 문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던 사천당문의 무인이 걸어 들어왔다.

당소련이 수장으로 있는 사천당문의 독륜당 소속 무인으로 그녀를 보필하는 임무를 맡은 당민이라는 자였다.

당민이 입을 열었다.

"당주님, 첫 일정이 끝나셨으니 예정대로 하오문과도 비밀리에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적화신루와의 만남이 있긴 했지만 사실 당소련은 확실히 마음을 정하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적화신루가 개방이나 하오문에 비해 모자라다 여겼던 탓이다.

가능하면 정파를 대표하는 문파로서 하오문과의 직접적인 거래는 피하고 싶긴 했지만 우선은 급한 불부터 끄는 것이 먼저였다.

자신이 상대해야 할 당문추를 막아야 했으니까.

그랬기에 다소 안 좋은 뒷말들을 감수하면서 하오문과의 거래까지 염두에 둔 상황이었는데…….

잠시 앉아 있던 당소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뇨, 그 계획은 취소하죠."

"……예?"

놀란 듯 그가 되물었을 때다.

당소련이 대꾸했다.

"저들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적화신루.

세간에 알려진 그들의 모습은 극히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이미 그들이 사천당문 내부의 문제를 모두 꿰뚫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정도의 정보력이라면 충분히 믿을 만하다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정도라면 굳이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하오문과 거래를 할 필요가 없었다.

웃는 얼굴로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당민이 말했다.

"당주님께서는 방금 그자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그러게요. 원래 쉽사리 누굴 평가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군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호감은 또 처음인데 말이죠."

"젊은 것 같았지만 상당한 실력자였습니다."

"그래요? 당민 당신도 이렇게 쉽사리 누군가의 실력에 감탄하지 않는데 의외네요."

"장담할 순 없지만…… 제가 움직이기도 전에 움직일 걸 알았다고 해야 할까요?"

"본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당신의 움직임을요?"

정파를 대표하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사천당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라는 건 정말 엄청난 것이다. 그런 그였기에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상대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다른 이도 아닌 당민이 이토록 순수하게 감탄하는 걸 보니 방금 찾아왔던 그 여인의 무공 실력에 대한 궁금증 또한 치밀었다.

당소련이 방금 전까지 백아린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적화신루의 사총관이라……."

* * *

중원 어딘가에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

검은 휘장과, 짙은 어둠이 감도는 그곳에 누군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자가 문 긴 곰방대에서는 하얀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긴 적막만이 감도는 방 안으로 갑자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자는 곧바로 휘장 너머의 누군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아른거리는 그림자를 향해 사내가 말했다.

"사천에서 천룡(天龍)이 움직였습니다."

"……흐음?"

반쯤 누워 있던 그림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내 휘장 건너의 인물에게서 긴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상하군. 천룡이 지금 사천에 있을 리가 없는데."

"아, 그가 아닌 작은 천룡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큭……! 난 또 뭐라고. 천무진인가 뭔가 하는 그놈 이야기로군."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휘장 너머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고는 이내 다시금 여유롭게 자세를 바로잡고는 말을 이었다.

"세상에 용은 단 하나뿐이다.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용이 될 수는 없지. 사천에서 움직이는 그놈 또한 마찬가지야."

말을 마친 정체불명의 인물이 곰방대를 길게 빨아들였다.

하얀 연기가 다시금 허공으로 피어오를 때였다.

휘장 안에 있는 그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놈은 그저…… 용이 되지 못할 하찮은 이무기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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