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추론 ― 멀쩡해 (2)
몸을 감춘 천무진은 다가오는 상대의 기척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이런 늦은 시각, 살인이 일어났던 장소에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벽에 기댄 채로 숨을 죽이고 있는 그때 마침내 그 기척의 주인공이 문을 열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무기가 그자에게로 향했다.
스윽.
천무진의 검이 목에 닿았고, 백아린의 대검이 뒤를 막았다.
순식간에 상대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상황에서 천무진이 놀란 듯 뻣뻣하게 굳은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움직이지 마. 죽는다."
경고와 함께 천무진의 눈이 빠르게 상대를 훑었다.
나이는 십대 후반 정도로 무척이나 젊은 사내였다. 그리고 한눈에 봐도 잔뜩 긴장한 것이 느껴질 정도로 얼어 있었다.
허나 무엇보다 시선을 잡아 끈 건 사내의 손에 들린 하나의 물건 때문이었다.
덜덜.
가볍게 떨고 있는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은 다름 아닌 밥상이었다.
대여섯 개의 간단한 반찬과 밥, 그리고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국까지 있는 단출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한상차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천무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야 이게?"
이 늦은 시각 이곳에 찾아오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며 천무진은 두 개의 경우를 예상했다.
첫 번째는 이곳에서 당백을 죽인 범인이거나, 그와 관련되었을 자일 경우. 두 번째로 몰래 잠입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뒤쫓은 누군가가 있을 경우였다.
허나 들어온 상대는 기척을 감추지도 않았고, 그럴 실력도 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뒤를 쫓은 자는 아니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첫 번째 의심이었던 이번 살인에 연관되었을 자라는 거였는데…… 그렇게 보기엔 손에 들린 저 밥상은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백아린의 뒤편에 서 있던 당소련이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아는 분이에요?"
백아린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직까지도 무기를 겨누고 있는 두 사람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무기를 치우세요. 당인(唐寅)이라고 당백 사숙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아이에요. 범인이 아닙니다."
"가까이에 있던 자라면 더 의심해 봐야 하는 상황이에요."
"그래도 당인은 절대 범인이 아니에요."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가 뭐죠?"
물어 오는 백아린을 향해 당소련이 차분하게 답했다.
"……그는 제대로 무공을 펼칠 수 없으니까요."
사천당문의 피를 이었지만 선천적으로 무공을 익히기 어려운 신체를 타고난 당인이다.
그랬기에 기본적인 것들을 조금 배우긴 했지만 호신용조차 되기 어려운 미미한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삼류를 조금 넘어선 정도의 실력.
그런 그가 당백을 죽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당인은 무공보다는 독에 대한 연구를 전담으로 맡은 사내였고, 당백의 곁에서 그의 지식을 전수받던 중이었다.
당소련의 대답을 들은 백아린이 천무진을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고, 죽립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거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두 사람은 동시에 각자의 무기를 거뒀다.
당소련의 말을 듣고 우선은 검을 치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의심까지 거둔 건 아니었다.
천무진이 물었다.
"여기는 사람이 죽은 장소야. 그런 장소에 왜 아무도 없는 이 늦은 시각에 음식을 들고 나타난 거지?"
방금 전까지 검이 닿아 있던 목을 어루만지던 당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마지막 식사를 챙겨 드리지 못한 게 자꾸 마음에 걸려서요."
식사를 하라고 찾아왔던 자신을 당백은 시끄럽다며 쫓아냈다. 평소 자주 있는 일인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물러났거늘 그것이 우습게도 사부인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되어 버렸다.
말을 하면서 감정이 복받쳤는지 당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끅끅, 아무리 열중하고 계셨어도 어떻게든 식사를 하도록 모셨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제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그렇게 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당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아린이 황급히 물었다.
"잠시만요. 그럼 당백이라는 분이 죽기 직전에 당신을 만나셨다는 말인가요?"
"예, 그랬습니다."
"저 그럼 혹시 그때 뭐 이상한 거 없었어요? 무엇을 들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당신에게 뭔가를 이야기하셨다거나요."
"아뇨, 평소처럼 절 귀찮아하시면서 그냥 하시던 일에 열중하고 계셨습니다. 아, 그런데 갑자기 손가락에 상처를 내시더라고요."
"자기 손가락에 말인가요?"
"예. 그러고는 놓여 있는 천 조각에 손가락에 맺힌 피를 쥐어짜고 계셨습니다."
"피를…… 쥐어짜요?"
천 조각이라면 분명 자신들이 건네준 바로 그 물건일 터. 그런데 그곳에 피를 쥐어짜고 있었다?
백아린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때 어때 보이셨어요?"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당시 당백이라는 분의 상태요."
"뭔가를 고민하고 계시다가 갑자기 잔뜩 흥분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손가락에 상처를 내셨고요."
당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백아린은 점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뭔가를 알아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정답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최소한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랬으니 입을 막기 위해 당백을 죽였을 것이고.
백아린이 말했다.
"분명 당백이라는 분은 뭔가를 알아내셨어요. 독이 묻어 있는 천에 피를 짜내셨다는 걸 보니 그게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바로 그때였다.
"……혈린만혼산(血燐萬魂散)?"
당소련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천무진과 백아린의 귀에 들어왔다.
그녀를 향해 천무진이 물었다.
"그게 뭡니까?"
"사천당문 내에 금기로 정해져 있는 독이에요. 피와 섞이면 독성이 사라지는 특이한 종류의 것이죠. 아무래도 사숙은 그 독을 혈린만혼산이 아닌가 의심했던 모양이에요."
"지금 그 말은 천에 묻어 있던 독이 사천당문의 것이라는 소립니까?"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겠죠. 오히려 피가 묻으면 사라진다는 특이성을 보면 그럴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요."
"혈린만혼산이라는 독을 외부에서 구하는 게 가능합니까?"
"아뇨, 방금 말씀드렸던 것처럼 금지된 독으로 정해져 있어서 아주 일부만 금장전에 감춰져 있어요. 만드는 방법조차도 극비고요. 외부에서 구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해요."
당소련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에 사천당문의 금기된 비전 독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현실이 말해 주고 있었다.
사천당문 내에서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고.
당소련이 말을 이었다.
"금장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사천당문에서도 다섯 명밖에 없어요."
금장전에 출입할 수 있는 다섯.
그중 누군가가 혈린만혼산을 바깥으로 빼돌렸다.
거기다 정황을 보고 추측건대 그 같은 일을 벌인 자는 당백을 죽인 범인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 말은 곧…… 그 다섯 중 최소한 한 명은 천무진이 찾는 그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 같은 사실을 직감한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혈린만혼산을 빼돌린 게 누군지 알아내실 수 있겠습니까?"
"……."
당소련은 침묵했다.
출입이 통제된 만큼 금장전을 지키는 이가 있다. 그를 통해 근래에 그곳을 드나든 이들을 확인해 볼 수야 있겠지만 문제는 이 모든 일이 사천당문 내부의 일이 될 거라는 소리다.
적화신루에서 의뢰한 독이, 그리고 당백의 죽음이 모두 사천당문 안에서부터 조사해야 할 일이 되어 버린다.
허나 이대로 넘길 일은 분명 아니었다.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다가 죽게 된 당백을 위해서도.
마음을 정한 당소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죠."
* * *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휘장 건너의 인물은 꽤나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얼마 되지 않아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그자는 자신의 거처로 들어서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숙면을 방해했군요. 죄송합니다."
"됐어. 무슨 일이지?"
"말씀하신 천무진에 대한 정보가 들어와서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천무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휘장 안쪽의 그림자가 길게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품을 한 그자가 손짓을 하며 말했다.
"해 봐."
"지금 천무진을 돕고 있는 건 크게 둘입니다."
"그게 누구지?"
"단엽과 적화신루입니다."
"……단엽이라는 게 대홍련의 애송이를 말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대홍련이 직접 도움을 주는 건 아니고?"
"파악 중이긴 한데 아직까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추후에 그럴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순 없습니다만 지금은 단엽만이 천무진을 따르고 있습니다."
"대홍련이라…… 생각지도 못한 놈들을 끌어들였군그래."
대홍련은 사파의 거두로 귀찮은 존재들이었다.
허나 휘장 너머의 인물은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고작 대홍련 정도로 긴장하기엔 그자는 너무도 특별했으니까.
휘장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얼마 전 우리 쪽 놈을 죽였다는 게 단엽인가?"
"그런 걸로 파악됩니다. 무림맹에 숨겨져 있던 저희 세력을 어떻게 찾아내서 건드린 건가 했는데, 아무래도 그때 단엽이 양휴를 데리고 가면서 그 일이 밝혀진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걸 알아냈는지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하군그래."
자신 쪽의 세력 하나가 당한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그자는 무덤덤했다. 그만큼 그 사건이 이들에게는 큰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자가 되물었다.
"지금은? 지금 그 녀석은 뭘 하고 있지?"
"잘은 모르겠으나 사천당문과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양새입니다. 저희가 사용한 독의 정체를 알아봐 달라고 의뢰를 했다더군요."
"뭐? 그래서?"
"다행히 사전에 막아 냈다고 합니다."
수하의 말에 휘장 안에서 움찔했던 그림자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꼴에 천룡성 놈이라고 귀찮게 하는군."
"그냥 두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지. 지금 그놈을 죽일 순 없잖아?"
모종의 이유로 천무진을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에 잠겨 침묵하던 그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대로 당해주기만 하면 억울하니 우리 쪽에서도 선물 하나 정도는 보내 줘야겠군. 천무진에게서 확인해야 할 것도 있고 말이야. 사천에 연락을 넣도록 해."
"어떻게 처리하라고 할까요?"
"그 녀석의 양팔 중 하나 정도 잘라 줘. 그러면 좀 조용해지지 않겠어?"
휘장 너머의 상대가 말하는 팔이라는 건 진짜 천무진의 신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자가 말한 양팔은 다름 아닌 천무진을 돕고 있는 두 개의 세력을 뜻했다.
단엽과 적화신루.
그 두 개 중 하나를 쳐 내려고 하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수하가 이내 되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천무진에게서 확인해야 할 거라는 건 어떻게 처리를 할까요?"
"아아, 그건 그냥 내버려 둬. 그 일은 십천야(十天夜)가 직접 움직여야 할 것 같으니까."
십천야라는 말을 듣는 순간 수하의 얼굴에 놀란 빛이 역력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는 그들이다.
그런 그들을 움직이겠다니…….
휘장 안쪽의 인물이 중얼거렸다.
"천무진에게 누굴 보내야 하나."
잠시 이어지던 고민.
하지만 이내 결정을 내린 그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 반조(潘照) 그 녀석이 좋겠군."
반조라는 이름을 듣기 무섭게 수하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조를 말입니까? 그는 너무 위험합니다."
수하의 놀란 듯한 모습에 휘장 안쪽의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그가 너무 위험하다니?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이내 그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애초에 십천야 중에…… 위험하지 않은 자가 있던가?"